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747 jal2 (11).png Japan Airlines 123 - Estimated flight path en.png
사고 순간을 재현한 CG 비행 경로
최악의 단일 항공기 사고
기수올려! 기수올려! 더이상은 안돼!!
— -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 -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단일 최악의 참사이자 길이 남을 일본항공의 커다란 오점.

1985년 8월 12일 오후 6시 56분, JL123편(B747-100SR, JA8119)이 군마현 오스타카산 산악지대에 추락해 520명 사망, 4명 부상이라는 단일 기체 사고 중 최악의 기록을 남긴 사고이다.

도쿄 ~ 오사카라는 제1, 제2의 도시를 잇는 노선이라 원래 붐비는 노선이지만, 일본의 2대 명절인 오봉절의 연휴기간이기에 가족 단위로 탑승을 하거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을 보러가기 위한 사람들이 비행기에 탑승했던 터라 가족단위의 희생자들이 많은 사고였다.

사고 경과[편집 | 원본 편집]

기체 출고[편집 | 원본 편집]

보잉 747-100SR은 상당히 특이한 기체로, 일본 국내선의 넘쳐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설계된 모델이다. 원래 장거리 운항용이었던 기체의 항속 거리를 크게 줄이고, 이코노미 좌석 위주로 때려박아 대량 수송에 특화된 기체였다. 심지어 500석 이상의 단일 기체를 처음 달성한 기체가 이쪽 라인업. 이후 A380이 등장하기 전까지 2~300석 선에서 머물게 된다.

해당 라인업의 JA8119기는 1974년 1월 일본항공에게 인도되었다.

사고 7년 전[편집 | 원본 편집]

기체번호 JA8119기는 1978년 6월 2일 JL115편에 투입되어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도중 테일 스트라이크[1]를 당했다. 사고 충격으로 벌크헤드[2]가 찢어져 수리를 받아야 했는 데, 기체 지름보다 큰 단일 부품이라서 미국 시애틀 본사에서 공수하는 건 무리였고 보잉에서 직원을 급파해 찢어진 부위를 봉합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다. 이 사고로 후미가 휘는 동체변형이 일어났는데 사고부를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수리만 한 것이다.

일본항공은 수리 후 기체를 계속 운항에 투입했는 데, 사고 부위 부근의 화장실 문이 잘 안 닫히거나 객실 후미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등의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항공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그대로 기체를 운용했고 그렇게 비극이 찾아오게 되었다.

사고 당일[편집 | 원본 편집]

CVR 기록. 한국어 기록

사고당시의 처절했던 기내상황이 느껴지므로 비행기를 타기 전이라면 열람을 자제하자. 특히나 맨 마지막의 경고음과 충돌음은 섬뜩하다.

  • 운항 승무원
    •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高濱雅己, 49세)
      부기장의 기장 승격 시험 비행이었기 때문에 부기장석에서 보조 역할을 했다.
    • 부기장 사사키 유타카(佐々木祐, 39세)
      부기장의 기장 승격 시험 비행이었기 때문에 기장석에서 주된 역할을 했다.
    • 항공 기관사 후쿠다 히로시 (福田博, 46세)
      JA8119의 앞선 비행인 하네다-후쿠오카 왕복편부터 탑승하고 있었다.

1985년 8월 12일은 일본의 추석인 오봉 연휴가 끼어서 귀향하고자 하는 승객이 붐벼 항공편마다 만석을 이루고 있었고, 도쿄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JL123편도 예외는 아니었다. JA8119 기체는 2회 왕복 비행을 마치고 JL123편에 투입되었으며, 이 비행 후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이 끝나면 그 날의 스케쥴이 마무리 될 예정이었다.

505명의 승객과 15명의 승무원이 탑승한 JL123편은 주기장 정리로 인해 예정보다 약간 늦은 18시 04분에 도쿄 국제공항 18번 게이트를 떠나 18시 12분에 15L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 18:24:35 폭발음 2회 발생
  • 18:24:44 스쿽번호 7700 발신[3], 도쿄 컨트롤(ACC) 접수
  • 18:25:18 도쿄 국제공항으로 회항 요청
  • 18:26:00 항공 기관사가 유압이 빠른 속도로 소실되고 있음을 확인
  • 18:27:07 ACC에서 비상상황인지 확인한다. 설명을 요청했으나 JL123편의 응답은 없었다.
  • 18:28:36 조종 불능 선언
  • 18:31:08 ACC에서 나고야 국제공항 비상착륙을 제안하지만, 123편은 하네다를 요구했다.
  • 18:35:33 항공사-항공편 간 교신에서 기체 후미 도어가 파손되었다는 신호가 전달된다.
  • 18:39:42 기체 제어를 위해 렌딩 기어를 내린다.
  • 18:40:44 교신 분리를 위해 ACC에서 주파수 변경을 요청하지만, 응답이 없어 다른 항공편들이 변경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 18:45:36 주일미군 요코타 기지에서 똑같은 제안을 하지만 거부, ACC에서 하네다 APP로 이관을 제안하지만 거부.
  • 18:53:30 주일미군 요코타 기지 비상착륙 준비 완료.
  • 18:55:05 도쿄 국제공항 비상착륙 준비 완료, JL123편에게 통보
  • 18:55:12 기체 안정을 위해 플랩을 전개하나 순간적인 돌풍에 휘말려 산쪽으로 기수를 향하게 된다.
  • 18:56:14 GPWS Pull Up! 작동[4]
  • 18:56:23 충돌음, 숲을 스치면서 기체 후미·오른쪽 엔진 접촉
  • 18:56:26 충돌음
  • 18:56:28 CVR 녹음 종료

추락 후[편집 | 원본 편집]

추락 20분 후, 미 공군 C-130 수송기가 최초로 사고 현장을 발견했고, 보고된 위치를 토대로 항공 자위대 구난 헬리콥터가 20시 42분 경에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구난 장비는 갖췄지만 야간 작전을 원할히 해줄 야간 투시경같은 장비는 없어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지로 복귀했다.

사고 후 급히 조직된 대책위에서는 "추락 지점을 특정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구조 요청을 미루고 있었고, 정확한 추락 위치를 내놓으라면서 애꿏은 ATC만 갈궈댔다. 관할 현경에서는 엇갈리는 보고와 신고로 위치 특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기다 123편 화물 중에 의료용 방사능 기기가 있어서 방사선을 풀풀 내뿜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사고 수색이 시작된 것은 날이 밝은 13일 새벽으로, 자위대와 현경이 중심이 되어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 과정에서 4명의 생존자를 발견했으며, 중상을 입은 2명은 도쿄 소방청 헬리콥터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사고 직후에는 생존자가 다수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줄어갔다고 한다. 늑장 대응의 결과는 매우 처참했다. 생존자들은 출혈과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당시 대원들이 늦게 출동한 것은 수색헬기가 산악용이 아닌 해상용이고 야간 수색장비도 없었으며, 폭발로 인해 생존자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사고 다음날에 온것이라고 한다.

주일미군이 수색에 지원을 하겠다고 했지만 일본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사고로 인해 일본 국내선 항공편의 수요는 25%가 줄어들고 신칸센의 수요가 늘어났다. 남은 수요층 마저 일본항공이 아닌 전일본공수 항공으로 발길을 돌렸다. 테일스트라이크 사고를 일으킨 기장과 보잉의 수리사 등 관련 책임자들이 자살해서 일본항공 내부도 혼란스러운데다, 잇따른 사고로 떨어지던 신뢰도가 결정타를 먹고 바닥을 친다. 희생자 중 가수 사카모토 큐는 신뢰할 수 있는 전일본공수 노선을 선호했지만 당일 매진으로 마지못해 일본항공을 택했을 정도. 이후에 일본항공은 인명사고가 더이상 생기지 않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비행기 한대값을 아끼려다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참극을 만들고 비행기값보다 몇배 이상의 손해를 보게되고 말았다.

사고 당시에는 수리를 잘못한 보잉사의 책임이 컸지만 일본항공이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에 한동안 시달려야만 했다. 일본항공의 책임도 없지 않은게 사고로 동체변형이 일어날 정도로 파손이 심각한 기체를 폐기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용했기 때문이다.

사고기 잔해 일부는 일본항공 본사에 위치한 안전계발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음성 기록과 유품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일본항공의 정비사 및 승무원들이 교육시 필히 방문하는 곳이다. 관람료는 무료이고 일반인도 관람이 가능하지만, 관람하려면 사전에 예약이 필요하다. 6개월 전에 예약이 필요한게 불편하다.

본래 블랙박스의 음성 기록은 원본이 제공되지 않고 사고 보고서의 녹취록으로 제공되나, 어째선지 본 사고의 음성 기록이 2000년대 초에 방송국으로 유출되면서 30분간의 사투가 고스란히 공개되었다. 윗 문단의 영상도 그것을 토대로 한 것. 이 녹취록이 공개되기 이전까지 기장의 유가족들은 "520명을 죽이고도 뻔뻔하게 살아 있구나." 하는 비방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7년 8월12일 오사카로 향하던 ANA윙스 37편이 여압장치의 이상으로 하네다로 회항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행일자, 비행시각과 기체 이상이 발생한 시각, 기체결함 등이 1985년 당시에 일어났던 것과 일치한다는 부분이 소름돋는다. 매우 절묘한 일이기에 기사화 되었다. 다행히도 회항에 성공하여 전원이 생존했다.

원인[편집 | 원본 편집]

사고의 원인은 기체 후미의 벌크헤드 파손으로, 24분경의 첫 폭발음은 벌크헤드 파손으로 인해 객실 공기가 외부로 밀려나가는 소리다. 상대적으로 기압이 낮은 기체 후미를 객실 공기가 휘감으면서 순간적인 압력 변화를 견디지 못한 수직꼬리날개가 찢겨나갔고, 2번째 폭발음이 발생하면서 기체 안정성과 유압 계통을 함께 잃었다.

유압 계통이 소실되면서 통상적인 조종이 불가능해졌고, 승무원들은 엔진 4개의 추력만 조절해서 하네다로 회항하겠다는 결정을 했다. 2015년 현재까지 유압 계통이 소실된 사고가 123편을 포함해 3건이 있으나 완전한 착륙에 성공한 건 DHL 사고뿐이고, 시뮬레이터를 통해 환경을 조성하면 대다수의 조종사가 10분을 넘기지 못했다고 한다. 30분을 버틴 건 기적에 가까울 지경.

벌크헤드 수리 상태

보통의 벌크헤드는 객실 기압을 버티기 위해 매우 견고히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JL123편의 벌크헤드는 사고 7년전의 테일 스트라이크 사고로 파손되어 수리를 받은 기록이 있었다. 본래 벌크헤드의 리벳은 2중으로 고정 되어야 하지만 수리기사가 벌크헤드를 교체하고 리벳을 한줄로만 고정하는 실수를 저질러 벌크헤드가 피로도를 견디지 못하고 찢겨나간 것이다. 고객이 제기한 문제점을 확인하고 점검 했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던 결함이다. 벌크헤드 파손이 아니여도 동체변형이 일어난 기체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중화항공 611편 처럼 사고가난 부분이 피로도를 견디지 못하고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생겼을 것이다.

유사 사고[편집 | 원본 편집]

참고 문헌[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기체 후미가 지면과 충돌하는 사고
  2. 기체 후미에서 객실의 기압을 유지시키는 격벽
  3.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의미의 코드이다.
  4. 항공기에 조종사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음.이미 이쯤 가면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막장까지 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