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스 사무소/역사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창립자인 쟈니 키타가와로스앤젤레스 출신으로, 원래 한국 전쟁 당시 한국에 넘어가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미국 대사관에서 영어를 번역하는 일을 하곤 했다. 당시 아버지가 일본 연예계에 관련이 깊어서 당대 최고의 엔카 가수였던 미소라 히바리와 친분이 생겼고, 1955년 대학에 진학하자 밴드를 결성하여 연예계 진출까지 성공한다. 물론 엄청난 성공을 거두진 못했고, 당시 자신을 잘 따르던 동네 아이들과 야구단인 〈쟈니즈 소년야구단〉을 결성했고, 야구감독 겸 코치를 도맡아 하게 됐다.

당시 야구단 이름은 "올 에러즈", "올 헤타즈" 등등으로 부르다가 멤버였던 아오이 테루히코가 "쟈니 아저씨가 감독이니까 쟈니즈라고 해요."라고 제안했고 그렇게 전설이 탄생했다.

창립[편집 | 원본 편집]

1962년의 어느 날, 비가 와서 야구 연습을 못해서 아이들과 함께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러 가는데, 그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은 쟈니 감독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춤과 노래에 소질이 있던 4명의 아이들에게 레슨을 진행하고, 이 아이들이 쟈니즈 최초의 아이돌 그룹인 쟈니즈가 된다. 쟈니 사장은 쟈니즈를 통해 미국식 쇼 비지니스를 일본 연예계에 접목시키려고 했고, 이로 인해 본인이 직접 기획사 쟈니즈 사무소를 차린다.

1960~70년대[편집 | 원본 편집]

성공기[편집 | 원본 편집]

처음에는 다른 예능 프로덕션 소속으로 활동하곤 했으나, 사무소를 차린 이후 당시 유명 기획사인 와타나베 프로덕션과 제휴해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독립적인 운영이 가능해진 건 어느 정도 연예계에 자리를 잡은 1965년부터였다. 쟈니즈가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자리를 잡자 영역을 넓혀 나갔다. 1966년에는 그룹을 위한 백 밴드인 하이 소사이티, 그리고 댄스가 가능한 인재들을 모아 백댄서 그룹을 결성시킨다. 이 백댄서 그룹은 쟈니즈 후속 그룹으로 포 리브스라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으나, 백댄서로 활동할 때는 쟈니즈 주니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한다. 이 쟈니즈 주니어가 발전하면서 쟈니스 사무소의 연습생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다.

1967년, 쟈니즈가 해체하고 바로 그 후속 그룹인 포 리브스가 데뷔한다. 당시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10대 가수가 포 리브스 말고는 없다시피했기 때문에 초반에 일본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한다. 그러다 1972년에는 또 한 명의 인재 고 히로미[1]가 데뷔하면서 초절정의 인기를 누리면서 쟈니즈의 초반 성공을 가져다준다. 이 때 고 히로미의 백댄서 팀으로 쟈니스 주니어를 정식 출범한다. 당시 약 20명의 연습생을 데리고 있었고, 3명은 후속 그룹인 쟈니스 주니어 스페셜로, 6명은 고 히로미의 백댄서 팀으로 활동 시키기 시작했다.

암흑기[편집 | 원본 편집]

하지만 1975년, 고 히로미가 백댄서 팀 멤버 중 5명과, 주니어 스페셜이었던 야마가타를 데리고 바닝 프로덕션으로 이적해버린다. 이유인즉슨 초반에 백댄서 팀 멤버 2명이 바닝으로 먼저 이적해서 야마가타가 백댄서 팀에 합류했고, 쟈니즈는 이 백댄서 팀을 "쟈니스 주니어 에이스"로 만들려고 했다가 딱 한 명만 남고 다 고 히로미와 같이 이적해버린 것.[2]

고 히로미의 이적은 초기 쟈니즈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져왔고, 장장 1980년까지 쟈니즈에 첫번째 암흑기가 찾아온다. 물론 이 시기에 쟈니즈 가수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데뷔 예정이었던 쟈니스 주니어 스페셜을 재정비해서 데뷔시키고, 1974년에는 토요카와 죠를 데뷔시켰다. 하지만 토요카와가 1977년에 퇴사하자 카와사키 마요를 데뷔시키면서 근근이 이어나갔다. 특히 카와사키 마요는 거의 암흑기의 쟈니즈를 먹여 살렸다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이 시기에 쟈니즈는 여성도 쟈니즈 주니어, 쟈니즈 소속 연예인으로 키우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잠깐 데뷔했다 사라진 쓰리 양키즈가 좋은 예시. 다만 쓰리 양키즈는 야구방송의 일환으로 데뷔했기에 종영하고 바로 해체한 점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나고부턴 여성 연예인을 발굴하는 일은 없었다.

1980년대[편집 | 원본 편집]

전성기[편집 | 원본 편집]

그러다 1980년, 콘도 마사히코, 타하라 토시히코를 위시한 타노킨 트리오를 데뷔시키면서 전세를 역전한다. 콘도 마사히코는 일명 〈긴기라기니〉란 곡으로 한국에서도 인지도를 높였고, 80년대 톱 아이돌로 자리매김을 했다.

암흑기[편집 | 원본 편집]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실력파를 내세운 오토코구미, 닌자가 차례로 실패하고, 점점 음악방송들도 하나둘씩 폐지되면서 그나마 늦게 방영을 시작한 뮤직 스테이션만 남은 상황이 된다. 전체적으로 시장 자체가 아이돌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게 된다.

1990~2000년대[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친근감을 내세운 SMAP이 국민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쟈니즈가 다시 떠오르는 계기가 된다. 멤버 기무라 타쿠야가 인기를 싹쓸이했고, 심지어 한국에도 일본 연예인으로 기무라 타쿠야가 알려질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멤버 나카이 마사히로는 국민 MC 자리를 누리고, 쿠사나기 츠요시는 한국에서 초난강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멤버였다. 전체적으로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많이 구르면서 국민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거기다 쟈니즈 주니어도 주니어만을 위한 정규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코너로 얼굴을 많이 알렸다. 이 시기에 타키, 야마삐, 아라시 멤버들이 주니어 시기에 인지도를 많이 높였으며, 주니어 황금기라고 부를 정도로 주니어가 많이 흥했었다. 잘생긴 소년을 위주로 뽑는 주니어인지라 잘생긴 소년이 있으면 "주니어 아냐?"라고 할 정도였다고. 이 시기엔 배구 월드컵 마스코트로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는데, 1995년 V6부터 2011년 Sexy Zone이 데뷔할 때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2006년 KAT-TUN이 데뷔한 이후로는 조금씩 주춤한다. 어마어마한 수의 연습생을 데리고 있으면서 10년 넘도록 데뷔를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워낙 폐쇄적인 운영을 계속하다보니 인지도를 높이는 것에도 어느 정도 제약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2010년대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설상가상으로 매출의 큰 부분을 차지하던 SMAP2016년부로 해산을 발표했다. 당시 기무라 타쿠야, 나카이 마사히로를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쟈니즈를 나왔다.

2018년부터 파격적인 정책을 내세운다. 그렇게 음원 유통도 안하고 뮤직비디오[3]도 공개 안하던 쟈니즈가 유튜브 채널을 개설한다! 쟈니즈 공식 채널, 쟈니즈 주니어 채널, 아라시 공식 채널, 주니어로부터 데뷔한 SixTONES, Snow Man 공식 채널을 차례로 개설한다. SixTONESSnow Man은 각각 북미 시장, 아시아권 시장을 노리고 만든 그룹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020년 12월 31일부로 아라시 역시 그룹 활동을 무기한 중지한다고 밝혔다. 멤버 오노 사토시2021년부터 연예계 활동도 중지한다고 밝혔으나, 쟈니즈에는 계속 소속될 예정이라고 한다. 국민 그룹으로 칭송받던 아라시기에 쟈니즈에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각주

  1. 고 히로미 역시 포 리브스처럼 쟈니즈에서 백댄서로 활동하다 데뷔한 케이스다.
  2. 이후 바닝으로 이적한 총 6명의 연습생들은 멧츠(METZ)라는 팀을 결성해서 활동했지만, 별로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3. 엄밀히 말하면 프로모션 비디오로, 이 프로모션 비디오조차 공식적으로 무료 공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돈 안 내도 무료로 뮤직비디오 볼 수 있는 K-POP과 대조적이었다. 물론 K-POP도 초기에는 고화질 유료화를 진행한 적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