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시칠리아 정복

이슬람의 시칠리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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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장인 시칠리아 섬의 지형도
군사 충돌 정보
이슬람 제국정복 전쟁비잔틴-아랍 전쟁
날짜 827년 6월부터 902년까지
위치 시칠리아섬
결과 이슬람 세력의 시칠리아 정복 완료
남이탈리아가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노출됨.
교전단체
비잔티움 제국 아글라브 조[1]
발라타
귀스티니아노 파르티시파지오
테오도투스
알렉시오스 모실레
콘스탄티노스 오 코우초미티스
에우페미우스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
무함마드 이븐 아불 자와리
아스바그 이븐 와킬
이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아달라
알 파들 이븐 야쿱
아불 아글라브 이븐 이브라힘
아불 아글라브 알 압바스 이븐 알 파들
카파야 이븐 수퍈
수와다 이븐 카파야
아불 압바스 이븐 압달라 2세
이브라힘 2세

이슬람의 시칠리아 침공은 827년 7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 섬을 본격적으로 침공했을 때부터 902년 시칠리아 섬 내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요새인 타우로메니온(현 타우로미나)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진행되었다. 몇몇 요새들은 계속 비잔티움 제국의 손에 있었지만 시칠리아 섬은 사실상 이슬람 세력의 손 안에 놓이게 된다.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시칠리아는 크게 번영하였고, 스스로를 이프리키야[2]의 토후국으로부터 때어내어 반(半)독립국인 시칠리아 에미르국을 성립한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1060년대 노르만족이 시칠리아를 침공해 올때까지 존속되며, 심지어 노르만 치하에서도 번창해 노르만-아랍-비잔티움 문화 양식을 창조해 내기도 하였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고대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크게 번영했던 시칠리아는 5세기 부터 시작된 반달 족들의 침공으로 크게 타격을 입었다. 535년 비잔티움 제국이 시칠리아 섬을 장악하였고, 고트 전쟁(535–554) 때 동고트족에 의해 침공을 받지만 이후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된다. 바다로 둘러 쌓인 덕에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의 롬바르드 족의 침공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부유한 영토로 남아 있었지만, 이는 사라센 해적들의 침공이 시칠리아 섬으로 집중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아일랜드 출신인 존 바그넬 부리는 이에 대해서

풍요로운 땅이자 가치있는 재산 그 자체로 시칠리아는 지중해를 양분하는 위치에 있기에 동방의 상업적 혹은 정치적으로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이슬람 세력에게는 막대한 중요도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 아프리카에서 야망으로 가득찬 지도자가 이탈리아로 혹은 아드리아해로 다가 올려면 꼭 거쳐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라고 할 정도로 이슬람 세력에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다.

지속적으로 시칠리아 섬은 북아프리카 해적들의 침공 목표가 되었다. 최초의 침략은 652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이슬람 세력이 해적을 기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였을 정도로 시칠리아 섬은 해적질로부터 시달려야 했다.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향해 계속해서 진격해 오자 시칠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아졌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스 2세는 5여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시라쿠사에서 거주한 적도 있었다. 8세기 초반에는 이슬람 해적들의 공격이 집중되기는 하나 아직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지방으로 확장하고 있던 시기라 극심하지는 않았다. 이프리키야의 총독인 압드 알 라만 알 피리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752년에 샤르데냐섬과 함께 실제로 공격하였으나 베르베르 족들의 반란으로 무산되었다.

799년 아글라브 조의 창시자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내 현재의 튀니지를 중심으로 하는 이프리키야의 에미르[3]가 되었다. 805년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시칠리아 총독과 10년 간의 조약을 체결하고 8년 뒤에 그의 후계자 압달라 1세에 의해 갱신된다. 이 시기에 아글라브 조는 모로코 지방의 아드리사 왕조와 경쟁하고 있었고, 그들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신에 아글라브 조는 시칠리아 섬에 상인을 보내 교역하는 등 평화적인 관계를 이어 갔다.

에우페미우스의 반란[편집 | 원본 편집]

지명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삽입한 시칠리아의 백지도, 단, 본문에는 묘사되었으나 이 지도에는 없는 지명도 있음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침공하게된 기폭제는 바로 시칠리아 섬의 함대 지휘관이었던 에우페미우스의 반란이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에우페미우스가 한 수녀랑 강제로 결혼할려고 했는데, 그녀의 오빠가 비잔티움 제국의 유력자라서 형벌로 코를 베이게 되고 이 때 에우페미우스가 북아프리카 해안지방을 공격하고 돌아와 이를 알게 되자 냅다 시라쿠사를 침공하였다고 한다. 그 때 당시 총독은 다른 도시에 가 있었고, 에우페미우스는 간신히 시칠리아 섬의 군권을 장악하여 총독이 있었던 도시로 가 그를 잡아 처형하고 이후 자기 자신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임을 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비잔틴사 전문가인 알렉산데르 바실리에브에 따르면 결혼과 관련된 내용은 거짓이고 그저 에우페미우스가 비잔티움 제국이 슬라브 족의 반란과 이슬람의 침공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았다.

어찌됐건 그가 황제를 선언하자 그와 가장 가까웠고, 가장 강력했던 동맹인 발라타와 그의 사촌 미카엘[4]은 그를 강하게 비난하였고, 이후 이 둘은 에우페미우스가 있었던 시라쿠사를 향헤 진군하여 도시를 점령한다.

시칠리아 섬에서 쫓겨난 에우페미우스는 아글라브 조에게 사자를 보내 매년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시칠리아 섬을 탈환할 군사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아글라브 조에게 있어서 이는 넝쿨째 호박이 굴러온 격이었는데 이를 통해서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던 아랍계와 베르베르 족간의 분쟁, 귀족 세력인 준드와 왕 사이의 알력 투쟁, 세금 체제와 사치로 인해 말리키파 율법학자로부터 받아온 비이슬람적이라는 모독을 시칠리아의 정복을 통해 한 방에 날려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에우페미우스가 도착했을 때에는 3년을 끌었던 만수르 알 툰부디의 반란을 막 진압했던 참이었다. 기회도 이런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아글라브 조의 궁정은 군대를 보내 줄까 말까를 두고 양분되었지만, 카이루안에 있던 이슬람 성직자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가 군대를 보내주는 쪽의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보내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실제르 알 푸라트는 카이루안의 모스크를 버리고 군대를 따라갈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육군은 총 1만명의 보병과 7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해군은 에우페미우스가 가져온 선박을 포함하여 70~100척에 달했다고 한다.

정복 초기~팔레르모 함락[편집 | 원본 편집]

827~828, 이슬람군의 상륙과 시라쿠사 공성전[편집 | 원본 편집]

827년 6월 14일 수사 만을 출발한 이슬람군은 3일 뒤 시칠리아 섬 남서쪽 마자라에 도착해 상륙한다. 거기서 에우페미우스파 군대와 합류하였지만 이후 에우페미우스-아글라브 동맹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슬람군이 에우페미우스군을 비잔티움 충성파로 오인하여 공격한 것이다. 에우페미우스는 헬멧에 나뭇가지를 달아 비잔티움 군대와 본인들을 구별시킬려고 하였으나 알 푸라트는 그들을 배재하고 원정을 진행하겠다고 밝힌다. 이후 동맹군과 발라타의 비잔티움 제국군이 마자라 남동쪽에서 충돌하였고, 패배한 발라타는 엔나를 거쳐 이탈리아 본토로 후퇴한다. 거기서 발라타는 군대를 모집할려고 했으나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만다.

마자라를 떠난 알 푸라트는 해안을 따라 시라쿠사를 향해 접근한다. 그러나 칼라트 알 쿠라트(현 팔라초 아크레이데 인근)에서 도시를 공격하지 않는 대신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시라쿠사의 사신과 만나게 된다. 목적은 시라쿠사가 공성 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지만, 사신에게 낚인건지, 아니면 군대를 쉬게 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알 푸라트는 진군을 멈췄다. 한편 에우페미우스는 자신이 아글라브와 동맹한 것을 후회하고 비잔티움 제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군대를 보내줄 것을 촉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진군하기 시작한 이슬람군은 시라쿠사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벌인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자기네 앞마당인 크레타 섬으로부터 오는 이슬람 세력을 쫓아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직접적인 원군을 보내주지는 못하였고, 그 때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의 속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인 귀스티니아노 파르티시파치오가 지원을 보내주기는 하나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성 측인 이슬람군은 보급 부족과 전염병에 시달려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알 푸라트마저 죽고 말았다. 아불 자와리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은 배를 타고 후퇴하고자 하였으나 비잔티움 해군의 방해로 실패한다. 후퇴마저 실패하자 이슬람군은 배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미네오로 후퇴하여 점령한다.

828~829, 제 1차 엔나 공성전과 비잔티움의 반격[편집 | 원본 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과 연락을 취하던 에우페미우스는 단순한 이슬람군의 길잡이 역할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이슬람군이 패배에 휘청이고, 군 지휘자도 의지를 잃게 되자 에우페미우스에게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가 된 것이다. 미네오를 함락한 뒤 이슬람군은 2개로 쪼개져 진군했는데, 하나는 남쪽의 아그리젠토로 갔고, 나머지 하나는 에우페미우스를 따라 시칠리아 중앙의 엔나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엔나 수비군과 협상하기 위해 조그만 경비대만 이끌고 도시의 대표를 만났다가 그들에 의해 죽고 만다. 이후 에우페미우스의 세력들이 계속해서 이슬람군을 따라 갔는지, 아니면 그냥 해산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829년 봄에 비잔틴 쪽은 시칠리아를 향해 구원투수를 내보낸다. 과거 시칠리아에서 군복무를 했던 테오도투스가 이끄는 지원함대를 파견한 것이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그의 군대는 이슬람군이 에워 싸고 있던 엔나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의 군대는 엔나 도착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엔나의 주둔군을 자기네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테오도투스는 상황을 간신히 뒤집는다. 이슬람군이 약탈을 하던 도중에 본대를 습격하여 1000명이 넘는 전사를 죽이고 나머지를 요새로 몰아 포위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슬람군은 탈출을 시도하나 테오도투스군에게 그 움직임을 예측당해 추가적인 피해를 입고 간신히 미네오로 후퇴한다. 아그리젠토를 공격하던 다른 부대도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마자라로 후퇴한다. 829년 가을이 되자 시칠리아 내에서 이슬람 세력은 거의 일소되고 만다.

830, 우마이야 왕조의 지원과 테오도투스의 사망[편집 | 원본 편집]

830년 여름, 아글라브군이 미네오로 후퇴해 테오도투스가 이끄는 비잔틴군과 공성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에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코르도바 에미르국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낸다. 아사드 왕조와 라이벌인 코르도바의 에미르가 아사드 왕조파였던 아글라브 왕조를 지원해 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디. 시칠리아에 상륙한 코르도바군이 미네오의 군사랑 접촉하면서 상황은 비잔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테오도투스는 미네오의 포위를 풀고 엔나로 후퇴한다.

미네오에서 만난 두 군대는 칼로아니아를 공격하나 이후에 또 군대에 역병이 돌고 만다. 칼로아니아를 간신히 함락하지만 역병으로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지도자마저 죽어버린 상태에서 이슬람군은 미네오로 후퇴한다. 안달루시아군이 섬 여기저기에 퍼져있는 동안 테오도투스는 이슬람군을 공격하나 그 도중에 죽고 만다.

831, 팔레르모 함락[편집 | 원본 편집]

한편 마자라에 있던 이슬람군은 시칠리아 섬을 종단하여 팔레르모에 도착해 공성전을 벌인다. 831년 9월이 되자 팔레르모의 비잔틴군 지휘관 시메온은 도시의 원로들과 군대를 생명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섬을 포기한다. 팔레르모는 공성전 도중 큰 피해를 입었고, 도시에 살던 시민 대부분이 크게 떨어져서 아랍인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는 인구가 70000명에서 8000명까지 떨어졌다고 저술하였을 정도였다. 팔레르모의 주교였던 루카는 목숨만은 건진 채 테오필로스 황제에게 돌아가 이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팔레르모의 함락은 이 전쟁에서 큰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팔레르모의 함락은 이슬람군의 군사 거점이 추가된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시칠리아섬 서부의 통치 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도시[5]를 장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832년 4월, 아글라브 왕조에서는 팔레르모에 총독을 보내 시칠리아 섬을 관리하게 한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편집 | 원본 편집]

832~836, 이슬람 세력의 연이은 승리[편집 | 원본 편집]

팔레르모 함락 이후 2년 동안 이슬람군은 공격을 하지 않고 점령지의 행정을 확보하는데 열중한다. 이에 대해 시칠리아에 있는 비잔티움 제국군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비잔티움군은 너무 약했고, 본국으로부터 오는 지원 또한 전무했다. 압바스 왕조의 알 마으문 칼리파의 공격으로 인해 그가 급사하여 이슬람군이 후퇴하는 833년 8월까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위협당하는 수준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의 공격은 시칠리아 섬 중앙의 엔나 요새로 집중된다. 834년 초 이슬람군의 지휘관 아부 피르는 야전에서 엔나 수비군을 무찌른 뒤 엔나를 공격한다. 봄에 수비군은 이슬람군을 기습공격하나 실패하고 요새로 후퇴한다. 835년에는 아부 피르는 시칠리아의 비잔틴군 지휘관과 전투를 치러 승리하고 총독의 딸과 아내를 포로로 취하는 큰 성과를 거둔다. 승리 이후 이슬람군은 시칠리아 섬 동쪽을 향해 진격해서 타우로메니온을 공격한다. 그러나 아부 피르가 비잔틴 출신의 한 인물에게 살해당하면서 공격은 멈추게 된다.

아부 피르를 대신해서 온 새로운 총독은 알 파들 이븐 야쿱으로 원정에 큰 열의를 보인 자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시칠리아 중부와 해안 지방을 공격하였다. 비잔틴의 스트라게오스[6]가 그를 막기 위해 나섰으나 그가 이끄는 이슬람군은 숲으로 피한다. 이렇게 되자 비잔틴군은 그들이 숲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기다리다 지친 비잔틴군이 군대를 물리자 이슬람군은 이를 기습하여 비잔틴군의 지휘관과 다수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고 동물, 병기를 전리품으로 휙득한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총독 이븐 야쿱은 아글라브 왕조의 에미르의 사촌 아불 아글라브 이브라힘 이븐 압달라 이븐 알 아글라브로 대체된다. 같은 시기에 비잔틴군 또한 본토로부터 온 원군으로 인해 전력이 강화되었다. 아불 아글라브는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가던 중 비잔틴 제국의 함대를 만나 크게 패배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는 길에 폭풍우를 맞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불 아글라브는 팔레르모에 상륙한다. 그는 자신이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로 해안 도시인 판테렐리아와 섬 중앙의 에트나 화산 동면을 약탈하고 기독교도 포로의 목을 뱄다고 한다.

836년 아불 아글라브는 본격적인 공격에 나선다. 이슬람군은 카스텔루치오 요새를 공격해 함락시키나 비잔티움군의 반격에 물러났고, 이븐 야쿱이 이끄는 이슬람 함대는 시칠리아 섬 북쪽의 리파리 제도를 공격하고 인근의 틴다리스 요새를 장악한다. 동시에 이슬람 기병대는 에트나 화산 주변부를 다시 약탈하는데, 기독교도 포로 가격이 급락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837~841, 양측의 선수교체와 이슬람군의 이탈리아 본토 공격[편집 | 원본 편집]

837년 압드 알 살람 이븐 압들 알 와하브는 엔나를 공격하지만 되려 자기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가 잡히자 이슬람군은 엔나 주변의 포위를 강화하고 엔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해 겨울에 한 이슬람군이 엔나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 중 하나가 제대로 경비되어있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엔나 시가지는 이슬람군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비잔틴군은 엔나 요새를 성공적으로 지켰고, 이후 막대한 돈을 줌으로써 이슬람군은 엔나에서 후퇴한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테오필로스 황제는 시칠리아를 구원하기 위한 군대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렇게 모인 군대는 그의 사위인 알렉시오스 무셀레에게 맡겨졌고, 이렇게 모인 군대는 838년 봄 시칠리아 섬에 도착한다. 이슬람군에게 고립된 체팔루를 포위에서 풀어나게 하였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가 떠나자 그의 정적들은 그가 이슬람군과 내통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모함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그와 결혼한 테오필로스 황제의 딸 마리아가 죽으면서 테오필로스와의 연결고리도 끊어지게 된다. 마리아가 죽은 839년에 황제는 무셀레를 수도로 호출하고 군대의 지휘는 시칠리아의 대주교 테오도루스 크리티노스에게 맡긴다.

838년 6월 11일 아글라브 왕조의 에미르 지야다트 알라가 죽고 그의 동생인 아부 이칼 이븐 알 아글라브가 차기 에미르로 즉위한다. 새로 즉위한 에미르는 시칠리아에 원군을 보냈고 이것에 힘입어 이슬람군은 무셀레가 탈환한 비잔틴 제국령의 요새들을 재점령한다. 동시에 이탈리아 본토도 공격하기 시작한다. 나폴리 공작에 의해 포위된 베네벤토 공작 시카르도는 이슬람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되려 이슬람군은 나폴리의 편을 들어 베네벤토 공작이 다스리던 브린디시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이후 베네벤토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타렌툼(840년)과 바리(847)를 차례대로 점령해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해안 지방을 약탈하는 이슬람 해적들의 기지로 사용된다.

842~859, 이슬람 세력의 끝없는 확장과 엔나의 함락[편집 | 원본 편집]

엔나의 전경

나폴리 공국의 지원 하에 이슬람군은 메시나를 함락하는데 성공한다. 연이어 메디카 요새도 이슬람군에 의해 함락당한다. 압바스 왕조와 평화조약을 맺어 동쪽 국경을 안정시킨 비잔틴 제국은 시칠리아로 원군을 보내나 이 원군은 부테라에서 이슬람군을 만나 만명의 군사가 사망하는 참패를 겪고 만다. 이 전투 이후 비잔틴군의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846년과 848년, 각각 레토니와 라구사가 함락되고, 팔레르모를 공격한 비잔틴 함대는 폭풍을 만다 7~10척의 배를 잃고 만다.

851년 시칠리아의 총독 아불 아글라브 이븐 아브라힘이 사망하고 현지 장군들은 아불 아글라브 알 압바스 이븐 파들을 새로운 총독으로 선출한다. 아프리카 본토에서 승인을 맡기도 전에 군사 작전을 실시해 칼타부투로를 함락하고 이후 도시 중앙의 엔나를 향해 진격한다. 852~853년에는 발 디 노토를 습격해 황폐화시키고 부테라 요새에서 5개월 정도 공성전을 펼쳐 점령한다. 이후 4개월 동안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종횡으로 습격하고 다녔다고 한다. 857년에는 케팔루가 함락당하고, 이후 가글리아노를 공격하나 함락에는 실패한다. 858년 여름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아풀리아[7]를 향해 두 차례의 해상 습격을 진행해 한 번의 승리와 한 번에 패배를 거둔다.

859년 1월에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엔나는 한 비잔틴 죄수의 도움으로 이슬람군의 손에 떨어지고 만다. 이는 팔레르모 함락과 더불어서 시칠리아 전역의 거대한 분기점 중 하나라 언급된다. 엔나의 함락 없이는 시칠리아 동쪽 연안지방의 공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비잔틴 궁정은 콘스탄티누스 쿤토미테스에게 기록에 따르면 300척에 이르는 대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를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859년 가을, 비잔틴 함대는 이슬람 함대를 조우해 패배하고 함대의 1/3를 잃지만 시칠리아 섬에는 상륙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슬람령 시칠리아는 거대한 반란을 일으켜 호응한다. 반란을 집안한 알 압바스는 케팔루 인근에서 쿤토미테스랑 조우하여 전투를 치루어서 큰 승리를 거둔다. 이로 인해 이슬람군의 엔나 지배는 확고해 진다.

몰타와 시라쿠사의 함락[편집 | 원본 편집]

861~869, 카파야 이븐 수퍈[편집 | 원본 편집]

861년 알 압바스가 전투 중 사망하고 후임으로 그의 삼촌인 아마드 이븐 야쿱이 선출된다. 첫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후 수 개의 비잔틴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그는 그가 선출된 것을 알지 못했던 아글라브 왕조에 의해 카파야 이븐 수퍈으로 대체된다.

863년 카파야는 그의 아들로 하여금 시칠리아 해안부를 약탈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비잔틴과 싸우다 패배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864년에는 노토와 시치클리가 함락된다. 865년에는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전에 엔나로 이동하여 비잔틴군을 공격한다.[8] 그러나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기습에 휘말려 패배하고 1000명의 군사를 잃는다.

865년 시라쿠사를 향해 다시 원정을 떠난 카파야는 시라쿠사에서 북쪽의 타우로메니온을 향해 진군한다. 같은 해에 다른 이슬람 부대는 비잔틴에게 빼앗긴 노토와 라구사를 다시 점령한다. 카파야는 이후 몇몇 요새와 마을들을 점령하나 병으로 인해 팔레르모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867년 여름, 병이 다 나은 카파야는 시라쿠사와 카타니아를 향해 재진군한다.

867년 9월, 바실리우스 1세는 비잔틴의 황제인 미카엘 3세를 살해하고 본인이 황제로 즉위한다. 바실리우스 1세는 미카엘 3세와 달리 열정적인 황제였다. 동쪽 국경이 안정되자 황제는 눈을 서쪽으로 돌린다. 니케타스 오리파스를 라구사로 보내 이슬람군의 포위를 푼 뒤 크로아티아 지방으로 가서 제국의 행정을 확립시킨 후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바리로 가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결혼동맹을 맺고 같이 바리를 공격하게 만든다. 이후 시칠리아로 새로운 함대를 보내지만 원군은 카파자와 싸우다 패배하고, 전투 후 팔레르모로 돌아온 카파자는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이탈리아 본토를 습격하게 한다.

869년 2월 경, 카파자는 타우로메니온을 습격해서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도시의 성문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본대의 도착이 늦어져 본인이 포로로 잡힐 것을 우려한 카파자는 도시를 포기한다. 한 달 뒤 카파자는 무함마드에게 시라쿠사를 공격하게 한 뒤 본인은 에트나 화산 인근의 한 마을을 공격하나 큰 인명피해를 입고 무함마드가 있는 시라쿠사로 이동한다. 거기서 수차례 공성전을 벌이다가 팔레르모로 후퇴하던 중 카파자는 한 베르베르 족 전사에게 살해당한다. 동기는 이슬람 세력 내의 분쟁이란 말도 있고, 비잔틴 제국에게 돈을 받았가는 말도 있는 등 불분명하다.

870~878, 몰타와 시라쿠사의 함락[편집 | 원본 편집]

이후 그의 자리는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승계한다. 그는 총독이 되기 전과는 달리 전장에서 싸우기보다는 행정 등 앉아서 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의 통치는 871년 5월 그가 궁중의 환관에게 암살당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중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그건 몰타를 정복한 것이다. 시칠리아 주변의 작은 섬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비잔틴의 손에 남아있던 몰타 섬은 아흐마드 이븐 우마르 이븐 우마이달라 이븐 알 아글라브 알 하사시가 이끄는 부대에 함락당하고 만다. 지속적인 대비로 초회의 공격은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이슬람군은 1년 뒤 870년 무함마드가 보내준 지원에 힘입어 몰타 섬을 점령한다. 이 몰타 섬의 점령은 레조 칼라브리아 점령과 더불어서 수비측에겐 동쪽으로부터 오는 지원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망해가는 전황에 제대로 쐐기를 박은 것이다.

872년부터 877년까지 아글라브 왕조의 약화와 더불어 시칠리아 섬의 이슬람 통치지방에는 6명의 사람이 본인이 총독임을 자처하는 사태가 발발한다. 덕분에 시칠리아의 비잔틴 세력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게 된다. 875년(혹은 876년)에는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 본토의 바리를 탈취하는 성과를 거둔다.

고문서에 묘사된 시라쿠사의 함락

875년에 아글라브 왕조의 에미르 무함마드 2세 이븐 아흐마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이브라힘 2세가 즉위한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던 그의 형과 달리 정력적인 군주였다. 그는 시칠리아 정복을 완수하기 위해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를 시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877년 시라쿠사 인근의 항구를 점령하고 비잔틴령을 약탈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이슬람군의 시라쿠사 공격이 시작된다. 공성 무기 등으로 잘 무장된 이슬람군의 끝없는 공격에 시라쿠사의 방어군은 속수무책이었고, 원군은 바실리우스 1세가 네아 에클레시아 성당 건설을 위해 대부분의 함대를 건설 물자 수송용으로 썼기 때문에 그 수가 적었다.예나 지금이나 높으신 분들이 문제다. 공성전이 시작된 지 9개월 뒤에능 시라쿠사의 외성이 이슬람군에게 점령당했고, 878년 5월 21일 도시 전체가 이슬람군에게 점령당한다. 거주자의 대부분은 노예로 잡히거나 이슬람군에게 살해당했으며, 도시 자체는 2개월 동안이나 이슬람군에게 약탈당한다.

정복 말기[편집 | 원본 편집]

878~900, 시칠리아 이슬람 세력의 내분[편집 | 원본 편집]

시라쿠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은 쪼개지기 시작했다. 도시를 점령한 이후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는 그의 자리를 탐낸 동생과 삼촌의 사주를 받은 노예에게 살해당한다. 이후 총독직을 강탈한 자파르의 동생은 이프리키야에서 추방되고, 이에 그는 시칠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일단 임시로 자신의 아들을 시칠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한 아글라브의 에미르 이브라힘 2세는 후임으로 시칠리아의 후사인 이븐 라바를 정식 총독으로 임명한다. 879년 시칠리아 섬 북동쪽(특히 타우로메니온)을 공격하나 실패한다. 한편 880년에는 비잔틴이 제한적인 반격을 시도한다. 나사르가 이끄는 비잔틴 함대는 케팔로니아 해전에서 아글라브 왕조를 상대로 승리한다. 팔레르모 주변부를 약탈한 나사르의 함대는 스텔라이에서 한 번 더 이슬람 해군을 무찌른다. 881년에는 다시 타우로메니온을 공격하나 공격한 이슬람군이 전멸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카타니아, 타우로메니온, 포칠리를 공격하나 연공을 받거나 후퇴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데 그칠 뿐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동시에 이탈리아 본토의 비잔틴 세력도 부활하여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이끄는 군대가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연이은 패배로 인해 이슬람 세력 내부에서 억눌러져 있던 부족ㆍ계급간 갈등이 결국 터지고 만다. 지배 세력의 대부분은 아랍계였고, 피지배 계층은 베르베르계가 주축이 되었는데 이 둘 사이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팔레르모의 베르베르계들은 총독 사와다 이븐 카피자를 추방한다. 이브라힘 2세는 시칠리아에 새로운 총독을 파견한다. 그는 888년 밀라초에서 일어난 해전의 승리와 수차례의 약탈을 통해 갈등을 봉합시킨다.

원군을 이끌고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온 사와다 총독은 타우로메니온을 공격하나 패배한다. 890년 3월, 팔레르모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아랍계가 주도한 반란이었다. 이프리키야 본토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이슬람군은 비잔틴을 향한 공격을 이어나갈 수 없었고, 895년 즈음에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평화협정의 대가로 비잔틴측은 이슬람군 포로를 40개월에 걸쳐 풀어줬는데, 이는 이슬람 세력에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석방된 사람들 중 일부는 아랍계에 붙고 나머지는 베르베르계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비잔틴측이 노리던 바였다.

898년 내전이 시칠리아 전역으로 퍼지자 2년 뒤 이브라힘 2세는 과거에 이프리키야의 반란을 처리한 경험이 있던 자기의 아들 아불 압바스 압달라에게 군대를 맡겨 시칠리아로 보낸다. 이 때 반란은 지역적으로 양분되는 양상까지 보인다.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이에 대항하는 아그리젠토파로 나뉜 것이다. 반란군과 협상을 시도하나 실패한 아불 압바스는 팔레르모로 진격하여 900년 9월에 점령한다. 많은 수의 반군들이 비잔틴이 지배하는 타우로메니온 요새로 도망쳤으며, 몇몇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901~902, 타우로메니온의 함락[편집 | 원본 편집]

비잔틴 세력은 반란으로 온 기회를 잡기 위해 메시나와 레조 지방에서 군대를 모으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함대를 수령받는 등 전쟁 대비에 몰진한다. 그러나 아불 압바스는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비잔틴의 요새를 공격해 타우로메니온 주변을 황폐화시키고 카타니아를 공격하나 실패하고 그 해 겨울 팔레르모로 돌아온다. 다음 해 봄이 되자 다시 공격을 시작한 그는 데모나를 급습한다. 또한 비잔틴 세력의 준비를 방해하기 위해 이탈리아 본토의 레조를 공격해 점령하고 15000명을 노예로 잡는다. 그러나 시칠리아로 돌아오던 중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칠리아로 방금 막 도착한 함대와 조우해 크게 승리하고 30척의 배를 노획한다.

902년 초 이브라힘 2세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의 압박으로 왕위를 포기하고 이를 그의 아들인 아불 압바스에게 넘겨준다. 이후 시칠리아에서 벌어지는 성전에 참여하기로 한 이브라힘 2세는 이프리키야에서 자원자를 모은다. 오랫동안 지속된 교착상태를 부수기 위해 타우로메니온으로 진격한 그는 성벽 앞에서 수비군을 패배시키고 공성전을 준비한다. 본국의 지원없이 싸우던 타우로메니온은 902년 8월 1일 함락당하고, 이브라힘이 주변의 요새에 군대를 보내 요새의 포기 혹은 연공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지칠 줄 모르는 이브라힘 2세는 이탈리아 본토로 넘어갔고, 멀게는 나폴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공격에 대비한다. 그러나 그는 코센차 공성전에서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그 곳에서 이질로 사망하고 그의 손자가 이슬람군을 본토로 부름으로써 이슬람군의 진격도 멈추게 된다.

타우로메니온 함락 이후[편집 | 원본 편집]

902~1042, 비잔틴의 마지막 발악[편집 | 원본 편집]

시칠리아 에미르국이 묘사된 1000년의 이탈리아 지도

몇몇 요새들은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손에 있었지만 타우로메니온의 함락은 비잔틴의 영향력이 시칠리아 내에서 완전히 일소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시칠리아 내에서의 비잔틴과 이슬람 세력 간의 싸움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시칠리아 섬은 본토 이프리키야처럼 파티마 왕조(950년대부터는 현지 칼바 왕조)의 치하에 들게 된다. 타우로메니온 요새는 902년 점령 이후에도 비잔틴의 손에 있었지만 962년 비잔틴 제국이 크레타섬을 재정복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남은 요새들을 공격하였다. 그 해 타우로메니온이 함락되고 다음 해에 비잔틴의 마지막 요새인 로메타로 공격이 몰리게 되나 비잔틴의 황제 니케포로스 2세는 시칠리아를 수복하기 위한 군대를 보낸다. 이 군대는 메시나를 수복하는 등 초기에는 승승장구하나 이내 로메타 요새만 남게 되었고, 다음 해에 칼라브리아[9]로 후퇴한다. 다음 해 재차 공격에 나서나 메시나 해협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이 계속해서 이탈리아를 약탈하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2세가 그들과 맞섰으나 스틸로에서 패배한다. 1020년대가 되자 남이탈리아의 지배를 확고히 한 비잔틴 제국은 메시나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키나 바실리우스 2세의 사망으로 후퇴한다. 비잔틴이 마지막으로 시칠리아를 공격해온 것은 1038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칼바 왕조가 지라 왕조[10]와 싸울 틈을 타서 시칠리아의 동쪽 해안지방을 수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복을 완수하지 않은 채 마니아케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야 했고, 그가 돌아가자 칼바 왕조는 비잔틴의 요새를 다시 점령한다. 1042년 메시나가 점령당하면서 비잔틴 세력은 시칠리아 내에서 완전히 말소된다.

메시나 함락 이후 시칠리아는 노르만 족이 침공해오기까지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게 된다. 1062년에 시작된 노르만 족의 침략은 1092년 노토가 함락되면서 끝나게 된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70년을 넘게 이끈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싸움은 섬의 약사에 긴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슬람 치하에서 시칠리아 섬의 문화는 빠르게 아랍화되었지만 중부와 동부 지방은 이슬람화에 크게 저항하였다. 이슬람의 영향도는 지명에서도 볼 수 있는데, 초기에 점령당한 시칠리아 섬 서부와 남동부에는 아랍어에서 유래된 지명이 많지만, 가장 마지막에 점령당하고 남이탈리아의 비잔틴과 계속해서 연결이 있었던 동북부는 아랍어 지명을 쉽게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기독교계 문화가 살아남은 편이다.

각주

  1. 아프리카 지방의 이슬람계 토후국
  2. 북아프리카
  3. 이슬람계의 제후의 명칭 중 하나
  4. 당시 팔레르모의 지휘관
  5. 그래서 아랍인들은 팔레르모를 '그 도시'라는 의미의 알 마디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6. 비잔틴 제국의 군관구(테마)의 장(將)
  7. 장화의 굽 부분
  8. 위에서 이슬람군이 엔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고 나와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비잔틴군이 엔나를 탈환해서 이를 다시 포위한건지, 아니면 엔나 주변부의 비잔틴 세력을 일소한 건지는 불분명하다고 한다.
  9. 이탈리아 장화의 앞부분
  10.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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