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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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民(또는 李光珉, 李光敏). 자는 사익(士翼), 호는 자화(子華), 이명은 이문형(李文衡), 이영형(李永衡), 이영(李暎, 李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경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용상리 법흥골 임청각(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입청각)에서 이봉희(李鳳羲)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광민의 백부 이상룡은 협동학교를 세워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고 독립군 기지를 가야산에 구축하려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또한 작은할아버지 이승화(李承和)와 아버지 이봉희도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이광민은 이러한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갖추고 독립운동에 뛰어들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이상룡은 가족을 모아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로 떠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1911년 1월 6일, 이상룡은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때 16세가 된 이광민 역시 백부를 따라갔다. 서간도로 이주한 이광민은 서간도 유하현에서 거주하면서 백부 이상룡의 비서 노릇을 하며 그로부터 애국 정신을 배웠다. 또한 신흥무관학교의 생도가 되어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고,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엔 1916년에 부민단의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에 설립된 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가 되어 한인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만주로 건너간 한인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이 강렬해지자, 1919년 11월 17일 서로군정서가 출범하여 일제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이상룡이 서로군정서의 최고 지도자인 독판에 선임되자, 이광민은 백부의 곁에서 충실히 보필했고 서로군정서의 군사 활동에도 참가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간도 참변을 단행했다. 이때 이상룡의 거주지 역시 초토화되었고, 이광민은 백부를 신속히 산간 오지의 깊숙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모셨다.

간도 참변 후 독립군기지가 초토화되자, 한인들은 삶의 터전을 재건하려 애썼다. 이때 이광민도 동포들을 이끌고 한인사회 재건에 힘을 보탰다. 이후 1922년 남만주 독립군을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창설되자, 그는 이 단체에 가담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성립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조직 내부의 이념상의 문제로 분열되었고, 1924년 초 채찬, 김명봉 등이 무장 투쟁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참의부(參議部)를 설치했다.

대한통의부는 1924년 중반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이광민은 이상룡의 곁을 떠나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서로군정서, 광정단, 의성단, 길림민주민회, 고본계, 노동친목회, 잡륜자치회 등 8개 단체가 통합에 합의해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이로서 만주의 독립 운동 세력은 참의부와 정의부, 그리고 신민부(新民府) 등 3부로 편성되었다.

정의부 성립 후, 이광민은 민사부 서무과 주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가 맡은 서무과는 입법기관인 중앙의회 의원을 선거하는 업무와 지방자치를 시행해 이를 운영하는 업무를 주관했고, 관할 지역 내의 이주한인의 가가호호를 조사해 호적을 작성하고, 그를 토대로 독립군요원을 징병하는 업무도 시행했다. 또, 남만주 지역의 각 한인사회에 지방 행정 조직망을 갖추고 거기에 소속된 한인들이 삶을 안전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러던 1925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인 오영선과 내무총장 이유필이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정의부 중앙 간부들을 만나 임시정부가 상당히 어려운 처지이므로 정의부 측이 임시정부의 최고책임자를 추천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정의부 간부들은 중앙행정위원회에서 논의한 뒤 중앙의회에 안을 상정하여 파견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임시정부 최고 책임자로 이상룡을 추천하기로 결의했다.

이상룡은 이 소식을 듣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독립운동 세력의 최고 기관인 임시정부가 혼란스러우면 일제만 좋은 꼴이 될 테니 자기가 가서 수습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그는 조카 이광민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고, 이광민은 기꺼이 따르겠다고 답했다. 이리하여 이상룡과 이광민은 1925년 8월 하순 상하이로 떠났다. 이후 이광민은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 된 이상룡을 보필하다가 이상룡이 임시 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하고 1926년 2월에 만주로 돌아갔을 때 따라갔다.

만주로 돌아온 이광민은 새로 개편된 정의부 조직령에 의해 재무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정의부의 재원 마련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1927년 초 안창호, 홍진 등이 주도한 민족유일당운동이 만주에도 확산되자, 이광민은 여기에 적극 참여했고 1927년 4월 15일 길림현 신안둔에서 개최된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대회에 김동삼, 오동진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후 이광민은 1년 넘게 이 운동에 열렬히 참여했지만, 각 정파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지 않아 통합에 애를 먹었고, 결국 전민족유일당촉성회와 전민족유일당협의회 등 두 파로 나뉘었다.

촉성회는 독립운동계를 통합시킬 유일당에는 지금까지 가담했던 단체를 완전히 버리고 구성원 하나하나가 개인의 자격으로 유일당에 가담하자고 주장했지만, 협의회는 현재의 단체를 귿대로 존속시키고 단체와 단체가 통합하자고 주장했다. 이광민은 이런 상황에서도 의견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 정의부는 협의회를 지지했지만, 이광민은 정의부의 논리가 옳지 않다고 판단해 흑룡강성에 본부를 둔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가 되어 촉성회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정의부에서 입지가 좁아졌고 결국 재무위원장을 사임해야 했다.

이 무렵, 이광민은 백부 이상룡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길림성 서란현 소고전자에 은둔 중이던 백부에게 달려갔다. 이상룡은 며칠간 치료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32년 5월 12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상룡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아들이자 이광민의 사촌형인 이준형과 가솔들에게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준형과 이광민 등은 유언대로 소고전자에 가묘를 만들어 이상룡의 유해를 모셨다.

이상룡이 사망한 뒤, 이광민의 일가 대부분은 국내로 귀국했지만, 이광민은 만주에 남아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단행한 뒤 위세를 떨치자, 그는 1938년에 하얼빈의 동취원창에 토지를 구입해 가족묘를 조성하고 이상룡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했다. 이후 그는 독립의 때를 기다렸고 1945년 8월에 일제가 항복하면서 마침내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무렵 그는 중병에 걸렸고 조국이 해방된 지 2달 후인 1945년 10월 18일에 하얼빈에서 사망했다. 향년 50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광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