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労働総同盟)은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일본내 조선인 노동조합 연맹이다. 3·1 운동 이후 대중운동의 활성화, 일본내 사회주의 운동의 강화의 영향을 받아 일본내 조선인의 노동운동을 조직화 하려는 시도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재일본 조선인의 거의 15%에 이르는 3만 명의 조합원을 가진 거대조직으로 성장하였으며 최대 전성기에는 4만여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하여 조선인의 노동쟁의를 주도했으며 당시 일본 노동조합 연맹이었던 일본노동조합평의회와도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1928년 프로핀테른은 일본노동조합평의회와의 통합을 권고했고, 논쟁 속에서 1930년 10월 해소되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로 편입되었으며, 조선인 문제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산하의 조선인위원회에서 다루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조합원은 2000여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설[편집 | 원본 편집]

첫째로 우리는 단결의 위력과 상호부조의 조직으로 경제적 평등과 지식 개발을 도모한다. 둘째로 우리는 용기와 용감한 전술로 자본가계급의 억압과 박해에 대해서 철저히 투쟁할 것을 도모한다. 셋째로 우리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양립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노동조합의 실력으로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자유와 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도모한다.
—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강령

1924년에 들어서면서 노동운동의 강화, 노동운동의 대중투쟁 강화, 노동자의 연대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한반도 내에서는 노동운동계의 통합조직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이에 따라 1924년 4월, 조선노농동총연맹(朝鮮勞農動總聯盟)이 결성되었다. 한반도 내에서의 노동운동계의 결집은 곧 일본내 조선인 조직들의 결집으로 이어졌다. 당시 재일한인운동을 주도하던 일월회는 관동대지진으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동경조선노동동맹회(東京朝鮮勞動同盟會)의 재기를 시도하는 한편, 대판조선노동동맹회(大阪朝鮮勞動同盟會)[1]와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1925년 2월 15일. 이헌등 준비위원들은 사무실에서 회의를 가지고 일본노동총동맹과 협조하여 조선무산계급 운동을 하고, 2월 22일 콩 까지마! 창립대회를 열기도 합의하였다.

의의[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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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대판은 오사카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으로 당시 재일한인들은 그냥 대판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