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현

李直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0년 음력 2월 12일 경상도 초계군 양동면 상대촌(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무릉)에서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낸 이규문과 강진 안씨 4남 2녀 중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합천 이씨, 자는 필서(弼瑞), 호는 시암(是庵), 세칭은 일중처사이다. 그는 옳음을 굳게 지킨다는 의지로 호를 '시암'이라 하였고, 일본은 해가 돋는 곳, 청나라는 해가 지는 곳이라 일컬으면서, 조선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곳이라고 하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일중처사'라고 불렀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유학자 가문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가학을 익혔으며, 27세 때인 1876년부터 기정진의 문인인이 되어 그로부터 옳음의 아름다움과 의의 내면을 익혔고, 주리론의 사상을 숙지했다. 그는 경서와 제자백가 뿐만 아니라 지피지기를 위하여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익혔으며, 황성신문을 탐독했고, 송병선, 노백헌, 정재규, 기우만 등 여러 여러 사림과 교류하여 학문과 예를 논하는 한편 국내외 정세를 살폈다. 또한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요순시대를 꿈꾸면서 중화문화를 존중했고, 서양 문물을 배척하였으며, 정학을 떠받치고 사설을 멀리하여 도학의 명분과 절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유림에게 창의를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다만 을미의병에는 가담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계향교에서 유림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송했으며, 초계군 유림에게 군청에 모여 창의를 논의할 것을 서약하는 통문을 돌렸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12월 2일 합천 군수, 경찰서장 등이 자택에 찾아와 은사금을 지급하는 사령식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은자는 내게는 '욕'자가 된다."며 거부했다. 1911년 1월 1일까지 1개월간 은자금을 지급 받으라고 회유 및 강권을 받았으나 끝내 물리쳤다.

그는 총독부에게 도움 주기 싫다며 세금을 불납하였다. 이에 일본인 관리가 호적과 호별세 건으로 찾아와 힐난하자, 이를 책망하는 글을 써서 보냈다. 또한 일제의 물품은 성냥, 석유까지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1914년 3월 16일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일본 사신"이라 호칭하며 "대궐 전각과 담장을 허물고, 이왕직의례전범을 만들어 왕실재산을 이리 쪼개고 저리 합치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선산과 위토까지 약탈하는데 대하여 자결하여 사죄하라"는 내용의 항의서를 보냈다. 또한 일제가 묘적법을 만들어 강제로 묘를 등록하게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파묘하겠다고 압박하자, 이를 거부하면서 "나의 이런 뜻을 즉시 너희 나라에 보고하라"고 하였다.

1918년 여름 일제가 총독부 훈령으로 만동묘 제향을 금지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에게 서한을 보내 만동묘 제향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만동묘는 명 신종, 의종 황제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인데 너희가 비용을 함부로 쓰고 인력을 소모한다는 이유로 그 제향을 폐지하려고 하나, 속셈은 이 두 황제가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 휘하의 원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너희를 물리친 데 대한 앙갚음이 아닌가. 만동묘 제향 유사 정술원, 송주헌은 무슨 죄로 구속하였는가. 그 두사람이 없더라도 반드시 제향을 올릴 것이니, 붓으로 너의 목을 치는 화를 자초하지 않도록 춘추대의에 대한 죄를 얼린 뉘우치기 바란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고, 결국 만동묘 제향이 중단되었다. 이에 그는 경상우도의 여러 유림과 1918년 8월 12일 및 8월 13일 합천군 대병면 한천제 및 초계면 무릉 여재재에서 논의한 끝에 "만동묘 제향을 막으려는 일제에 맞서 백절불굴의 의지로 감당할 적임은 시암 선생밖에 없다"는 중론이 모아지면서 만동묘 제향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에 따라 만동묘 제향을 제향을 강행헀다가 1918년 9월 8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괴산 경찰서로 끌려갔다. 괴산경찰서장이가 "만동묘 제향은 금령이 있는데 공이 어째서 유독 반항하는가?"라고 묻자, 그가 답했다.

너는 내게 원수이다. 원수는 서로 존중할 의리가 없다. 너는 나를 공이라 하지 마라. 나는 너를 너라 하겠다. 너는 비록 오랑캐이나 옛날로 말하면 한 사람 황명의 신자였다. 무슨 생각으로 감히 내가 황묘에 제향하는 예를 방해하느냐?

서장이 물었다.

명이 망한 지 오래 되었는데 어째서 기를 쓰고 명나라, 명나라 하는가?

그가 답했다.

아침에 죽고 저녁에 잊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다. 아침에는 군신이었다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일이다. 군자는 존망으로 변심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황명이 나라를 재조한 은혜는 실로 만세에 잊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황명이 아니었다면 네가 우리를 이미 오래 전에 어육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종사가 이렇게 망극한 지경이 되었다만 네가 방자하고 잔폭하게 구는 것도 황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황명을 추대하고 너를 원수라 하는 것이 어찌 옛날보다 두 배, 다섯 배는 되지 않겠느냐?

서장은 한참 동안 무안히 서 있다가 다시 물었다.

공은 보안법을 아는가?
너의 법을 내가 어찌 알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선동해서 민심을 소란스럽게 하면 최익현처럼 먼 섬에 안치시키는 것이 이것이다. 공도 필시 이 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직현이 답했다.

내가 지키는 것은 의리이다. 의리가 있는 곳이라면 머리를 자르고 가슴을 뚫어도 달게 받겠다. 하물며 먼 섬이랴? 그러나 오늘 일로 말하자면 나는 모르겠다만 유민으로서 황묘를 봉향하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냐? 아니면, 오랑캐로서 황묘를 범하는 것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냐? 엄숙히 모여 향사를 받드는 것이 소란스런 일이냐? 아니면, 학대하고 구박하는 것이 소란스런 일이냐?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너다. 소란을 일으킨 것도 너다. 너는 보안법이 있으니 스스로 죽을 죄를 범한 것이다. 또, 네가 제향을 방해하는 것은 무슨 생각이냐?
쓸데없는 일에 재산을 축내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소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제사를 쓸데없다고 하는 것은 너희 오랑캐의 법도이다. 어째서 우리 소중화 예의지방을 오랑캐 법도로 똑같이 보는가? 제사는 예의 큰 절도이고 예는 소란을 제어하는 도구이니 어찌 소란을 일으킬 것이 있겠느냐? 너의 말이 틀렸다. 또, 나는 나의 의리를 행하고 본래 너의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너는 속히 전죄를 회개하고 다시 이렇게 난동을 부리지 말아라.

이후 경찰서에서 훈방 조치된 그는 제향을 마친 뒤 각도 사림에게 "일제가 만동묘 제향을 폐지하려는 것은 임진왜란 때 명 신종, 의종 황제가 조선에 원군을 보내 물리친데 대한 앙갚음이므로 반드시 춘추 제향을 거르지 말도록 힘써 달라"는 글을 보냈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여한 족질 이원택이 3.1 운동에 참여한 뒤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이직현은 4월 6일 자신의 집을 찾아온 변상태로부터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전해듣고 이를 찬성한 뒤, 조카 이완화와 족질 이원택으로 하여금 변영태의 계획에 동참하도록 종용했다. 이원화는 4월 7일부터 구재범, 권무용, 김덕명, 성만영, 전영우 등과 서로 연락하여 임무를 분담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동원 계획을 수립한 뒤,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들은 4월 20일 초계 장날 장꾼으로 가장하여 독립선언서, 태극기를 숨기고 장꾼들 틈에 끼어 장터로 잠입한 뒤 오후 1시경 장터에 약 4천 명의 군중이 모이자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켰다.

1919년 3월 말, 전협, 최익환 등이 대동단을 결성하자, 이직현은 이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동단에서 발표한 선언서에 유림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 선언서의 내용은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聖衷)을 장(仗)하여 우리 국가의 독립됨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自由民) 됨을 천하만국에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동단은 일제의 검거 선풍으로 해체되었으나, 그는 이에 연루되지 않았다.

천도교에서 발행한 잡지 <개벽>은 1923년 4월 1일 제34호에서 이직현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초계의 이직현씨라 하는 학자는 참 완고 중 철저한 완고다. 지금까지 외국물자는 성냥, 석유까지도 절대 사용치 안이하고 총독은 왜사라 하며 세금도 절대 불납함으로 구장이 부득이 대신 낸다. 완고라 할지라도 이러한 완고는 참 철저한 완고다. 시속의 껍덕이 문명자의 조변외개와는 천지차이다.

이는 유학자들에게 부정적이었던 천도교 측 인사들도 이직현이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인물이라는 인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는 상황에 따라 변절하는 당시의 지식인을 꾸짖으면서 이직현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1928년 4월 12일 향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세. 묘는 초계면 무릉 청룡 끈 유좌에 조성되었고, 동강 김녕한이 묘갈명을 짓고 추연 권용현이 묘표를 치었다. 권용현은 묘표에 "춘추의 대의가 선생이 존재함으로써 더욱 밝혀졌으니, 선생은 참으로 성인의 무리라 할 만하다. 옛 현인이 말하기를 '절의는 있으나 학문이 없으면 과격하고, 학문은 있으나 절의가 없으면 거짓 학문이라 하였는데, 선생의 행적으로 이를 증험할 수 있다."라고 기술했다. 이직현은 생전에 시암집 11책 21권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이직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