정신 (독립운동가)

鄭信. 이명은 정윤(鄭潤).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9년 여준, 정안립(鄭安立), 박찬익 등 39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지린성 왕청현에 군정부를 조직하고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려 했으며, 그해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된 뒤에는 인사국장에 취임하여 활동을 지속했다.

1920년에는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府) 재무관서 참사(參事)로서 일하였으며, 1922년 10월에는 국민대표회의에 북간도 대한독립군대표로서 참가했다. 1923년 2월에는 지청천, 배천택(裵天澤)·신일헌(申日憲)·김동삼·최기현(崔基鉉)·김철(金澈) 등과 함께 군사분과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리고 1924년에는 상해교민단 제110회 정기이사회에서 회계검사원으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이동했으며, 같은 해 이동녕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대통령권한을 대행할 때에는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5년 북만주로 귀환한 그는 영안현에서 김좌진, 김혁(金赫),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연락부 위원장으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 등의 간부가 체포된 뒤에는 경리부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군민의회(軍民議會)의 민사부 위원(民事部委員)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제와의 무력 항쟁을 우선시하는 군정파의 대표가 되어 민정 우선을 추구하는 최호(崔灝) 등과 심각한 갈등을 빛었고, 김좌진과 함께 빈주 사건을 저지르는 바람에 1928년 11월 하순 민정파를 지지하는 신민부 관할 6개현이 결집한 북만주민대회에서 "민중의 생명을 학살하고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 혁명적 사기한의 장본인 김좌진, 정신 등을 매장하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신민부에서 더는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1929년 7월 중동선에서 김좌진, 김종진, 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했다. 1930년 김좌진이 암살된 후에는 그가 실질적인 지휘자가 되어 한족총연합회를 이끌었으며, 이와 별도로 지청천, 홍진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서 일하였다. 그러나 1931년경 중국 지린성 길장선 화피역에서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