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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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炳春.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4년 2월 2일 전라북도 임실군 상동면 효좌동에서 테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주 이씨 양반 가문으로, 조부 이경화는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했고, 부친 이우홍은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919년 3.1 운동 관련 심문을 받았을 때, 이병춘은 천도교를 믿은 지 30년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그는 25세 때인 1889년경에 동학에 입교했을 것이다. 양반 가문의 자제였던 그가 동학에 입교한 동기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천도교서>에 따르면, 1892년 10월경 삼례 집회가 열렸을 때, 최시형은 그에게 반드시 대두령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건넸다고 한다. 이에 이병춘이 자신의 나이가 어리고 몰지각한 사람이라서 대두령이 될 수 없다고 하자, 최시형은 자신 역시 나이가 어리고 몰지각하다며 다독였다고 한다. 그해 12월 동학교도들이 교두 최제우 신원을 위해 장내리에서 시위했고, 1893년 2월 서울복합상소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이병춘은 이용거와 함께 임실군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1894년 1월 17일 동학농민군이 고부성을 공략한 후 백산에 들어와 진을 치고 격문을 발송했을 때, 그는 임실군을 대표하여 최승우, 최유하, 임덕필, 최우필, 조석휴, 이만화, 김병옥, 문길현, 한영태, 이용거, 이병용, 곽사회, 허선, 박경우, 한군정 등과 함께 백산에 들어갔다. 그해 3월 임실군 도접주로서 최찬국 등과 함께 진산 전투에 참여했다가 동학군 수백 명과 함께 관군에게 사로잡혔다.

<동학사> 1권에 기재된 <남원군종리원> '순교역사'에 따르면, 이병춘은 옆에 있던 사람이 관군에 쏜 총에 맞고 쓰러딜 때 함께 쓰러졌고, 관군이 수백 명의 동학군을 학살한 뒤 시신에 불을 놓다가 미처 다 놓지 않고 떠날 때 기회를 틈 타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9월 이후 동학농민군와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했을 때, 그는 임실에서 재차 농민군을 모아 청산에 집결한 본대에 힙류했다.

이병춘이 1894년 11월에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는지 여부는 기록이 미비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와 임실군 갈담사에 유숙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최시형이 이병춘의 집에서 9일간 유숙했다는 기록도 있다. <천도교서>에 따르면, 이병춘은 최시형과 함께 인제 눌음정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때 최시형은 "모든 일은 하늘에서 나왔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릴 뿐이며, 사람의 사사로움으로써 혐오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후일에 다시 상봉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895년 무장접주를 맡은 이병춘은 최시형이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만 만나며 은거 생활을 하는 것이 걱정되어 1896년 2월 최시형을 만나고자 길을 나섰다. <동학사>에 따르면, 이병춘은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경상도 상주의 청계사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꿈 속에 최시형으로부터 거처를 전해듣고, 날이 빍자마자 그곳에 갔더니 조그만 움집이 있길래 확인해보니 최시형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최시형으로부터 귀향하여 향례를 설치하라는 등 여러 지시를 들었고, 손병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900년 손병희로부터 팔도 대접주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 20일 설법식이 거행되었을 때 박인호, 손천민 등 30여 명과 함께 참석했다. 송병희가 교단의 근대화 추구를 위해 문명개화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흑의 착용과 단발을 단행했을 때 적극 동의했다. 1904년 9월 독립협회의 민회운동 방식을 도입하여 진보회가 조직되었을 때, 그는 박준승과 함께 전라도 대표를 맡았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이병춘은 이 시기에 일본 관헌에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한국의 오늘날의 국정 문란은 해당 분야의 대신 등이 오로지 사적인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사욕에 빠짐으로써 임금의 총명함을 가로막은 데 있다. 이에 우리 진보회원이 대거 경성에 올라가서 표를 올려 당국의 여러 관을 몰아내고 국정 혁신을 행하려고 하였다. 그 표시로서 진보회원인 자는 반드시 단발한다는 데 있다. 또 우리 회원으로 경성에 왕복할 여비를 갖고 가입할 규약이 있는 것은, 그 입회자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 지라도 국법을 범하는 것 같은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906년 5월 3일 제20대 교구장 대리 및 교령을 맡았으며, 그해 9월 24일에 도집, 1907년 10월 4일에 교수로 부임했다. 1907년 11월 30일 손병희로부터 '풍암'이라는 도호를 받았으며, 1909년 교훈에 봉해졌고, 그해 11월 3일 주권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 1월 3일 성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천도교단은 대도주를 중심으로 봉도실, 고문실, 현기사, 이문관, 서무관, 전제관, 금용관을 두었고, 원직에는 성도사, 경도사, 교장, 교수, 도집, 대정, 중정 등이 있었다. 성도사는 원직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였다.

1912년 도선암, 제1회연성을 잇달아 맡았고, 1919년 무렵엔 도사를 맡았다. 그해 3월 1일 손병희가 민족대표 33인에 선정되어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뒤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자, 천도교 지도부는 교단을 지키고 3.1 운동을 전국에 확대하기 위해 특별성미금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병춘은 3월 15일 중앙총부의 대종사장실에서 정광조로부터 운동자금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박승래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고산의 교구장을 맡고 있던 김태현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계획했다.

이병춘은 오지영과 함께 천도교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특히 전라남도 담양군 교구장을 맡고 있던 황정욱으로부터 300원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뒤 징역 3년을 성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입되었다. 다만 1921년주터 대외 활동을 한 것을 봉 때 형을 다 살지 않고 가출옥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따르면, 이병춘은 탑골공원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는 <동학천도교 인명사전>에도 나와 있지만, 이를 입증할 당대 사료는 없다. 또한 1964년에 발간된 <전주시사>에는 이병춘이 전주의 3월 11일 독립만세시위를 기획했다고 기록되었다. 그가 박준승과 더불어 전라북도 총책임을 맡아 그 일대의 독립만세시위 확대 임무를 수행한 정황은 있지만, 이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따르면, 이병춘은 출옥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없으며, 그가 1921년부터 천도교 교단에거 왕성하게 활동한 걸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이병춘은 1921년 4월 이종훈,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홍기조, 정계완, 이종석, 박준승, 오지영, 홍기억 등 13명과 함께 영흥관에서 회맹식을 개최했다. 이들은 천도교단의 최고두령으로, 천도교의 폐단을 철저하게 교정하고 겨단이 바로 설 수 있게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또한 제4대 교주로 추대된 박인호는 정통성이 떨어지니 교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임시대회를 열어 의사원후원회를 조직해 혁신과 관련된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손병희가 구제도를 준수할 것을 지시하고 박인호를 차기 교주로 삼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자, 이병춘은 혁신파 그룾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1922년 2월 16일 중앙총부에서 신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8월 20일 통일기성회가 조직되었을 때 이종린, 김경함, 신태순, 김영륜, 정용근, 김재계, 이시우, 권동진, 한현태, 박준승 등과 함께 오영창계의 교인 대회와 천도교 종리원의 통일을 표방하며 통일기성회를 조딕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통일기성회는 처음에는 교단의 지도권을 잡은 최린 등 신파에게 자치운동에 참여하는 대가로 일정한 지분과 역할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파가 이를 묵살하거 자치운동에서 통일기성회 측을 배제하자, 통일기성회는 1925년 말 신파에 맞서고 있던 오영창계의 교인대회에 접근했고, 1925년 11월 교주제를 부활하여 박인호를 4대 교주로 인정했다. 또한 오영창의 교인대회와 통일기성회를 통합하여 천도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1926년 1월, 천도교 중앙위원회는 중앙종리원으로 변경되었고, 최링 계열의 종리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이들은 입교 연대가 오래되었기에 천도교 구파라고 불렸다. 이병춘은 이 구파의 핵심 멤버로서 193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했다. 1928년 10월 29일 수운선생 탄신일 기념기도회에 참석했고, 12월 26일에는 천도교 제4회 정기총회에 천도교 상무총법사로 참석했고, 1930년 12월 24일과 1931년 4월 6일에 열린 집회에도 참석했으며, 1931년 12월 28일 천도교 인일기념회에도 참석했다. 1930년 12월 28일 천도교 사관회의에서는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말년을 서울 소격동 86번지에서 보냈다. <동학천도교 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병춘은 1935년 5월 29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병춘의 손자이자 '풍암 이병춘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인 이길호 씨는 집안에서 가지고 있던 부조와 안장 등을 볼때 1933년 6월 29일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도 유족의 진술을 받아들여 이병춘의 사망 일자를 1933년 6월 29일로 명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병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유해를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