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규 (18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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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相奎. 호는 태허(太虛).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유상우의 동생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7년 11월 10일 평안북도 강계군 동부리에서 아버지 강릉 유씨 유영성(劉泳星)과 어머니 신씨 사이에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유신진(劉信鎭)은 강계에서 이름난 한의사로, 상인 조직인 상무회(商務會)의 회장을 맡는 등 지역의 유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부친 유영성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지만 특별한 직업이나 사회활동을 한 기록은 없다. 또한 형 유상우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의 강계군 참사와 교통국 조사원을 지냈으며, 동생 유상하(劉相夏)는 배재중학교와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뒤 조선건축기술단 상무를 역임하였다.

유상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고, 1908년 강계군에 소재한 기독교계 학교인 명신소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한 후 경성으로 상경했다. 이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해 1916년 3월 제11회로 졸업했다. 이후 그해 4월 백인제, 이미륵 등과 함께 경성의학전문학교 제 1기생으로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사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유상규는 4학년 진급을 한 달 앞두고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경찰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학업을 중단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있는 유력 재산가, 학교 및 종교계 등을 조사하여 독립운동의 자료로 삼기 위해 조직한 임정조사원의 평북 강계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0년 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던 안창호의 비서로 발탁되었고, 흥사단 원동지부에 가입한 뒤[1] 유기준을 설득해 흥사단에 가입시키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1920년 12월 29일과 30일 이틀 동안 열린 흥사단 제 7회 원동대회에서 대회 준비위원과 설비위원을 맡았으며, 1922년 4월 15일 상해에서 열린 81회 강연회에서 ‘사회주의’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강연의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사회주의에 대한 흥사단의 개방된 입장과 고조되고 있던 상해지역에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22년 7월 20일 흥사단 원동임시위원회 부위원장 안창호의 재학단우 상황조사 보고에 의하면, 유상규는 한벽례학교 상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흥사단은 단원들의 일상생활에 대해 정기적으로 구체적인 점검을 하였는데, 흥사단 제8회 대회 당시 단우상황일람표에 유상규의 직업은 학업, 의무는 정근, 동맹 총액수(기부금)는 1800원, 독서는 5시간으로 기입되어 있다. 그리고 1923년 제10회 대회, 원동단우상황의 단우 이동란에 유상규는 도일(渡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상규가 1926년 5월 1부터 <동광> 잡지에 연 7회에 걸쳐 연재한 글 '방랑의 일편'에는 그가 1923년경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유상규는 1923년 6월 24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한 뒤 7월에 오사카로 이동하여 1924년 1월까지 그곳에서 최하층 조선인 노동자로서 체험했다고 한다. 반년 후 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려 했지만 1924년 1월 15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2일간 조사받다가 석방되었다. 석방된 즉시 귀국선을 타고 1924년 2월 6일에 귀국했다. 그가 어째서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을 중단하고 일본에서 노동자로서 생활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귀국 후 1년간 휴식을 취한 유상규는 1925년 4월 13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했다. 이후 2년간 수학하여 1927년 3월 23일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고, 곧바로 조선총독부의원 의과 부수(副手)로 임명되었었다. 1927년 6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의사면허증(808호)을 받았다. 이어서 1928년 4월 백인제 강사가 재직하고 있던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임명되었다. 1932년에는 강사로 진급하여 193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을 지켰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교실에서 오자와(大澤勝) 교수 지도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다.

한편 1926년 4월 4일 이광수의 집에서 조병옥, 김종혜(金鐘惠), 이윤재, 박현환(朴賢煥), 정인과(鄭仁果), 김성업(金性業), 김동원(金東元), 노기정(魯基楨), 김창세(金昌世), 김태진(金兌鎭)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의 주의강령을 내외에 선전하고 조직의 확대강화를 위하여 월간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에 따라 같은 해 5월 창간호가 출간되었다.

1930년 2월에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유상규는 1932년까지 수양동우회 심사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6일에는 ‘동광사’ 이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1931년 8월 17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제1회 하기 수양대회에서는 1932년까지 기한이 정해졌던 유상규의 심사원 임기를 1934년까지로 연장했다. 1932년 1월 2일 정기 이사회에서는 경성지방 사업설계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며칠 뒤인 29일에는 평양지회 위원 겸 수석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유상규는 1930년 조선의사협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창립대회에서 유상규는 준비위원으로서 사회를 맡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하였다. 그 뒤 유상규는 서무부 간사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그리고 조선우생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통속의학강연회의 연사로도 여러 차례 나서는 등 의사로서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이밖에도 유상규가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글은 27편에 달했다.

1936년 박사학위 논문 <약리학적 입장에서 관찰한 Rentogen선 작용에 관한 일고찰에 관하야>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제출해 심사 통과를 앞두었고, 백인제의 권유를 받아들여 우에무라 병원을 인수하여 병원장으로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려 했다. 그러나 1936년 7월 18일 단독(丹毒)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39세. 장례식은 1936년 7월 20일 안창호의 주관하에 경성의학전문학교장으로 거행되었고, 8.15 광복망우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유상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식민시대 지식인, 유상규의 삶의 궤적, 최규진, 황상익, 김수연, 대한의사학회, 2009.[1]

각주

  1. 단우 번호는 116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