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악

柳重岳. 자는 백현(伯賢), 호는 항와(恒窩).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43년 11월 12일 강원도 춘천도호부남산외일작면 가정리(현재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유호(柳晧)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김평묵(金平默)도 스승으로 섬겼고, 집안 형인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업하기도 하였다. 조카인 유인석과 동문으로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속하였다.

화서학파 내부에서 심설논쟁(心說論爭)이 일어나 김평묵 계열과 유중교 계열이 대립하였을 때, 유중교를 옹호하였다. 40대 전반까지도 유중교의 문하에서 사서(四書)와 가례(家禮)에 관해 스승이 제시한 문제에 대답을 작성하고, 또 평가를 받는 진지한 학구적 자세를 보여줬다. 또, 이근원(李根元)·유인석과 함께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 이근원과 함께 '복궐소(伏闕疏)'를 올려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했다. 1877년에는 '왜양변(倭洋辨)'을 지어 척사를 주장하였다. 1881년에는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만인소(萬人疏)를 지어 강력히 저항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그는 지평 용문산 아래에서 유홍석(柳弘錫)·이근원(李根元)·이소응 등과 같이 회동하여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896년 1월 이소응과 함께 수천 명의 의병을 소모하여 의암(衣岩)에 의병소를 두고 의암·진부산(陣缶山)에서 관군과 접전하였다.

먼저 유사 조인승(曺寅承)을 잡아 주살하고 춘천 창의포고문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3백 냥씩을 추렴하고 각지의 의병들과 연락하여 연합전선을 구상하였으나 2월에 이춘영(李春永)이 전사한 후 각기 흩어져 산진(散陣)하였다. 이후 고종이 의병 해산 조칙을 내리자 의병대를 해산시키고 자택에 귀가했다. 이후 “의리에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의 명령이라도 구차스럽게 따를 수 없다.”며, 변복령이나 황제의 칭호, 광무(光武) 연호 등을 거부하였다.

1907년 7월 춘성군 가정리 여의내골 주산에서 의병을 재차 일으키기로 하고 유홍석과 함께 의병 600여 명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군자금이 없고 탄환이 부족하자, 유중악은 자진하여 농우(農牛) 한 필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고 의연금을 모아 탄약제조를 지원하였다. 이후 가평 주길리(珠吉里)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전하였고, 결국 의병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자택에 은거하였고 1909년 5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유중악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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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