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무

이진무(李振武, 1900년~1934년 5월 18일)는 대한민국독립운동가다. 이명은 이성상(李星霜), 이유전(李有田), 이송해(李松海), 이득성(李得成), 이숙산(李肅山) 등이며, 호는 성상(星霜)이다. 별명은 일목장군(一目將軍), 흑선풍(黑旋風)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이진무는 1900년경 평안북도 정주군 옥천면 월옥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살의 나이로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담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들로 구성된 동양시찰단 일행이 서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자주독립 열망과 일제의 침략상을 그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동양시찰단이 서울을 방문할 때 일제의 주요기관 및 시설들을 파괴하고 부역배 및 일제 관리들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광복군총영에게 이를 지시했다. 이에 광복군총영은 거사 준비에 착수했고, 이진무는 신의주 방면으로 침투하는 제5대에 배속되었다.

1920년 8월 15일, 이진무는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와 신의주역과 신의주에 있는 호텔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로 실패했고, 이어 선전군 약수참(藥水站)으로 이동해 일본 경찰과 부역배들을 저격했으며, 당시 배재학당에서 재학 중이던 김석호(金錫虎)와 협조하여 신의주 형무소를 습격하려 헀지만 계획이 들통나자 만주로 피신했다. 이후 1923년 9월 요녕성 환인현 노흑산에서 대한독립단원 이성돈(李成敦)의 권유를 받아들여 통의부에 가입해 2중대장 최석순의 부하가 되었다.

무장투쟁[편집 | 원본 편집]

1924년 음력 5월, 이진무는 최석순의 명을 받들어 대원 나정규(羅正奎), 김지섭(金志涉), 김정(金晶), 강옥성(姜玉成)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평북 강성군에 이르렀다. 이때 일본 경찰 수 명과 마주쳐 총격전을 벌여 쫓아냈고, 그 곳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했다. 동년 7월 20일, 이진무는 김정, 윤용선 등과 함께 귀성군 동면 백운동의 황원철(黃元喆) 집에서 군자금 100원을 모금했고, 8월에는 동군 천마면 탑동의 박필성으로부터 군자금 100원을 받았다. 이후 박필성을 데리고 인근 마을 대성동에 사는 박필성의 형 박경성에게 가서 군자금을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진무는 격노했다.

1922년에 독립단원 허군선(許君先) 동지가 귀성경찰서원에게 살해당한 것은 너의 형제가 밀고한 탓이다.

이후 그는 박경성, 박필성 형제를 방안에 앉힌 뒤 박경성을 밀정으로 단정해 처단했다. 그 뒤 1924년 10월 25일 오후 8시 경에 강익록(姜益祿)과 함께 평북 선천군 남면 월봉동 광산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던 허경순(許京淳)과 김세권(金世權)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았고, 동년 12월에는 강익록과 함께 남면 삼봉 경찰주재소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경찰 장용석(張容錫)으로부터 군자금과 기병총 한 자루와 탄환 등을 빼앗았고, 이어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순사를 처단하려 했지만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만주로 돌아온 이진무는 1925년 4월 남만 관전현 모전자에서 정의부에 가입했고, 3개월 후 정의부 소속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부하가 되어 활동하였으며, 중대장의 명을 받아 김광진(金光振), 홍학순(洪學淳), 오동진, 김인옥, 김학규, 이창만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했다. 그해 7월, 이진무는 철산군 차련관에 있는 양조회사와 우체국, 경찰관 주재소 등을 습격할 것을 결정했다. 김광진, 김학규, 이창만 등은 차련관 영성상회(永成商會)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금했으며, 이진무는 오동락, 김인옥, 홍학순 등과 함께 차련관 우체국 앞에서 감시하며 김광진 일행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행색이 수상한 남자가 주재소를 향해 급히 가는 걸 목격한 그는 이를 수상히 여기고 일본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먼저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고 홀로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근무하고 있던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했다. 이후 대원 전원을 이끌고 무사히 만주 근거지로 돌아온 이진무는 그해 9월 김성숙(金成淑), 정상조(鄭相祚), 허대섭(許大涉) 등과 함께 재차 국내로 들어와 귀성군 천맘면 신시동 강변에 이르렀다. 이때 신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던 일본 경찰들에게 불신 검문을 받게 되자, 일행은 흩어져 총격전을 벌여 일본 경찰에게 중상을 입히고 본대로 돌아왔다.

1926년 5월, 이진무는 김승엽(金承燁), 김성숙, 조원국(趙元國), 김인옥 등과 함께 국내로 재진입했고, 그해 6월 천마면 송수동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금했으며, 8월에 귀성군 방현면에 있는 방현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고자 방현면 하서동 남시 시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자, 그는 일행을 두 패를 나누어 자신은 김승엽과 함께 시장 북쪽 운천 강변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이 검문하러 오자 그에게 기습적으로 총탄을 발사해 중상을 입히고 다시 만주로 피신했다.

1927년 5월, 이진무는 홍학순, 김봉수, 김성숙, 김치복, 이원진, 장기천 등과 함께 다시 국내로 들어와 대원을 2대로 나누었고, 자신은 김치복, 김성숙 등과 함께 그해 7월 귀성군 조악동에 도착해 마을 뒷산에 매복하고 김치복, 김성숙에게 귀성경찰서 조악경찰관 출장소 기숙사 입구에서 일본 경찰을 처단하게 했다. 그리고 동년 8, 9월에는 정주군, 귀성군 등에 거주하는 주민들로부터 상당한 군자금을 모금한 뒤 만주로 귀환했다가 1928년 8월 김계원, 김인홍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평북 운산군에 거주하는 강모씨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했고, 11월에는 의주 청수동에서 일본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1929년 봄, 이진무는 관전현 모전자에서 국민부에 가입하여 국민부 소속의 별동대인 조선혁명군의 이윤환(李允煥) 중대장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동년 6월에 중대 부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항일무장투쟁 방법상의 의견이 맞지 않아 뜻을 같이하는 일행과 함께 국민부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중, 공산주의자인 주마골(朱馬骨)에 의해 국민부 중대장인 이윤환과 김석하가 암살당하자 이에 분노하여 1931년 2월 박인홍 등과 함께 관전현 나한구 산 모퉁이에서 주마골을 처단했다.

1931년 2월, 이진무는 고나전현 나한구에 있는 김석영의 집에서 안국형, 황세일, 최영걸, 전광도, 조국원 등과 함께 항일결사인 노농자위군(勞農自衛軍)을 조직하고 대장에 선임되었다. 동년 4월에는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人革命軍)이라 개칭한 다음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이해산·안국형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하여 동년 10월 귀성군 내양동과 동군 산서면 신덕동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애꾸눈이었지만 담력이 비상하여 일목장군(一目將軍)이라 불렸고, 일제 관료와 부역배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모습이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흑선풍(黑旋風) 이규와 같다 하여 흑선풍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악명이 높았기에, 1932년 2월 만주 안동현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심한민보>는 1932년 3월 24일자 기사에 "척안 흑선풍 대장 이진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후 신의주로 압송된 이진무는 1933년 6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34년 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34년 5월 18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35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진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