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건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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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乾. 호는 동산(東山), 이명은 이종순(李鍾淳), 이병천(李柄天).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7년 10월 17일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염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만주로 망명해 유하현 삼원보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1919년 남만주에서 결성된 한족회(韓族會)에 참여, 재만동포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8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여, 산업위원과 실업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3~24년에는 군무국장(軍務局長)과 선전부장(宣傳部長)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7월 12일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꾀하기 위해 개최된 전만통일회의주비회에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대한통의부 대표로 참여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 학우회(學友會), 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 의성단(義成團), 변륜자치회(卞倫自治會), 고본계(固本契),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등 10개 단체와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했다.

1925년 1월, 이종건은 정의부 중앙집행위원과 생계위원장에 선임된 동시에 무력사령부 부사령이 되었으며, 동년 12월 23일에 선전위원, 선전위원장, 산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1928년 5월 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 외 18개 단체 대표 39명이 모여 민족유일당촉성 문제를 협의할 때 정의부 대표로서 참여했지만, 회의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통합 단체에 가입하고 모든 단체를 해산하자는 '전민족유일당조직 촉성회파'와 기존 단체를 유지하고 이를 통합하여 새 조직을 만들자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로 분열되었다.

이때 김종건은 지청천, 김원식, 김상덕 등과 함께 전민족유일당조직 총성회파를 지지했고, 1928년 8월에 개최된 정의부 제5회정기중앙의회에서 전민족유일당협의회 방향으로 의견을 정리한 정의부의 결정에 반발해 정의부를 탈퇴하고 재만유일당책진회(在滿唯一黨策進會)를 조직하였다. 그 후 1929년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보안부위원장(保安部委員長)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17일 신빈현에서 열린 조선혁명당 간부회의에 참석한 그는 일본 영사관 순사대에게 급습받았고, 1월 19일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당 군사령 김관웅(金寬雄) 등 간부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32년 11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출소 후에는 고향에서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냈다.

해방 후 1946년 2월 1일에 개최된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에서 유동열, 김원봉, 이규채(李圭彩), 김희남(金熙南), 김산, 최윤동 등과 함께 국방위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했으며,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입헌기념식에 참석했고, 1947년 6월 24일에 서재필 귀국 환영회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좌우합작을 주창하던 민주주의 독립전선의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1947년 4월 11일, 이종건은 민주주의독립전선 동료들과 함께 미군정 최고 책임자인 하지 중장과 회담을 벌였다. 그러나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낙심하여 고향으로 내려갔고 1958년 5월 20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종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