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위 (1896년)

李大偉. 이명은 이원규(李元奎).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으나 탈주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북경대학 재학 중 이용설·문승찬(文承贊) 등과 함께 고려기독교청년회(高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유학생의 어학교육과 숙식을 주선하는 한편 신채호·한진산(韓震山)·서일숙(徐日肅) 등과 함께 화북 일대에서 활동하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교포들과 연계하기 위해 서일숙을 연해주로 파송했다.

1922년 북경에서 개최된 세계기독학생대회(WSCF)에 한국대표로 이상재가 참석하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손정도와 함께 북경에 파견되어 이상재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도록 권유하였다. 또한 YMCA 학생부 간사를 맡았던 그는 동회에서 실시한 해외훈련에 뽑혀 1924년 미국에 파견되어 예일대·콜롬비아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1926년 8월 흥사단에 가입하여 동포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7년 7월 귀국한 그는 동년 8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김종덕(金鍾悳)·조병옥·박현환(朴賢煥) 등과 함께 혁명투사 양성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청년운동, 직업학교 설치, 보건운동의 홀동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는 동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YMCA의 농촌사업 연구를 위해 1927∼1929년 3년간 이기태와 함께 농촌운동 선전 및 농촌지도자 강습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7년 5월 17일 청년운동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붙잡힌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후 재판 결과 무죄를 언도받고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1939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은거 생활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2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대위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