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용 사건

윤필용 사건(尹必鏞 事件)은 1973년 4월,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이 사석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으로 인해 윤필용 및 그와 관련된 다수의 장교들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처벌받은 사건이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윤필용박정희의 심복으로 오랜 시간 박정희를 곁에서 보좌하면서 명실상부한 박정희의 오른팔이라는 세간의 평을 받을만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집권한 후 그를 따르던 많은 군부 출신 인물들은 전역하여 정치인으로서 정권에 기여하게 되었지만, 윤필용은 사건이 발생하던 당시까지도 현역 군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수도경비사령관이라는 요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박정희는 윤필용에게 군부 인사에 관한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고, 윤필용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듯 군인 신분을 뛰어넘어 정재계 인사들과 넓은 인맥을 쌓는 등 군부 권력의 실세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윤필용이 1973년 4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 내용중에 박정희 대통령은 나이를 먹을만큼 먹어[1] 노쇠하였으므로, 당연히 형님(이후락)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 대화내용이 유출되어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는 발칵 뒤집혔고,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였다.

처벌[편집 | 원본 편집]

윤필용에 대한 쿠데타 모의를 수사했으나 끝내 이렇다 할 결정적인 물증이 나오지 않아 쿠데타 모의는 입증되지 못했고, 대신 업무상횡령 및 수뢰 등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가지 죄목을 적용하여 군사재판에 넘겼다. 이 사건에 연루된 고위급 장교는 윤필용 수경사령관을 비롯하여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육군본부 진급인사실 김성배 준장 등 장성 3명, 육본 진급인사실 실무장교 신재기 대령 등 장교 10명에게 각각 1~15년 사이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에게는 징역 15년에 벌금과 추징금 약 2,600만원이 선고되었다.

직접적으로 군법에 연루된 13명의 장교 외에도 윤필용과 가까운 장교 30여명이 군복을 벗어야 했으며, 이후락과 연관된 중앙정보부 울산사단 30여명도 구속되거나 면직당해 쫓겨났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필용을 후원하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실체가 밝혀졌다.

파워게임[편집 | 원본 편집]

실상 이 사건의 핵심은 박정희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2인자들을 상호 견제토록 하면서 충성을 바치게 만드는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이 전략에 윤필용과 이후락이 보기좋게 걸려든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2인자로는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수경사령관 윤필용, 보안사령관 강창성 등이 포진해 있었는데, 특히 윤필용은 오랜 박정희의 심복으로 사실상 군부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실세였기 때문에 나머지 2인자들의 견제와 감시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사석에서 윤필용이 내뱉은 언사는 그를 견제하던 세력에 의해 감청 내지는 동향보고와 같은 방법으로 유출이 되었을 것이고, 윤필용과 권력다툼을 하던 세력이 이를 박정희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며, 윤필용과 이후락의 대화 자체는 사석에서 별 생각없이 나눴기 때문에 이를 법적으로 문제를 삼을 정도까지는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박정희가 2인자들을 상호 경쟁시키는 전략에서 윤필용은 본보기로 걸려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건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윤필용은 처벌을 받고 권력과 명예를 모두 박탈당해 중앙 정치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되었다. 윤필용을 후원하던 하나회도 위기를 맞긴 했지만 하나회의 주축 멤버였던 전두환은 이전부터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위치에 있었으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회를 장악하여 그의 기반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윤필용과 대화를 나눴던 이후락은 박정희의 눈 밖에 날까봐 전전긍긍하였고, 어떻게든 박정희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두게 되었는데 그 사건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박정희와 대립각을 세우던 정치인을 조용히 납치하여 수장할 계획이었고, 특히 박정희에게 사전 보고도 하지 않고 이후락의 독단적인 판단하에 자국도 아닌 일본에서 공작원들을 동원하여 납치를 감행하였기 때문에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자 일본측의 반발이 이어졌고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박정희 정권은 이를 진화하는데 진땀을 빼야 했다.

각주

  1. 당시 박정희의 연령은 50대 중반으로, 현재 기준으로는 정정하게 활동할 나이이나 당시 대한민국 남성 평균수명 및 의학수준을 따져보면 노인 취급을 당하는 나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