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 (18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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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泰秀.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 남강거사(南岡居士).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41년 12월 24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서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장한두(張漢斗)로 첨중추(僉中樞)를 지냈다. 그는 1861년 정기 과거시험인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고, 이후 승문원 군지부정자로 임명되어 외교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장령, 예조정랑 등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그리고 1867년에는 목민관인 양산군수에 임명되어 민생안정에 힘쓰고, 부국양병에 주력했다.

이윽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고쳐 제향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오른 장태수는 1872년에 고종을 수행하여 개성에 다녀왔고, 병조참의 동부승지, 춘추관 수찬관을 지내는 등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또한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다시 외직인 고산현감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1895년 8월 20일, 일제가 을미사변을 자행했다. 이후 정부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을미개혁을 진행했고 그해 11월에 단발령을 발표했다. 이에 장태수는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를 칭하며 은거했다. 그러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 관직에 다시 나아간 그는 고종을 츠근에서 모시는 시종원부경이 되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그는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라고 하며 통곡했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 은둔했고, 의관을 정제하지 않고 지냈으며 사람을 만나도 말하고 웃는 일이 없었다. 한편 일제는 작위와 은사금을 여러 지도층 인사들에게 내려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1910년 10월 7일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 귀족들에게 작위를 봉해고 수만 엔에서 수십만 엔에 이르는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윽고 일본 헌병이 장태수에게 찾아와 은사금을 받으라고 권하자, 그는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헌병을 내쫓았다. 그러나 헌병들이 연이어 찾아와 은사금을 받으라고 위협하며 세 아들을 잡아갔다. 이에 그는 조상의 사당에 통곡하며 자신의 뜻을 알린 뒤 12월 4일 단식에 들어갔고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하나의 불충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또 하나의 불효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장태수는 곡기를 끊은 지 24일 만인 1910년 11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6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장태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가 순국한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의 남강정사는 전라북도기념물(1983)이 되었고, 집 안에 '일유재 장태수 선생사적비'가 세워졌다. 집 부근의 사당 서강사(西崗祠)에는 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