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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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顯振. 호는 우산(右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2년 9월 20일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윤홍석은 동래 출신 만석꾼이었고, 큰형인 윤현태는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주주로 활동했다. 그는 이렇듯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15살 때인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현재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또한 1908년 엄정자와 결혼했으며, 1909년 중국으로 가 상하이와 베이징을 둘러보며 외국의 저명한 정치가와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났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간 그는 도쿄에서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에 가담해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1915년 봄 김철수, 장덕수, 정노식, 김철수(金喆壽), 전익지(全翼之) 등과 함께 도쿄 인근의 다마천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시는 열지동맹(裂指同盟)을 맺었다. 열지동맹원들은 앞으로 상하이,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상호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다.

윤현진은 1916년 열지동맹원들과 조선인 유학생 최익준, 하상연, 김명식(金明植), 김양수(金良洙), 중국인 유학생 황췌, 뤄훠(羅豁), 덩시민(鄧潔民), 셰푸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펑화룽(彭華榮) 등과 함께 “아세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자”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을 조직했다. 신아동맹당은 일본제국주의 타도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같은 처지로 제국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인도와 베트남 출신 재일유학생들을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16년 6월 11일 선생은 김효석과 함께 메이지대학 졸업생회에서 ‘장래 조선동포를 위해 결사적으로 활동할 것’, ‘임관(任官)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후 그는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3년간 양산, 부산, 구포 등지에서 경제적 활동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담했으며, 교육운동도 병행했다. 또한 서상일, 이호연, 윤병호, 이수영, 윤상태, 최완, 이우식 등과 함께 백산상회에 관여했다. 그는 큰형 윤현태와 함께 1919년 11월 백산 안희제가 중심이 돼 부산 및 인근지역 유지들이 우수한 청년들을 국외로 유학시킬 목적으로 설립했던 기미육영회의 발기인으로도 참가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던 그는 경남은행에 사직서를 제출한 뒤 3월 21일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독립임시사무소 구성원으로 활동했고, 1919년 4월 13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7개 위원회 중 신익희 이외 8명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정됐다. 이후 그는 9월 18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각 도를 대표하는 도별위원 중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0년 1월 김구, 손정도, 김철 등과 함께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했으며, 1920년 2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기 위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주식을 모집할 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9년 9월 11일 재무총장 이시영과 함께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1921년 2월 22일까지 역임했다. 1920년 5월 14일, 윤현진은 이승만 대통령불신임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총사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국무원 연석회의에서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부를 해산할 것을 포함한 4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안창호는 만약 차장들이 주장하는 대로 된다면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차장내각책임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윤현진과 내무차장 이규홍(李圭洪)은 안창호가 제시한 ‘차장내각책임제’를 채택하게 된다면 마치 차장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을 도모한 것으로 내비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거절했다. 결국 윤현진을 비롯한 차장들은 1920년 6월 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불신임안과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설득과 주변의 만류로 사직서는 취소되고 5개월 동안 끌어온 상해 임시정부 개혁 논의는 중단됐다.

이후 1921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존속시키되 개혁을 진행하자는 개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임시정부의 역량이 약화되자, 그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1921년 9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윤현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유해는 1995년 오영선, 양기하, 차도선, 천보락, 정한경과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