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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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世永. 이명은 이유흠(李維欽), 이천민(李天民). 자는 좌현(佐顯), 호는 고광(古狂)·고광자(古狂子).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9년 5월 29일 충청도 아산군 음봉면 신휴동에서 부친 덕수 이씨 이민하(李敏夏)와 모친 평강 채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충무공 이순신의 중형 이요신의 12대손이나, 출계하여 이순신의 12대손으로 입적되었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무반 가문이었다. 7대조 이언상과 6대조 이한응, 5대조 이인수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고조 이후빈은 증직으로 호조참판이 되었고, 증조 이병희는 군수를 지냈다. 조부 이규희는 병마절도사와 동지훈련원사를 지냈고, 생부 이민하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과 내금위장을 지냈고, 양부 이민철은 훈련원정과 수군절제사를 지냈다.

이세영은 7살 때 한학을 공부했고, 10살 때 생부 이민하와 함께 상경한 뒤 13살 때 삼종숙부인 이민철의 양자로 입적했다. 장성한 뒤 참판 김재은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위정척사파 유학자인 홍재창의 문하에 들어갔다. 1889년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다 1894년 6개조 이한응의 묘소가 있는 청양군 적곡면 관현리로 이사했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마을을 공격하자, 이봉학과 한께 선비를 모아 유회를 조직하고 동학군을 몰아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관찰사 이승우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김복한, 이인의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승우가 도중에 배신하여 김복한 등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의병이 와해되었다.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잔여의병을 모아 정인의와 함께 공주를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부여 홍산으로 피신한 그는 이듬해 황재현, 이관, 김홍제 등과 함께 남포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켰으나 역시 패했다. 이후 정부에서 군부 주사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장인 김재은이 의병 지도부의 부름을 받고 원주로 갈 때 참모로 종군했다. 홍성에서는 홍재구와 만나 의병 재기를 도모하기도 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뒤 육군 침위에 임명되었고, 1899년 부위로 승진하여 친위대 제 1대대 부관이 되었다. 1900년 여름 새롭게 창설된 헌병대 부관이 되었다. 1902년 헌병대 중대장이 되었다가 정위로 승진하여 헌병대장 서리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의 득실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친일 관료의 비행을 비판하다가 1904년 정직당하자 낙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 채광묵 등과 함께 의병을 준비하였고, 1906년 홍산에서 거병한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의병 부대가 서천, 보령, 청양 등을 장악한 뒤 홍주성을 공략한 후에는 중군장니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로 인해 홍주성이 함락되었고, 그는 미처 피신하니 못한 채 체포되었다. 이후 서울의 평리원 감옥서에서 신문받을 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 선묘조 임진년의 일을 생각하면 저들 섬 오랑캐가 길을 빌리자는 핑계로 우리 백성을 살육하고 능침에 구덩이를 팠으며, 이 몸의 선조이신 충무공 순신이 독려하여 싸우기 8년 만에 마침내는 원수의 탄환에 맞았는데, 지금껏 나라와 집안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 (중략) 나는 기어이 원수인 오랑캐를 성토하여 한 번 큰 의리를 천하 만국에 알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화를 거두지 않고 일이 성실하게 진행되지 않아 이렇게 잡힌 몸이 되었으니 나에게는 오직 죽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1906년 12월 평리원에서 종신 유배형의 처분을 받아 황해도 황주의 철도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청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 조치에 반대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다시 채포되어 철도로 유배되었다. 1908년 봄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동생 이창영, 이상린 등과 함께 청양에 성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성명학교의 취지는 과거를 지키는 수구적 태도를 버리고 문명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으로, 문명 진보를 위해서는 교육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교육은 성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 이유로 '성명'이라 이름한 것이었다.

1909년 부여군 은산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군 첨사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였고, 1913년 3월 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의 함경, 평안, 황해도 3도 사령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6월 만주로 망명한 뒤 대종교에 입교하여 상교가 되었다. 1915년 만주에서 이동하, 이은영 등과 함께 민단조합을 결성한 뒤 국내에 격문을 배포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그는 경상북도지부장을 맡아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석방 후인 1917년 서간도 신흥강습소의 교장 서리로 활동하다가 그해 11월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바뀐 뒤 교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여준, 김동삼, 이동녕, 이범윤 등 만주, 연해주 일대의 민족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로 기록되었다. 3.1 운동 후 국내에서 이규갑, 홍진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한성 임시정부에서 참모즈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부 차장에 선임되었으며, 환인현에서 손극장, 독고옥 등과 함께 한교공회를 조직하고 특무부장이 되어 일제의 침략기관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주만통군부 사령관이 되었고, 1922년 2월 한교교육회 이사장, 8월에 만주 일대의 독립군 통일조직인 대한통군부의 군사부장이 되었으며, 10월에 남만주의 단체들이 통합한 대한통의부가 조직될 때 군가위원장이 되었다. 1923년 이후에는 통의부의 참모부장, 궁사부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1925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분을 비판하는 교정서를 발표했다.

1930년 2월 베이징에서 조성환, 손일민 등과 함께 한족동맹회를 조직했으며, 그해 7월 강구우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였다. 1932년 6월 조성환, 김원봉, 김규식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 정부의 후원을 얻어 중, 한 항일의용군을 조직하여 간부 훈련 및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충칭에서 신사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요,길,흑 민중후원회 간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다만 쓰촹성 성도에서 사망항 것만 정해진다. 사망년도도 불확실하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918년 사망항 것으로 기재되었으나, <덕수 이씨 정정공파보> 상권 상편에는 1941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건국대 사학과 교수 권구훈은 논문 <고광 이세영의 민족운동>에서 이세영이 1940년 2월에 사망한 것으로 서술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세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김기승, 천경석, <이순신 후손의 항일독립운동>, 이순신연구논총, 2011년.[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