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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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相定. 호는 청남(晴南) 또는 산은(汕隱). 이명은 이직문(李直文), 이연호(李然晧).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7년 6월 10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서내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1가)에서 경주 이씨 이시우(李時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6대조 이래 벼슬에 나아간 적이 없었지만, 조부 이동진(李東珍) 대에 와서 재산을 축적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문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해 대구 일대에서 명망이 자자했다. 이상정의 부친 이시우는 1908년에 사망했고, 그와 세 형제들은 조부와 백부 이일우(李一雨)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백부 이일우는 대구에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당대의 우국지사들과 교류했다. 이 곳은 1920년대에 교남학교(嶠南學校)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의 대륜중고등학교(大倫中高等學校)가 되었다. 기록은 따로 없지만, 이상정은 백부가 운영하는 우현서류에서 신학문을 수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정이 일본으로 유학을 간 때가 언제였는지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된다. 1930년대 일제의 정보자료엔 그가 1909년부터 일본에 유학 가서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에서 3년 수학하고 1915년에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을 졸업했다고 기록되었다. 반면 그의 유고집 <중국유기(中國遊記)>에는 그가 1919년에 국학원대학을 졸업했다고 기재되었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는 그가 1912년경에 일본에 유학갔을 것으로 본다. 1909년 당시 그의 나이가 13살에 불과한 것을 고려했을 때 대체로 1912년에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성중학교는 본래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로 만들어진 사립 특수교육기관이었으나, 1897년 이후 일반 중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예비 군사교육기관의 기능과 명성은 남아 있었다. 그가 어떤 경로로 성성중학교에 입학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그가 중국에 망명한 후 별다른 군사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펑위샹의 서북군을 비롯한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것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이상정은 동경 국학원대학에 졸업했다고 하지만, 정작 국학원대학의 졸업생 명부에는 그가 없다. 아마도 기록이 누락되었거나 실제로 졸업한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국학원대학은 일본 국학과 관련하여 일본사와 일본문 등을 가르치던 곳이지만 본래 일본 신토의 제관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이어서 일본 특유의 국수주의가 두드러진 교육기관이었다. 이상정은 이 대학의 전수부나, 단기에 일본사와 일본문을 수학하기 위한 속성과에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정이 일제의 정신적, 실제적 교육기관이었던 성성중학교와 국학원 대학에 재학했다는 사실은 후에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는 그의 행적에 비춰볼 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가 중국군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일본통이었기 때문인 점을 감안했을 때, 그는 아마도 일본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재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가 이에 관련한 자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상정은 1917년 전후에 국내에 귀국한 뒤 대구계성학교의 도화교사로 재직했고, 서양화 개인전람회를 개최했다. 그는 1913년 5월에 경북 청도 출신의 한문이(韓文伊)와 혼인하여 이듬해 1월 첫째 딸 숙희(淑熙)를 낳았지만 불행히도 그해 12월에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선희(善熙)라는 둘째 딸이, 1918년 12월 외아들 중희(重熙)가 태어났다.

이상정이 1919년에 벌어진 3.1 운동에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1 운동 전후에 계성학교를 사임했던 것 같다. 그의 백부 이일우는 1919년 6월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신문을 받을 때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죽은 동생의 아들 이상정이란 자는 일본에서 부기공부를 했다는데, 그는 원래가 방탕무뢰하여 항상 내가 감독을 하고 있으나 지금부터 한 달 쯤 전에 가출하여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인데, 혹은 그와 신문하는 것과 같은 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도 3, 4만원의 재산이 있다.

이상정은 1920년 대구청년회에 가입했으며, 일제의 정보기록과 유고집에 따르면 1920년 후반부터 1923년 후반까지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광성고보, 그리고 서울의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역사, 지리, 수학, 한문, 습자, 도화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1923년 12월 구에서 벽동사를 조직하고, 1925년 1월 대구에서 조직된 용진단(勇進團)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음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1923년 말에는 대구로 돌아와 있었던 것 같다.

이상정은 1925년 4월 서울에서 민중자대회가 해산당하고 용진단 관계자가 종로에서 적기(赤旗)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면서 용진단에 대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그해 5월에 망명했다. 그는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인 용진단 위원장을 맡고 있었지만, 일제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그가 중국에 망명한 것은 쑨원의 삼민주의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정은 중국에 망명한 뒤 동북 지방에서 민족교육에 참여했다. 그는 하얼빈으로 가 그곳 근처의 한국인 학교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40여 일간 동북 지역 3,700리를 여행했고, 1926년 중에 하북성(河北省) 장가구(張家口)에서 류동설(柳東說) 부부와 신영삼(申榮三)이 운영하는 병원에 기숙했다. 당시 장가구 지역은 펑위샹의 서북군벌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펑위샹이 세력 다툼에서 밀려 내몽고 수원으로 이동하자 이상정은 유동열 등과 함께 수원으로 이동했고, 신영삼은 펑위샹 군벌의 군의관으로 취직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상정 역시 이때 펑위샹 군벌의 참모부 막료로 취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이상정은 장가구에서 평양 출신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과 교제했다. 수원으로 이동한 지 2개월만에 펑위샹군이 해산되자, 권기옥과 신영삼은 퇴직했다. 그 직후인 1926년 10월, 이상정과 권기옥은 유동열 부부를 모시다가 혼례식을 하고 동거에 들어갔다. 이상정은 이때 국내에 아내 한문이(韓文伊)가 있었고 자식까지 봤지만, 권기옥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중혼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 이상정은 권기옥과 함께 내몽고에서 나와 베이징에 거주했다.

1927년 3월 국민혁명군이 상하이에 진입한 뒤, 권기옥은 상해 동로항공사령부의 비행원이 되었다. 이상정은 아내를 따라 상하이로 이주했다가 비행대가 항공서로 개편되면서 권기옥이 난징판사처로 전임되자 난징 진회하(秦淮河) 부근에서 작은 양옥을 짓고 살았다. 이 시기 이상정은 항공사령부의 특별문관 등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동북지방과 내몽고, 그리고 베이징 부근을 비롯하여 자신이 여행한 곳에서 빠짐없이 고적답사를 했다. 이러한 습관은 이후 중국군에 관계한 1920년대 후반의 2년간 상하이, 항저우, 난징, 진강, 구강 등 여러 곳을 오가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풍경을 유감없이 발휘한 기행문을 남겼다.

그러던 1928년 3월, 이상정과 권기옥, 그리고 손두환(孫斗煥) 등이 공산당 혐의로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남경 일본영사관에 넘겨져 40여일 조사를 받은 일이 일어났다. 다행히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는데, 여기엔 권기옥을 아끼던 중국 유력인사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상정은 중국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던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 사건을 볼 때, 이상정과 권기옥은 손두환이 가담한 의열단과 관련되었으며, 공산주의적 성향의 인사들과도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 난징에 거주하던 이상정은 지인의 간청으로 항저우 주둔 국민정부군 사단 훈련처 책임자로 배속되었다가 며칠 만에 휴가를 내는 형식으로 사임하고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가 사임한 이유는 국민정부군이 펑위샹의 서북군을 비난하는 격문을 만든 것에 크게 난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1938년까지 중국군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국 망명 후 광둥정부의 통역관을 맡았다고 하며, 1932년에는 난창항공협진회 위원을 맡는 등 중국군 항공 관련 업무에 관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상점을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933년 7월 권기옥이 항저우항공국으로 발령이 나자, 이상정 부부는 난징에서 항저우로 이사갔다. 1933년 12월 항주에 소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상정을 임시의정원의 경상도의원으로 보선하였으나,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국민정부 측이 허락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가 의열단 계열의 인물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의열단이 부정적으로 보는 임시정부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한 곳에 얶매이고 싶지 않다는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이 시기에 관직을 맡는 것보다 유람을 떠나는 걸 즐겼고 명승지를 방문한 소감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짓기도 했다.

1936년 하반기에 이상정 부부는 일제의 첩자로 오해 받아 8개월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들 부부를 시기한 동포의 무고로 비롯된 일이었는데, 주위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후 1937년 3월 동생 이상화가 이상정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3개월 정도 다녀왔다. 이상화의 미망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상화는 이상정이 만경(滿京)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에 갔다고 한다. 만경은 오늘날의 창춘으로, 당시엔 만주국의 수도였다. 항저우에 있던 그가 장춘에서 구금되었다는 건 신빙성이 없다. 다만 이상정이 항저우에서 이상화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여기엔 자신이 북방을 여행할 테니 원고 출판 문제 등을 이유로 만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이상화가 중국에 간 것은 중국 북방에서 이상화와 만나 원고를 받으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3월에서 6월 무렵 베이징에서 이상정을 만난 이상화는 이상정의 원고를 가지고 귀국했다. 이상화는 이일로 일제의 조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원고가 압수되어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봉기가 이상화가 중국에서 가져온 원고를 보관하고 있다가 1950년 이상정의 유고집을 집필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이 벌어졌고, 뒤이어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상정은 권기옥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고 11월에 좌파 세력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할 때 가담했다.

1937년 11월 일본군이 난징을 침략하자, 이상정과 권기옥은 김원봉 등과 함께 구강, 한커우 등지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헤어져서 곤명으로 향했다. 이후 1938년 충칭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국민정부의 교섭을 받고 군사 관련 직책을 맡았다. 이상정은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으로 취임하였고, 아울러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막료직도 겸했다. 그리고 1941년에 육군참모학교에서 귀주성(貴州省) 식봉현(息烽縣) 소재의 유격대훈련학교의 소장교수(少將敎授)로 전임되었다. 별다른 실적을 보여준 적 없는 그가 이러한 직임을 맡게 된 것은 일본통이고 중국역사에 정통한 점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한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할 때 함께 했다. 그는 1942년 8월 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어 10월 경상도 지역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1942년 10월 말에 개최된 제34회 의정원 회의에서 제2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10월 28일자로 의정원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 각국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주문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의에 대표제안자로 나섰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 시일 내에 대중화민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향하여 현하 해회(該會)에서 한국광복군에 행용하는 소위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 조항을 즉시 취소하고 절대적으로 국제간 평등적 입장에 처하여 우의적으로 적극 원조하기 요할 것이며 단 중국 영토 내에서 침략국가에 대하여 공동작전을 계속하는 기간 내에 있어서는 해군(該軍)의 지도를 임시로 태평양전구 중국구 사령장관에게 위임함이 타당하다 인함”이라는 주문의 ‘광복군에 관한 건’도 대표제안자로 서명했다.

이상정은 1943년에도 임시의정원 제2분과위원, 의정원법 개정위원, 제1분과위원장 등으로 선임되었고, 1944년 6월에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재선임되었다. 1944년, 이상정은 의정원의 제4분과위원에 김원봉, 지청천, 유동열, 조성환과 함께 선임되었다. 그는 중국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광복군의 자주적 활동을 위해 9개 준승의 취소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중국과 평등 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 사병에 대해서도 ‘부로(俘虜)’나 ‘감화(感化)’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그들을 죄인인양 취급하지 말고 '합류', '초모'라는 표현으로 사용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가출금(假出金)’이나 ‘신수비(薪水費)’와 같은 일본용어 사용의 잘못됨을 지적하며, 우리말의 사용을 강조했다.

1945년 2월, 이상정은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 정당은 한국독립당 위주로 돌아가는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을 요구하고 임시정부 내부의 대립과 갈등을 비판하는 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다. 한국독립당 지도부에 불만을 지닌 세력과 민족혁명당의 비의열단 계열이 연합한 형태로 조직된 신한민주당은 홍진, 유동열, 김붕준이 주석단을 맡고, 이상정과 손두환 등이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신한민주당은 반한국독립당의 기치 아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개혁, 그리고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한편, 이상정은 1945년 5월 충칭에서 흥사단의 예비단우로 입단했다. 그가 흥사단에 입단한 것은 당시 신한민주당의 간부들이 대거 흥사단에 예비단우로 입단한 것과 연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독립운동가들끼리 분파를 형성하고 극단적인 대립을 벌이는 걸 비판하면서, 대중의 자각과 비판 하에서 대중을 대변하는 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제의 항복이 알려진 1945년 8월 13일 신한민주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의정원에,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封還)할 것을 요구한 제안에 참여했다. 이어 8월 23일에는 내각 총사직을 통한 ‘간수내각(看守內閣)’의 조직을 주장하는 제안에도 동참했다.

이러한 이상정의 움직임은 한국독립당이 주도하던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의 형태로 개조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대중성이 결여된 임시정부의 한계를 인식하고 대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활동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 내에서 좌우세력이 전개한 권력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상정은, 1930년대 이래 관심을 가져온 민족전선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해방 이후의 정치적 지향을 권력투쟁보다 대중을 우선하는 노선에 주목한 듯하다. 이로 볼 때 그의 정치 노선은 민족주의 성향이지만 좌익에게 좀더 호의적이면서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때 중립을 고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정은 8.15 광복 후 즉각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194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한인의 권익 보호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1947년 7월 모친상을 맞아 9월에 귀국했지만 그해 10월 27일에 고향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향년 50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상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