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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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得信. 이명은 홍익수(洪益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2월 7일 한성부 서대문 대연정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홍익수(洪益洙)이다. 그는 1911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기독교 전도와 교회 부속학교인 송광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간도로 건너가 유하현 고산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수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20년 동창인 이현로와 함께 전도대를 조직하여 익산·마산·대구·서울·선천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와 강연회를 통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해 10월 서울 동대문밖 거주 암살단을 이끌던 김상옥에게 서면으로 연락하여 왕십리에 거주하는 목사 김태현(金泰鉉)의 집에서 면회하고 암살단에 가입하였다.

이어 김상옥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3발을 받아 수일후 엄준(嚴俊)을 방문, 군자금을 조달하여 상하이로 망명하고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하여 엄 준의 찬동을 얻어 엄 준과 같이 동년 10월 10일 오후 1시경 고양군 한지면에 거주하는 경기도 평의원 임원상(林原相)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20원을 징수하여 김상옥에게 교부하였다. 동년 10월 30일 고양군 이만응(李晩應) 집에 들어가 1천원의 군자금을 낼 것을 요구하여 206원 50전을 징수하여 임시정부 특파원 홍준(洪俊)에게 수교하였다.

그는 1921년 서울의 변호사 정구창(鄭求昌)에게 5천원을 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김영두(金永斗) 집에 잠입하여 200원의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 서울에 있는 이범열(李範烈)에게 군자금 2천원을 내라는 권고문을 발송하고 양주군(楊州郡) 거주 송신묵(宋信默)으로부터 군자금 20원을 징수하고 양주군 노해면(蘆海面)의 김만원(金萬源) 등 서울 시내외를 중심으로 연 7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1921년 1월 11일 서울 예지동에 거주하는 김노성(金魯聖)·김영두(金永斗)가 이서(裏書)로 쓴 소절수백원권을 발견한 일제 경찰은 이를 단서로 삼고 1월 16일 오후 7시경 태풍잡화점(泰豊雜貨店) 부근에서 엄준이 체포했다. 그 뒤 유득신도 이튿날 오후 1시 반경 남대문 세브란스 병원내 김경배(金敬培) 집에서 붙잡혔으며 소지하고 권총 1정, 탄환 1발, 폭탄 12개도 압수당하였다.

붙잡힌 후 동대문경찰서에 구속되었던 그는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1] 당시 판결문에는 "암살단의 간부 김상옥의 교사에 의해 권총, 탄환 및 폭탄으로 부호를 협박 공갈하여 금원을 제공 받아 조선독립운동 자금으로 위 김상옥의 이름으로 임시정부에 제공하고 자신들도 동 정부에 투신 다수 공동으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김태현, 김상옥, 홍순 등과 활동하며 안녕질서를 방해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9년 3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가출옥 후 평양 남산교회당에 모인 미 감리교 연회에서 파송을 받아 목회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6년 광복 이듬해 귀국하여 인공 치하였던 철원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 등에서도 목회 활동에 전념하면서 암암리에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반공 계몽 사업에 주력하였다. 1950년 1월 국군 북진 시 철원 지역이 일시 수복되면서 행정의 마비와 사회 혼란기를 맞자 전시대책위원회와 치안대를 구성하여 1개월 남짓 읍내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51년 3월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유득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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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