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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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鎭成.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9년 1월 29일 경상북도 금릉군 대덕면 관기리(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관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에 입교한 뒤 1911년 김천군 지례면에 있는 파천교회 조사(助事)로 활동하였다. 1916년경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던 중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예수교회의 조사(助事)로 활동하였다.

1919년 당시 대가면 목화동교회의조사로 일하던 그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인근의 각 교회와 연락을 취했다. 그러던 중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송우근(宋祐根)·장석영·송훈익·김희규(金熙奎)·송준필·이봉희(李鳳熙)·송회근·송문근·송인집·송규선·송천흠 등 군내의 유력한 유림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알고, 유림측의 송회근과 만나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그에게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2일 오후 1시경, 그는 계획대로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서 기독교도들과 함께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중이던 유림들을 중심으로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도중 일제의 발포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나, 그는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에도 그는 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등사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이듬해 8월 의성군 비봉리 교회의 김충한(金忠漢) 목사에게 독립신문을 전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 성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1]

출옥 후 유진성은 다시 평양신학교에 등록하여 1926년 졸업을 했다. 이후 유진성은 김천 지역의 복전교회·봉계교회·제석교회·송천교회와 대구 반야월교회 등에서 목사로 시무하는 한편, 3·1운동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던 김천 지역 청년 운동에 참여하여 1928년 김천YMCA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포교활동을 수행하다 1949년 4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유진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디지털김천문화대전[1]
  • 독립유공자 공훈록[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