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

임병찬.jpg

林炳瓚.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1년 2월 25일 전라북도 옥구군(현재 군산시) 서면 상평리 남산재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천자문을 익혔고 5살 때에 같은 마을에 있던 사숙(私塾)에 나아가 유학자 송영숙에게 사자소학(四字小學)과 오언당음(五言唐音) 등의 글을 배웠으며 자치통감 등의 사서를 배웠다. 이후 향시 백일장에 참여하여 대고풍(大古風)으로 수석을 차지했으며 16살 때 전주부에서 실시하던 감시(監試)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했다. 도내의 많은 유림들은 임병찬이 아직 16살인 점을 들어 직접 쓴 글이 아닐 거라고 의심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직접 썼을정도로 임병찬의 학문적 소양은 탁월했다.

그러나 임병찬의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부득이 사역(使役)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병찬은 이 상황에서도 향촌민의 실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호방(戶房)을 담당하고 있는 기간에 해당 읍의 형편을 살펴보며 전세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수년에 걸친 흉년으로 농민의 실정이 곤궁한 것을 본 임병찬은 미곡으로 납부하던 것을 현금으로 납부하게 하고 전라감사에게 글을 올려 75냥의 세금을 실정에 맞춰 25냥으로 감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는데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호남 일대가 편안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1889년 봄 호남 지역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로를 인정하여 천거했고 고을 수령 이현직도고종에게 아뢰어 상을 내리기를 청했다. 조정은 이에 따라 임병찬에게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하사했으며 이후에도 백성을 구휼한 공을 인정해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했다. 임병찬은 낙안군수에 부임한 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막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고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멈추지 않으며 조정에서도 대책을 내놓지 않고 수수방관하자 1890년 43세의 나이로 낙안군수 직을 사임하고 귀향했다.

낙안군수 직에서 물러난 임병찬은 향리인 회문산 북쪽 종송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894년 4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시세가 어지럽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먼저 자제들을 모아 의(義)로써 일깨우고 가족에게 검소하게 생활하게 했다. 그리고 향민들을 타일러 동학에 가담하지 말고 맡은 본분을 잘 지키고 임금에게 충성하라고 당부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여러차례 제수했지만 모두 거부하고 향민 교육에 전념했는데 동리에 영소전(靈昭殿)을 짓고 공자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이곳에서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임병찬은 동학도 우두머리 김개남이 정읍 태인으로 피신한 사실을 알고 곧바로 관아에 고발해 체포하게 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소식을 듣자 동민을 거느리고 집 뒷산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곡을 했고 자리에서 동민에게 국가의 치욕을 설명하고 보국(報國)하기를 당부했다. 한편 자신은 후일 거사를 위해 준비를 하면서 먼저 가산을 정리하고 자신의 노복(奴僕)을 풀어줬다. 그러나 임병찬의 동태는 시시각각 일본에게 사찰되었고 한번은 투옥되어 며칠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03년 겨울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들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병찬은 크게 근심하며 화가 곧 닥칠 것이라 여겼고 러시아와 일본의 전운이 감돌자 1904년 정월 의병을 일으킬 목적으로 각 고을의 군수, 도의 관찰사, 중앙의 대신에게 통문을 발송했다. 통문의 내용은 시세의 변화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대처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전라감사 이용직은 임병찬을 맞이해 계책을 물었다. 임병찬은 동학의 잔여 무리들이 일본에게 야합하여 국가에 해악을 끼칠 것이니 향약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시기가 적절치 않다고 보고 그의 요청을 따르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했지만 뜻이 맞는 동지가 없음을 한탄하고 부모의 여막에 거처하며 거사를 계획했다. 1906년 정월 최익현과 사제의 의를 맺고 6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 날로 태인을 점령해 군량과 군기를 확보했다. 이어 정읍,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는 동안 근방 포수들이 모여 진영은 9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6월 12일 의병대가 순창에 진을 쳤을 때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군사가 막아서자 최익현은 관군과 싸우는 것은 불가하다며 의병을 해산했다. 임병찬은 최익현 등 13명과 함께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고 1906년 7월 9일 대마도에 감금되어 최익현이 단식 투쟁하다 사망하는걸 지켜봤고 1907년 1월 일본 황태자 가례에 따른 사은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귀국했다.

부산 상무회의소에 도착한 임병찬은 상무회의소 회원 김영규로부터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로부터 가담할 것을 권유받자 즉시 승낙하고 친지들을 불러모아 단연을 맹세하게 하고 각처에 단연 동맹 운동에 관한 통문을 발송했다. 또한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작성한 유서를 고종에게 바쳤는데 이 일로 1908년 2월 22일 전주의 일본 수비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8월 4일 조선 통감부로부터 제수된 영광군수를 거부했다가 천안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3차례에 걸친 강도높은 수사를 받다가 10월 3일 풀려나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임병찬은 의병을 일으킬 마음을 먹고 은밀히 준비했다. 1912년 9월 28일 공주 유생 이칙(李侙)이 그에게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고종의 밀명을 전달했다. 관직이 전라남도 자체의 의병 운동으로서의 책임을 맡긴 것인지, 전국적인 조직 운동 아래에서 전라남도의 책임을 맡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병찬이 지금까지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지역은 전라북도에 한정되었고 전라남도와는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전라남도까지 맡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임병찬은 2차례에 걸쳐 사직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거의일기>에 관련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황칙을 받들고 감히 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또 명분도 확실하고 말도 정당합니다. 비록 황칙이 없었다 할 지라도 어찌 좆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이 용렬하고 어리석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 같아 혹 중대한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하여 상소를 올려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913년 2월 15일, 참판 이인순(李寅淳)이 다시 고종의 밀조(密詔)를 전하러 임병찬을 방문했다. 그는 임병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합방이 된 이후 보국의 도 자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어서 3천리 강산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외국에 수치스러움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감께서는 일의 성패에 연연하지 말고 독립하기를 도모하십시오.

임병찬은 잠시 침묵하다 이윽고 답했다.

비록 재주는 없으나 황칙이 이렇게 간곡하신 데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임병찬은 2월 16일 고종의 밀명을 받들고 온 이인순을 아들 임응철로 하여금 서울로 배웅한 후 참판 이명익, 김재순, 곽한일, 전용규 등과 대사를 논의하게 했으며 다른 아들과 손자들로 하여금 각지를 순회하며 동지를 규합하게 했다. 이와 함께 한국인의 민족 운동 추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현 시점에서 일제에 맞서 투쟁할 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하여 고종에게 은밀히 바쳐 독립의군부의 활동 방향과 투쟁의 방법으로 삼을 것을 요청했다. 관견의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천하대세를 논한다


2. 시국형편을 논한다

3. 자신을 안다

4. 남을 안다

5. 천하의 때

6. 제승(制勝)

7. 정주(定籌)

8. 료인(料人)

9. 료사(料史)

10. 비어(備禦)

관견의 내용은 누구나 쉽게 보고 행할 수 있도록 국한문의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고종은 임병찬의 <관견>이 첨부된 상소를 받아들이고 그를 독립의군부 사령총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임병찬은 <관견>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전라남북도 각 군에 비밀 조직을 갖췄고 1914년 2월 몸소 서울로 상경해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 조직을 전국 360개군에 확대하여 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하고자 했다. 앙원수부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將)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에 5영을 두어 사령총장, 참모부악장 각 1명, 매 부에 관찰사 1명, 도약장 1명, 각 군에 군수 1명과 군약장 1명, 그 밑에 향장, 면장, 이장, 통장을 배치하여 조직적인 편제를 갖추고자 했다.

독립의군부의 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 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병합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규모 의병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1914년 5월 날짜를 정해 각국 공사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게 했으며 일정한 장소에 모여 연명 날인해 총독부, 경무부, 각 군면리 관서에 일제히 투서하게 했으며 투서 2일 전 밤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태극기를 계양하고 거사일이 지나면 곧바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1914년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모든 계획이 발각되었다.

임병찬은 실패하였다는걸 깨닫고 5월 23일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5월 29일 총독 대리로 온 경무총감 타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에게 국권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 반환 및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했다. 6월 1일 다시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총리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다.

1914년 6월 3일 임병찬은 독립의군부 간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모든게 끝났다고 여기고 자결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거문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거문도에서 2년간 지내다가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 투쟁을 벌이다 1916년 5월 23일 향년 66세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 자락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임병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