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숙 (1898년)

李貞淑.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생이며, 황해도 금천군 호현면 백양리 출신이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이명옥과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7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했을 때, 이명옥은 김구의 지시를 받아 난지과 상하이 일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8월 3일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13년형을 받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정숙은 자녀를 데리고 상하이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김구가 난징으로 오라고 통보했으나 본국 감옥에 있는 남편과 두 달에 한 번씩 왕복하는 서신을 보내는데, 그 성심으로 인해 차마 상하이를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맏아들 이효상이 상하이 인성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군사훈련을 받으러 난징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정숙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효상아. 난징에 가면 윤규운, 김백연 선생님들이 좋은 길로 잘 인도하여 주실 거다. 아버지는 얼마 아니 되면 감옥에서 나오시겠지.

이후 난징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이효상은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40년 상하이에서 동지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이정숙은 둘째 아들과 딸들과 함께 이효상을 도왔다. 백범일지독립신문은 이후의 상황을 판이하게 서술한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정숙은 아들과 비밀히 왕래하다 1941년경 일본 군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아들이 있는 곳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면 독립신문 1944년 8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정숙은 이효상이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과 분함이 가슴을 메어 졸도하여 선혈을 토한 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맏아들 이효상이 체포될 무렵에 사망한 것만은 분명하다.

일제는 이정숙의 시신을 화장하여 나무상자에 넣고, 그녀의 어린 3남매와 함께 조선으로 보냈다. 이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던 이효상과 어린 3남매가 한국으로 향하는 기선에서 만났다. 이효상은 3남매로부터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감옥으로 들어갔고, 1942년경 옥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이정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