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이운재

수원삼성 시절

2002 한일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호아킨의 승부차기를 막아낸 뒤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이자 구단 지정 공식 레전드 중 한명

수원 소속 최다 출전 선수이자 수원의 전성기를 함께해왔던 골키퍼

하지만 은퇴 이후의 행보로 인해 수원팬들의 지지가 흔들리고 있다

프로필[원본 편집]

  • 이   름: 이운재
  • 출생일: 1973년 4월 26일
  • 국   적: 대한민국
  • 출신지: 충청북도 청주시
  • 키: 182cm
  • 포지션: 골키퍼
  • 학   력: 청남초 → 대성중 → 청주대성고 → 경희대
  • 소속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1996 ~ 2010), 상무 축구단(2000 ~ 2002, 군복무 임대) → 전남 드래곤즈(2011 ~ 2012)
  • 코칭스태프 경력: 한국 국가대표팀 U-23 골키퍼 코치(2013 ~ 2016) → 한국 국가대표팀 골키퍼 코치(2016  ~  2016.6) 1  → 수원 삼성 블루윙즈 골키퍼 코치(2017 ~ 2018) → 중국 국가대표팀 U-25 골키퍼 코치(2019) → 매북 골키퍼 코치(2021~)
  • 국가대표 기록: 133경기 출전

클럽 경력[원본 편집]

=== 유소년 시절 & 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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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청남초, 대성중, 대성고를 거쳐 경희대를 졸업하였다. 청남초 시절에는 육상 선수로 활약하며 소년체전에서 기록을 세울 정도로 활약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축구의 길을 택했다. 대성중 시절까지 필드 플레이어로 뛰다가 대성고 시절, 팀 사정상 골키퍼를 맡은 것이 그의 골키퍼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경희대에 진학한 뒤에도 이운재는 골키퍼 유망주로서 많이 알려진 상황이었고, 덕분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축구 대표팀으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주전은 아니었기에 올림픽 무대에 출전하지는 못하였다. 올림픽 뒤에도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김호의 눈에 들어 대학시절부터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대표팀 발탁이 독이 되었던 걸까, 미국 월드컵 이후 이운재는 자만심에 빠져 자기관리를 게을리하기 시작하였고, 이 때 체중이 불어버리는 바람에 그 해 10월 열렸던 히로시아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대표팀 엔트리에는 탈락해버렸다. 이와 관련해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당시 대표팀 감독2 이었던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3 이 이운재의 아시안게임 엔트리 탈락 이후 그를 찾아와 체중 감량에 성공하면 대표팀에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운재는 살인적인 다이어트를 감행하게 되고, 덕분에 체중 감량에는 성공하였지만 무리한 다이어트의 부작용으로 폐결핵 3기 진단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향후 2년 동안 그는 치료를 위해 운동에 온전히 전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원본 편집]

프로 데뷔 이전에 국가대표로 뽑혔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던 이운재는 1996년 이미 대표팀 시절에 연이 있었던 김호의 선택을 받아 창단 팀 우선지명으로 입단해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드디어 프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그의 앞길은 창창할 것만 같았지만,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상치 못한 간염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4  폐결핵이 완치된지 얼마 안되었던 상황에서의 간염은 이운재에게 큰 타격일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그는 프로데뷔시즌이었던 1996시즌과 1997시즌에는 역시 수원의 창단멤버이자 청주대성고 선배인 골키퍼 박철우와 번갈아가며 출전하여 각각 12경기와 7경기밖에 나오지 못하였다.

하지만 기나긴 치료 끝에 이운재는 2년만에 간염을 치료할 수 있었고, 덕분에 1998시즌부터는 온전히 축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당 시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주전 골리로 나서며 18경기에 출전, 수원의 사상 첫 리그 우승에 공헌하게 된다. 이어진 1999시즌에도 총 27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2시즌 연속 리그 우승과 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5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5월 16일에 펼쳐진 천안 일화와의 대한화재컵 4강전에서는 승부차기를 막아내며 팀의 결승 진출에 큰 역할을 하였다.당시 경기를 보도했던 MBC뉴스 영상

이와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1999 K리그 시즌 베스트일레븐에도 선정되며 자신의 생애 첫 베스트일레븐 선정이라는 영광도 안게 된다. 당시 그와 같이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된 수원 선수로는 샤샤, 서정원, 고종수, 데니스, 신홍기도 있었다.

이렇게 수원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라 불리는 99시즌을 보낸 이후, 이운재는 군입대를 하여 2000년부터는 상무 축구단 소속으로 경기를 나서게 된다. 당시 상무는 실업리그 소속이었으므로 이운재는 군복무 기간동안 프로무대를 밟지 못하였다. 그는 2002년 3월 4일 전역하였지만, 전역하자마자 한일월드컵 대표팀 합숙훈련에 참가해야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수원 선수로 복귀한 것은 한일월드컵 이후 2002시즌 중반부터였다.6 

한일월드컵 이후 전국구 스타가 되어 수원에 복귀한 이운재는 2002 시즌 중반부터 수원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변함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FA컵 우승을 경험하였다. 해당 시즌에는 총 23경기에 출전하였고 서정원과 함께 시즌 베스트일레븐에도 선정되었다. 뒤이은 2003 시즌에도 부동의 주전 골리로 나서며 총 42경기에 출전하였다.

차범근 체재로 바뀐 2004 시즌에도 차범근 감독의 신뢰를 받으며 경기에 출전하였다. 시즌 중간에 김대환7 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잠시 주전자리가 위태로워보이는가 싶었지만, 이내 다시 수원의 골문에 복귀하여 총 23경기에 출전하였다.

특히 12월 12일에 치러진 포항과의 챔피언 결정전 2차전 승부차기에서 포항의 5번째 키커로 나선 김병지8 의 슛을 막아냄으로써 수원에게 5시즌만의 리그 우승, 그리고 차범근에게 첫 리그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특히 김병지의 슛을 막아낸 뒤 야수처럼 포효하던 이운재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수원팬들의 머릿속에 강렬히 남아있는 장면.

이와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이운재는 2004 K리그 시즌 베스트일레븐에도 들게 된다. 참고로 해당 시즌 베스트일레븐에 들었던 수원 선수로는 나드손김두현, 김대의, 무사, 곽희주까지 하여 이운재 포함 총 6명이나 되었다.

2005 시즌을 앞둔 2005년 1월 수원삼성 1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이 뽑은 수원 역대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해당 시즌에도 26경기에 출전하며 안정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2006시즌에 위기가 찾아오는데, 이 때 이운재는 잔부상과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국대에 자주 차출되면서 수원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이 틈을 타고 서브 키퍼였던 박호진9 이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게 된다. 결국 이운재는 06시즌에 14경기 출전에 그쳤고, 이에 반해 박호진은 2006 K리그 시즌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수원의 수문장 세대교체가 발생하는 듯 하였지만, 박호진이 다음시즌인 2007시즌에 귀신같이 부진에 빠져버리는 덕분에 다시 주전으로 복귀하여 해당 시즌 총 26경기에 출전하였다.

비 온 뒤에 땅에 굳어진다더니, 이렇게 한 차례 위기를 넘긴 이운재는 자신의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 있는 2008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08시즌의 이운재는 그야말로 야신 모드 그 자체였다. 물론 일차적으론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최고의 폼을 보여줬던 조원희, 그리고 이정수, 곽희주, 마토 등의 수비진이 수원의 뒤를 든든히 지켜준 것도 있었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한국나이로 36살이었던 이운재의 회춘은 수원의 짠물수비에 큰 보템이 되었다. 그는 해당 시즌에 총 28경기에 나오며 자신의 젊은 시절 못지 않은 폼을 과시하였고 이는 수원의 4시즌만의 리그 우승, 그리고 리그컵 우승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10월 8일에 열린 포항과의 리그컵 4강전 승부차기에서는 포항의 3, 4, 5번째 키커였던 황지수, 김기동, 스테보의 슛을 세번 연속으로 막아냄으로써 팀의 리그컵 결승 진출의 일등공신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스테보가 대범하게 시도한 파넨카킥을 이운재가 간단히 잡아낸 뒤 그에게 메롱을 시전하며 약올리는 모습이 압권. 해당 경기를 보도했던 MBC뉴스 영상클립 이와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이운재는 2008 K리그 시즌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어 자신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베스트일레븐에 들었고, 거기에다 해당 시즌 MVP에까지 선정되었다. 골키퍼가 K리그 시즌 MVP에 선정된 것은 현재까지도 이 때가 유일무이한 케이스.

-이운재를 제외한 나머지 08시즌 베스트일레븐-

시즌 MVP의 기세를 몰아 이운재는 2009 시즌에도 변함없이 수원의 골대를 지키며 총 35경기에 출전하였다. 다만 해당 시즌은 수원이 전 시즌과 달리 부진을 겪은 시즌이었고, 이에 따라 당시 주장이었던 곽희주가 부진에 따른 부담감으로 주장직을 포기하여 시즌 중반부터 이운재가 주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그가 수원에서 뛴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수행한 주장직이었다. 해당 시즌 수원은 리그에서는 부진하며 10위를 기록하였지만, FA컵에서는 분전하여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성남 일화와의 FA컵 결승전은 11월 8일에 열렸는데, 전반에 라돈치치에게 실점하며 끌려가던 수원은 후반 막판에 티아고가 얻어낸 페널티킥을 녹두가 성공시켜 1대1을 만들었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이 승부차기에서 이운재는 성남의 3, 4번째 키커의 슛을 막아내며 자신이 승부차기 최강자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고, 덕분에 수원은 FA컵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운재는 2010시즌 갑작스러운 부진에 빠지게 된다. 특히 4월 4일 열렸던 슈퍼매치에서 북패의 두번째 골과 세번째 골 장면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 팀의 1대3 패배의 제일 큰 원인 제공자로 비판을 받았다.10  이 뒤에도 이운재는 그답지 않게 계속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 중반에 윤성효 체재로 바뀐 이후로는 당시 프로 데뷔 시즌을 보내고 있던 신인 하강진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된다. 시즌 중반부터 벤치에 앉게 된 이운재는 해당 시즌에 총 21경기를 나오기는 했지만 이 중 리그경기는 12경기에 불과했고, 이 12경기에 출전하면서 무려 22실점을 내주는 부진을 겪었다. 그 동안 리그경기 수와 실점 수가 엇비슷하거나 오히려 실점 수가 더 적었던 그였기에 더 충격적이었던 스탯. 시즌이 끝난 뒤 구단 측은 그에게 코치직을 제안하였지만, 현역을 이어가고자하는 의지가 강했던 이운재는 이를 거절하였고 결국 전남으로 이적하여 그의 15년 수원 커리어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의 수원 경기 총 출전 횟수는 390경기에 달하며, 이는 현재까지도 수원 소속 최다 출전 기록으로 남아있다.

2015년 수원 삼성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이 뽑은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이와 동시에 발표된 구단 선정 공식 레전드로도 뽑히며 명실상부 수원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인정받았었다.

전남 드래곤즈 시절, 그리고 은퇴[원본 편집]

2011시즌 전남으로 이적하여 선수로서의 마지막 황혼기를 보냈다. 전남으로 이적하는데에는 한일월드컵 때 대표팀 코치였던 정해성 당시 전남 감독과의 연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남에 가자마자 주장으로 임명된 이운재는 지난 시즌의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회춘을 시전하였고, 해당 시즌 총 30경기에 출전하며 자신의 감을 되찾는데에 성공하였다. 참고로 11시즌 전남의 총 실점은 29실점이었는데, 이는 울산과 함께 해당 시즌 리그 최소실점 기록이었다.

선수로서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2시즌에도 주장완장을 차고 총 33경기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12시즌 도중 부임한 하석주의 다음 시즌 리빌딩에 이운재는 포함되지 않았고,11  현역 연장과 은퇴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한국나이 40살에 현역 은퇴를 발표하였다. 그의 K리그 통산 총 경기 수는 410경기, 그리고 이 중 클린시트 경기는 140경기12 에 달한다. 이렇게 이운재는 17년동안 차왔던 글러브를 내려놓으며 긴 현역 생활을 마치게 된다.

국가대표 경력[원본 편집]

-2002 한일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호아킨의 승부차기를 막아내는 이운재-

맨 위에 서술했다시피 경희대 시절부터 김호의 부름을 받아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전을 통해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뤘다. 다만 이 경기는 2진급간의 경기라 하여 피파에서는 A매치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대한축구협회 기록으로는 A매치에 포함되어있다. 피파 기록으로는 그해 6월 11일에 열린 온두라스와의 평가전이 이운재의 국가대표 데뷔전이다. 그는 1994 미국 월드컵의 엔트리에도 들며 생애 첫 월드컵 발탁이라는 기쁨도 맛보게 된다. 다만 당시의 이운재는 프로 데뷔도 안한 한국나이 22살의 유망주였기에 당연히 주전은 아니었고, 당시 대표팀 주전 골리는 팀의 주장이자 백전노장이었던 최인영이었다.13  때문에 이운재는 조별예선경기 1, 2차전인 스페인전과 볼리비아전에는 나서지 못하였다. 하지만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독일전에서 최인영이 컨디션 난조를 보이자 후반전에 이운재가 교체투입되며 그의 생애 첫 월드컵 경기를 치루게 되었다. 후반동안 이운재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더 이상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고, 한국도 후반에 황선홍과 홍명보가 골을 넣으며 분전했으나 결국 2대3으로 패배하여 16강 진출에는 실패하게 된다. 참고로 이 경기에는 훗날 이운재의 수원 팀 동료가 되는 신홍기와 서정원도 뛰었고, 독일 벤치에는 8년 뒤 이운재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는 올리버 칸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운재는 미국월드컵 이후 위에서 서술한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한동안 대표팀에 들지 못하였고, 체중 조절에 성공한 1년 뒤인 1995년에서야 다시 대표팀의 부름을 받게 된다. 하지만 1996년에 걸린 간염으로 인해 수원의 경기에도 많이 나서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대표팀과 멀어졌고, 이 때부터 안 그래도 이운재와의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김병지가 주전 자리를 확고히 하여 결국 1998년 프랑스월드컵 엔트리에는 탈락하게 된다. 하지만 이운재는 간염이 완치된 후 수원의 주전 키퍼로 나서며 지속적으로 폼을 끌어올렸고, 결국 1999년부터는 다시 대표팀에 콜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0년 10월에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김병지를 대신하여 대표팀 주전 키퍼로 활약하며 한국의 3위 성적에 기여하였다.14 

이후 이운재는 2001년부터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히딩크를 만나게 되고, 히딩크 밑에서도 김병지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이어나간다.15 히딩크호는 2002년 1월에서 2월에 개최되었던 북중미 골드컵에도 참가하였는데,16  이운재는 1월 27일 멕시코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멕시코의 3, 4번째 키커의 슛을 막아냄으로써 한국을 준결승으로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의 세번째 키커로는 최성용이 나와 골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이운재는 그 뒤 자신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준 2002 한일월드컵을 맞이하게 된다. 김병지와의 긴 주전 경쟁 끝에 월드컵 본선에 주전 키퍼로 나서게 된 이운재는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전 경기를 출전하였고, 대표팀의 골문을 든든히 지켜주며 한일월드컵 4강 신화에 크게 일조하였다. 특히 6월 22일에 열린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는 경기 내내 골문을 틀어막으며 무실점으로 경기를 이끌었고,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4번째 키커로 나선 호아킨의 슛을 막아내어 한국을 4강으로 인도하였다. 이 장면은 아직까지도 당시를 경험하였던 국민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중 하나로, 이 경기를 계기로 이운재는 대표팀의 수호신 이미지가 굳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활약 덕분에 이운재는 스페인전 MOM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스페인전 승부차기 영상-

이 뒤 한국은 4강전에서 독일을 만나 분전했으나 0대1로 패하였고 3, 4위전 상대였던 터키에게도 2대3으로 패하여 현재까지 한국의 월드컵 최고 성적인 4위로 대회를 마감하였다. 대회가 진행되면서 이운재에게 월드컵 최고의 키퍼에게 주는 야신상17  수상 가능성도 언급되었으나 야신상은 독일의 준우승을 이끈 올리버 칸에게 주어졌다.18  -4강전이 끝난 뒤 유니폼 교환을 하는 이운재와 칸-

한일월드컵 뒤 이운재는 언론과 국민들로부터 '거미손'이라 불리며 수많은 찬사를 받게 된다. 그는 이후로도 국대 주전 키퍼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2004년 아시안컵에서는 주장 완장까지 차고 한국의 골문을 지켰다.19  아시안컵 뒤에는 한국축구 최고의 미스터리라 불리는 2004년 12월 19일 독일전에도 나섰는데, 이 경기에서 그는 전반에 발락에게 프리킥 골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인상적인 선방을 몇 차례 선보였고 특히 후반에는 발락의 페널티킥을 선방하여 한국의 3대1 놀라운 승리에 기여하였다. 한국이 가뿐히 앞서나가자 본프레레 당시 대표팀 감독은 후반에 이운재와 김영광을 교체하며 강적 독일을 상대로 여유(?)를 부리기도 하였다.20 이 경기 덕분에 한국은 독일을 꺾은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을 두번이나 꺾은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그였으나 2006년에는 잔부상을 자주 입어 폼이 일시적으로 저하되었다. 이 때문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수원에서도 박호진에게 주전자리를 위협받던 상황이었고, 국대에서도 이운재답지 않게 안정감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그 동안 국대와 거리가 멀었던 김병지를 다시 뽑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게 된다. 당시 이운재는 이러한 의견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고, 김병지도 이에 대응하여 월드컵 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는 등 현역 내내 라이벌이었던 둘의 관계에 불이 붙게 된다.  관련 기사

하지만 아드보카트 당시 대표팀 감독의 선택은 결국 이운재였고, 그는 2006 독일월드컵 엔트리에 승선하여 대표팀 주장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월드컵 개최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대표팀의 약점으로 지목되던 이운재였으나.... 정작 월드컵 본선에서는 각성이라도 한 듯 귀신같이 폼을 회복하여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특히 6월 18일에 열린 프랑스와의 조별예선 2차전 경기에서는 앙리에게 골을 허용하긴 했으나, 그 이후엔 두 번의 일대일을 막아내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한국의 1대1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후 6월 23일 스위스와의 조별예선 3차전에도 출전하면서 A매치에 100경기째 출전, 센추리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이는 한국축구 사상 최초로 골키퍼가 센추리클럽에 가입하는 순간이었다. 센추리클럽에 가입한 한국 골키퍼는 현재까지도 이운재가 유일. 다만 경기 자체는 0대2로 패하며 한국의 16강 진출이 좌절되었기에 이운재는 센추리클럽 가입에도 웃지 못하였다.

-이운재의 94, 02, 06년 월드컵 세이브 모음-

이 기세를 몰아 2007년 7월에 개최된 아시안컵에도 여전히 주장을 맡으며 대회 전 경기에 출전하여 활약하였다. 당시 故 핌 베어벡 체재였던 대표팀은 대회 내내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이운재만큼은 대표팀의 골문을 묵묵히 지켜주었다. 특히 7월 22일 이란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는 이란 2, 4번째 키커의 슛을 선방하여 한국을 준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한국은 7월 25일에 열린 이라크와의 준결승에서 또 승부차기까지 갔다. 여기서는 이운재가 선방을 하지 못하였고, 한국은 이라크와의 승부차기에서 패하여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7월 28일에 펼쳐진 3, 4위전은 숙명의 한일전이었는데, 여기서 대표팀은 다시 한번 승부차기까지 갔고(....) 이운재는 일본의 여섯번째 키커의 슛을 막아내어 한국에게 아시안컵 3위라는 선물을 안겨다주었다. 토너먼트에서 세번 연속 맞은 승부차기에서 두번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와 같은 활약 덕분에 이운재는 이천수와 같이 이 대회의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대표팀의 답답한 경기력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운재만큼은 이러한 대표팀을 멱살잡고 캐리한 덕에 까방권을 얻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해 10월 한 매체의 보도를 통해 이운재, 매동국, 김상식, 우성용이 아시안컵 도중 숙소를 무단이탈해 접대부가 있는 룸살롱에서 음주가무를 즐긴 것이 드러나 파문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7월 15일 조별예선 2차전인 바레인전에서 충격적인 1대2 패배를 당한 당일날 밤이었다는 것도 밝혀지면서 이들을 향한 비난은 더욱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이들 넷은 모두 대표팀에서 고참 격인 선수들이었고, 특히 이운재는 대표팀의 주장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실망감이 컸던 상황. 결국 이운재와 우성용은 보도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각각 당시 소속팀이었던 미들즈브러21 와 성남 일화의 전지훈련에 참가 중이었던 매동국과 김상식은 각자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대한축구협회의 상벌위원회에서 이들의 국가대표 선수 자격을 1년동안 정지하고 더불어 국내 FA컵에도 똑같이 1년동안 출전할 수 없다는 징계를 발표하면서 이운재는 이후 1년동안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된다. 이운재 커리어 최악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사건. 이에 따라 대표팀 주장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면서 박지성이 그의 뒤를 이어 대표팀 주장을 맡게 된다.

이렇게 한동안 국대를 떠나있게 된 이운재는 징계가 끝난 뒤 2008년 11월 14일 카타르와의 친선전을 통해 국대에 복귀하였다. 당시 이운재는 08시즌 수원의 더블을 이끌며 K리그 시즌 MVP까지 받았을 정도로 최상의 폼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대표팀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운재의 대표팀 커리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2년 뒤인 2010년에는 폼 저하로 인해 수원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대표팀에서도 당시 한창 좋은 폼을 보이던 정성룡과의 주전 경쟁을 벌여야했다. 결국 2010 남아공월드컵 전의 평가전들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정성룡에게 대표팀 주전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남아공월드컵 엔트리에는 포함이 되긴 했지만 월드컵 본선에는 나서지 못하게 된 이운재였다.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에 협회 측은 2010년 8월 11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전에서 그의 대표팀 은퇴식을 치뤄주기로 하였다. 이운재는 이 경기에 선발출전하며 그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를 치뤘고, 하프타임때의 은퇴식을 위해 전반에 정성룡과 교체되었다. 여담으로 이 교체는 원래 은퇴식을 위해 예정되어있던 교체였는데, 하필 이운재 교체 직전에 나이지리아가 골을 넣어 본의 아니게 모양새가 약간 이상해졌었다.... 은퇴식 때는 협회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이운재의 A매치 총 출전 횟수는 133경기에 달하며, 이는 차범근과 홍명보(136경기)에 이어 한국대표팀 사상 두번째로 많은 출전 횟수이다.

코칭스태프 경력[원본 편집]

현역 은퇴 직후에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FC바르셀로나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그 뒤 2013년 12월에 U-23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로 임명되어 그의 코칭스태프 첫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코칭스태프로써 그가 참여한 첫 대회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이었는데, 그는 이 기간동안 김승규와 나중에 수원에서도 만나게 되는 노동건을 지도하였다. U-23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덕분에 이 대회에 참가하였던 노동건과 최성근은 군면제를 받게 되었다.

2015년에는 킹스컵22 에 참여하여 이창근과 김동준, 구성윤을 지도하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사상 두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6년 1월에 열린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위의 세 선수들을 지도하였다. 참고로 이 대회를 통해 선정된 3위 이상의 세 국가들이 바로 다음 올림픽의 남자 축구 본선에 진출하게되는데, 해당 대회에서 U-23 대표팀은 준우승을 거두어 2016 리우올림픽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다만 결승전이 그 유명한 도하 참사여서 그렇지....

2016년 3월 슈틸리케 당시 대표팀 감독의 뜻에 따라 성인대표팀 골키퍼 코치로 임명되었다. 다만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기에 실질적인 합류는 올림픽 뒤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 전까지는 차상광이 임시로 그 자리를 맡았다.

2016년 8월에 열린 리우올림픽에서는 위의 세 선수들 중 이창근을 제외한 김동준과 구성윤을 지도하였다.23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8강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이후에 성인대표팀 코치진에 합류했어야하는건데....

리우올림픽 이후, 슈틸리케가 차상광을 골키퍼 코치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하여 이운재의 성인대표팀 합류가 갑작스럽게 불발되어버리고 만다. 슈틸리케가 밝히기로는 그 전까지 대표팀 코치진이 지속적으로 변동이 있어왔고, 이 때문에 코치진의 안정감을 위해 더 이상의 변화 없이 코치진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이 발표는 올림픽 이후 이뤄졌지만, 슈틸리케의 결정과 이운재를 향한 통보는 올림픽 전인 6월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해당 발표 이후, 이운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6월에 이미 통보받았던 것이고 코치 채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니 별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발표날 아침까지 혹시나 결정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고 밝히며 은근히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슈틸리케의 설명을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결정이기는 했지만, 이운재 입장에서는 아무 활동도 못해보고 임명 3개월만에 해임되었으니 서운할만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동안 무직으로 있던 이운재는 2017 시즌을 앞두고 수원 삼성의 골키퍼 코치로 합류, 2010 시즌 이후 수원을 떠난지 7년만에 수원으로 돌아온다. 이운재와 동시에 김태영도 수원의 코치진으로 합류하였다. 수원에 오자마자 신화용의 수원 합류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관련 기사

그리고 2018시즌에는 수원 코치진들 중 수원팬들로부터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코치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동안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왔던 노동건의 포텐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2014년 아시안게임때도 사제의 연을 맺은 적이 있는 둘이었지만, 이운재가 수원 코치진에 합류했던 17시즌에 노동건은 포항으로 임대를 떠나 둘이 수원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것은 18시즌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해당 시즌에 노동건이 놀라울 정도의 기량 향상을 보여주었고, 이에 수원팬들은 이운재의 코칭 능력에 그저 감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이 때문에 시즌이 진행되면서 수원 코치진은 팬들로부터 아쉬운 소리를 들었지만, 그 와중에 이운재만큼은 팬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2018년 9월 19일 매북과의 아챔 8강 2차전에서 신화용이 역대급 하드캐리를 선보이며24  팀을 7년만에 아챔 4강으로 이끈 뒤 밝히기를 이운재의 조언이 페널티킥 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긴 현역 때 페널티킥에 워낙 강했던 사람이니....관련 기사

하지만 18시즌 종료 뒤 수원의 감독이 서정원에서 이임생으로 바뀌면서 수원 코치진도 전면 교체되었고, 이 시기에 이운재의 스승인 히딩크 당시 중국 U-21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19년부로 중국 U-25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직으로 이직하게 된다. 서정원 체제의 코치진 중 유일하게 수원팬들의 신임을 받았던 그였기에 그의 이직 소식에 많은 수원팬들이 아쉬움을 표하였는데, 가자마자 그해 9월 히딩크가 경질되면서 이운재 역시 덩달아 코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로는 간간이 유튜브나 방송 등에만 출연할 뿐 코치직 관련된 소식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는데....

충격의 매북행[원본 편집]

2020년 12월, 이운재가 김상식 신임 매북 감독의 요청으로 매북의 골키퍼 코치로 합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수원팬들을 큰 충격에 빠뜨리고 만다! 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던 사람이 팬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팀의 코칭스태프로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은 수원팬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멘붕. 이후 매북 구단 측에서 오피셜을 내면서 이운재의 매북행은 확정....

하지만 북짜가 북패로 갔을때처럼 팬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비난을 쏟아낸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선수가 아닌 코치로 간 것이니만큼 상대적으로 그 충격이 덜한 팬들 또한 존재하였다. 하지만 북짜 이적때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한 분노를 표하는 팬들 역시 존재하였고, 이들 중에서는 이운재를 구단 공식 레전드에서 파내야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운재에 대한 극도의 실망스러움을 나타내는 팬들까지 있었다.

사실 이운재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면, 그가 현역으로 수원에서 뛸때는 수원과 매북의 관계가 지금과 같은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별다른 고민없이 매북행을 결정내렸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수원과 매북간의 감정을 아예 모른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는게, 이운재는 이미 두팀간의 감정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후였던 17시즌과 18시즌 2년동안 수원의 골키퍼 코치로 재직하였다. 즉, 두팀이 맞붙을때의 공기와 분위기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 보고 느꼈던 적이 이미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운재가 수원과 매북의 관계를 아예 몰랐다고 보는건 무리가 있다. 차라리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이 이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거라면 모를까....

정리하자면, 그의 매북행이 수원팬들 사이에 큰 파장을 가져온건 맞지만 팬들 모두가 격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이운재에게 실망하고 분노한 팬들 역시 존재하며, 따라서 이운재에 대한 수원팬들의 지지가 더 이상 이전만큼 견고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

플레이 스타일[원본 편집]

놀라운 선방 능력과 침착성, 든든한 안정감, 그리고 정확한 판단력이 그를 한국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으로 올려놓았었다. 그리고 볼을 끝까지 보고 몸을 던지는 스타일이었기에 굴절된 슛 등 변칙적으로 오는 슛도 곧잘 막아내고는 하였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운재 특유의 호통에서 볼 수 있었다시피 수비라인 형성에도 강점을 보이던 선수. 그리고 이운재하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게 신들린 페널티킥 선방 능력인데, K리그 역대 승부차기 최고 승률인 91.66%(12전 11승 1패), 그리고 방어율도 32골 허용 26골 선방으로 K리그 역대 승부차기 최고 방어율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능력은 국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국대에서 경험한 6번의 승부차기 중 4번을 승리로 이끌었다. 페널티킥 시 상대키커가 나올때부터 볼을 차기 직전까지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몸을 던질 방향을 결정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정상급 키퍼들에 비해 순발력은 약간 떨어지는 편이었으며, 이에 더해 182cm라는 골키퍼치고 작은 키로 인해 빠른 속도의 프리킥이나 중거리 슛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플레이 영상[원본 편집]

영상 마지막 장면은 08시즌에 시즌 MVP를 수상할 당시의 모습이다.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 현역 내내 역시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으로 꼽히는 김병지와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둘은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2006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는 신경전을 벌였던 적도 있었지만, 커리어 대부분을 선의의 라이벌 관계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둘 다 현역을 은퇴한 뒤에는 사이좋게 같이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해당 인터뷰
  • 의도치 않게 '반반무많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장본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말의 탄생지는 디씨인사이드 국내축구갤러리로, 2006 독일월드컵 직전까지 이운재가 부진에 빠지자 당시 체중이 불어있던 그를 까기 위해 '이운재는 밤에 안 자고 야식 먹는다' → '야식으로 치킨 먹는다' → '치킨을 시킬 때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그리고 무를 많이 주문해서 먹을 것이다' 등의 레파토리로 깐게 반반무많이로 정착되었던 것. 이후로는 이운재를 까는 본래 의도는 사라지고 유행어로만 쓰이게 되었다.
  • 힙합팬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전설적인 힙합 프로듀셔 닥터드레의 닮은 꼴로도 유명하다.
  •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1996년 간염을 앓은 이후엔 몸이 쉽게 불어나는 체질로 변하였다. 흔히 말하는 '물만 먹어도 몸이 부는 체질'이라고. 현역 내내 몸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비판을 받곤 했던 이운재였는데, 이운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히딩크도 대표팀에 부임한 뒤 이운재에게 근육보다 군살이 많다고 지적했다한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