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준

李義俊. 이명은 이병준(李秉俊), 한웅권(韓雄權), 한유권(韓有權).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이의준 심문조서>에 따르면, 이의준은 평안북도 위원군 밀산면 송진동 출신이라고 한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93년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23년 1월 무렵 평안북도 위원군과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던 집안현으로 망명한 뒤 유수림자, 두도구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 제1중대에 가담해 제2소대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의준은 제2소대장으로 선임된 뒤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해 1923년 6월 6일 김정욱(金貞旭) 등 4명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여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평북 강계군 어포면 풍룡동 골짜기에서 평북경찰부 수색대와 맞닥뜨려 교전한 뒤 만주로 철수했기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6월 12일에 다시 송선호 등 3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평북 위원군 봉회면 노동령 부근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강계군 고산령 우편국에서 위원 우편국으로 가고 있던 우편 배달부를 공격해 각종 서류와 소포 등 우편물을 노획하고 1천 5백원의 현금을 획득했다.

1923년 7월 초순, 이의준은 다시 전용규(田龍奎)[1] 등 3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평북 위원군 대덕면에 들어가 장기섭(張基涉)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한 뒤 귀환했으며, 8월 20일에 재차 국내로 잠입해 이화주(李化周) 등 일곱 명의 소대원과 함께 평북 강계군 풍천동에 들어가 경찰관 임시파출소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 1명을 사살하고 파출소와 부근의 일본인 민가에 불을 질렀다.

이무렵, 통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해 자신들을 광복군 사령부를 계승한 군정부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인받은 뒤 1924년 초반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했다. 참의부는 집안현 화전자에 본부를 두고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꾀했다. 이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1924년 6월 제국회의 개최를 앞두고 식민지 통치체제의 안정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참의부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의준은 참의부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의 명령을 받고 제3소대장 장창헌과 김창균(金昌均), 현성희, 이명근(李明根), 김여하(金麗河), 전창극(田昌極)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후 1924년 5월 19일 웅비호(雄飛號)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며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일행을 평북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의 대안에서 급습하고자 했다. 결사대는 마시탄의 중국측 대안인 집안현 사랑곡 팔합목에 잠복하고 있다 사이토 일행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호위선 비조환(飛鳥丸)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이 대응사격을 가하면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사이토 일행을 태운 웅비호가 도주하면서 사이토 총독 암살은 실패했다.

이후 일제의 국경 지방에 대한 경비가 강화됐지만, 이의준은 같은해 7월 16일 평북 강계군 곡하면 쌍부동으로 진입한 뒤 신의주와 강계를 잇는 전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다섯 개를 잘라 넘어뜨리고 강계군 어운면에서도 전신주 네개를 넘어뜨렸다. 이후 신용섭 등 여섯 명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강계군 공서면 두흥동의 계인계(桂仁桂)와 인근 염진희(廉珍熙)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했고, 며칠 후 강계군 시중면 시천동의 김찬원(金燦元)의 집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받아내는 등 지속적인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1925년 6월 19일, 이의준은 24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강계군 창곡산에서 강계경찰서의 수색대를 습격해 몇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인 뒤 후퇴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 군벌과 삼시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한 뒤 만주 군벌이 한인 독립투사들을 일제에게 넘겨주면서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한동안 몸을 숨겼지만 결국 1926년 말 만주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인계되었다.

그후 평북 만포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1927년 10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17일자 기사에 따르면, 재판장이 그를 부르자 "언권의 자유를 주지 않으면 공술을 거절하겠다"고 강경히 주장했고, 방청석은 그가 삼국지에서 본 장비와 같다고 속삭였다고 한다.

얼마 후, 이의준은 평양복심법원으로 인계되었고 1928년 11월 6일 사형 판결을 받은 뒤 1929년 1월 25일 평양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후손은 현재 파악되지 않았으며 유해가 매장된 곳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5년 8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비롯해 후손이 없는 독립유공자들을 위한 무후 선열제단을 준공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의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용규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