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1899년)

李鎰永. 이명은 이붕해(李鵬海)[1], 이봉기(李鳳基). 자는 공익(公益), 호는 송강(松崗).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5월 15일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황산리에서 절충장군, 육군참령, 고성지방 대대장을 역임한 덕수 이씨 이민승과 해풍 김씨 김태항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으로, 고조는 가산대부로 전라병사를 지낸 이은빈, 증조는 계자로 들어온 이익희, 조부는 통정대부로 김해도호부사를 역임한 이규린이다. 그는 수성 최씨 최상일의 딸 최문환과 결혼하여 이창혁, 이종원 등 2남을 두었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던 그는 1919년 천안에서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에게 체포된 뒤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7기생으로 졸업하였고, 한국독립연성대 또는 한국독립교성대에서 6개월간 훈련받고 청산리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일제가 자행한 간도 참변을 피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자유시 참변을 목도한 뒤 만주로 귀환했다.

그 후 중국 본토로 들어가 중국 낙양군광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로 돌아갔고, 1923년 5월 연길에서 김규식, 고평, 이범석 등이 고려혁명군을 편성할 때 참여했다. 동북만주 밀산, 호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군과 맞섰으며, 밀산 공략에 큰 공을 세웠다. 1925년 김좌진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민부에 참여해 경비대장에 선임되었으며,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위자연맹 17인 위원회 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무정부주의자연맹과 신민부가 합작하여 영안현에서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할 때 군사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부인 최문환도 부녀부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김좌진이 피살된 뒤 그가 중심이 되어 임시치안대를 조직하고, 김좌진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김봉환을 처단했다. 만주사변 이후 1932년 한독총연합회 주하지방 집행위원장이 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며 광복 때까지 한인들의 배일사상 고취와 생활 선도에 힘을 기울였다.

8.15 광복 후, 한국 광복군김학규, 최용덕과 함께 중국군 및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한인 장병을 흡수하여 훈련사업을 추진했으며, 오광선과 함께 광복군 국내지대를 별도로 설치하고 참모장에 취임했다. 귀국 후 1946년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 독립당의 중앙감찰위원회 사찰부장,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하여 1949년 제주도병사구사령관을 역임하였고, 방위군 옹진지단 고문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경기 옹진지구에서 북한군과 맞서다 실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일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15년 국립대전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김기승, 천경석, <이순신 후손의 항일독립운동>, 이순신연구논총, 2011년.[1]

각주

  1. 국가보훈처로부터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