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송종국

2008시즌 수원삼성의 주장이었던 송종국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의 송종국

2008시즌 수원의 더블을 이끈 캡틴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멤버

한국축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전성기 시절의 임팩트

프로필[원본 편집]

  • 이   름: 송종국 (宋鍾國 / Song Chong-Gug)
  • 출생일: 1979년 2월 20일 1
  • 국   적: 대한민국
  • 출신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 종   교: 무교 → 개신교 2
  • 포지션: 라이트백, 라이트윙어, 수비형 미드필더 등
  • 신   체: 175cm, 77kg
  • 별자리: 물고기자리
  • 등번호: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 22번, 부산 아이콘스 - 24번,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 24번, 수원 삼성 블루윙즈 - 8번, 울산 현대 - 14번
  • 학   력: 명원초 → 배재중 → 배재고 → 연세대
  • 소속팀: 부산 아이콘스 3  (2001~2002)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2002~2005) →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5~2010) → 알 샤밥 FC(2010~2011) → 울산 현대(2011) → 톈진 터다(2011~2012)
  • 국가대표 기록: 60경기 3골
  • 별명: 쿠키 4  

클럽 경력[원본 편집]

유소년 시절 & 대학 시절[원본 편집]

놀랍게도 송종국은 중학교 1학년때 축구를 시작했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친구들과의 축구 시합에서 단연 눈에 띄었고, 먼저 축구부에 입단했던 친구가 추천했다. 송종국의 재능을 알아본 배재중의 백현영 감독이 부모님을 설득했고 어렵지 않게 축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때가 중학교 1학년 말이었다.

늦게 시작하니까 많이 부족했죠. 저랑 같이 늦게 시작한 1년 선배가 있었는데, 뒤에서 둘이 계속 패스만 주고 받았어요. 선수들 운동하면 뒤에서 둘이 패스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게 지루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냥 재미있어서 했어요.

늦게 축구를 시작했지만 운좋게도 당시 배재중에 축구선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갓 축구를 시작한 송종국은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배재중 선수였던 송종국은 곧바로 배재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입학 당시 송종국의 키는 겨우 160cm였다고 한다.5  하지만 송종국은 전국대회에서 득점상도 받을 만큼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이미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송종국은 선배 박진섭과 함께 배재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후 박진섭은 고려대로, 송종국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연세대 초기에는 주전경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이를 이겨내고 대학 무대에서도 활약하였다.

부산 아이콘스 시절[원본 편집]

연세대를 졸업하고 2001년에 부산 아이콘스에서 프로 데뷔를 하게 된다. 자신의 프로데뷔시즌이었던 2001시즌부터 주전자리를 꽤차며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고, 35경기 2골이라는 스탯도 쌓으며 K리그 대형신인의 탄생을 알렸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2001 K리그 신인상도 수상하고, 시즌 베스트일레븐에도 선정되는 등 순식간에 리그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으로 거듭난다. 참고로 당시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된 수원선수로는 서정원산드로가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맹활약을 이어가 페예노르트로 이적하기 전까지 2002 시즌에 10경기 2골을 기록하였다.6 

부산과 관련해서 개그성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일월드컵 이후 송종국이 페예노르트로 이적하자 부산 측에서 팀에서 얼마 뛰지도 않은 송종국의 등번호인 24번을 영구결번하기로 결정해 많은 논란이 일었다. 상식적으로 영구결번은 팀을 위해 오랜 기간동안 헌신한 레전드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송종국이 아무리 부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더라 하더라도 뛴 기간을 봤을 때 레전드는 절대 아니기 때문. 당시 한일월드컵 열풍에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부산 구단의 촌극이었다. 결국 이 영구결번은 2007년 부산의 한정화에게 24번을 다시 부여함으로서 슬그머니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시절[원본 편집]

한일 월드컵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많은 유럽구단들이 송종국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훗날 송종국 본인이 직접 밝히기로는 제일 먼저 그의 영입을 시도한 유럽구단은 무려 토트넘 핫스퍼였다고 한다. 이 이적이 성사되었으면 한국인 1호 프리미어리거는 박지성이 아닌 그가 될 수 있었던 상황. 하지만 이 역사적인 이적은 부산 구단에 의해 무산되는데, 애초에 완전 이적으로 보내주기로 송종국에게 약속했던 부산이 갑작스럽게 임대가 아니면 허용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바꿔버렸던 것이다. 거기다가 구단에서 그에게 책정한 '임대료'는 무려 10억원....7  이러한 부산의 어이없는 방향 전환에 토트넘은 결국 송종국 영입을 포기하게 된다. 토트넘이 그의 영입을 포기하자 그 뒤를 이어 토트넘의 최대 라이벌인 아스날도 송종국 영입을 시도하였지만, 이 역시 부산이 10억원짜리 임대를 고수하면서 무위에 그쳐버린다. 부산 측의 이 어이없는 방침으로 인해 유럽행이 계속 좌절되자 송종국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였고, 아스날 이적까지 무산되자 결국 짐을 싸들고 구단을 이탈해버렸을 정도로 양측의 갈등이 심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EPL팀들이 송종국 영입에 실패하자, 그 다음으로 송종국에게 오퍼를 넣은 팀은 바로 반 마르베이크가 이끌던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페예노르트였다. 페예노르트 측은 구단의 이사를 직접 한국에 보낼 정도로 송종국 영입에 공을 들였고, 결국 부산 구단의 맘을 돌리는데에 성공하여 400만 달러의 이적료로 그를 영입하게 된다. 당시 에레디비시는 지금과 달리 유럽의 최상위 빅리그 바로 다음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리그였는데, K리그에 데뷔한지 이제 2년이 지난 젊은 선수가 그 정도 리그의 강팀으로 이적한 것이니 이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송종국 본인은 당시에 토트넘 이적이 무산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고 훗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2002-2003 시즌부터 페예노르트 선수로 뛰게 된 송종국은 페예노르트 데뷔전에서 라이트윙어로 선발출전, 오른쪽 측면에서 여러차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2도움을 올려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루게 된다.

-송종국의 페예노르트 데뷔전-

이후에도 주전으로 활약을 펼치며 좋은 데뷔 시즌을 보냈다. 송종국은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며 당시 몸상태가 너무 좋아서 누구를 상대하든지 자신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유벤투스 전에서 폭풍 활약은 지금까지도 많은 축구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인생 경기 중 하나. 당시 파벨 네드베드, 에드가 다비즈, 델 피에로, 튀랑, 트레제게 등이 활약하던 유벤투스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팀이었으나 월드컵을 마치고 곧장 날아온 한 동양인 선수에게 측면을 탈탈 털리며 힘겨운 원정 무승부를 기록한다.

시즌 막판에 리그 2위 자리를 놓고 펼쳐진 페예노르트와 아약스의 더비 매치('더 클라시케르'라 불린다)에서는 경기 도중 분위기가 과열되자 당시 아약스 소속이었던 크리스티안 키부8 가 그의 얼굴에 날린 주먹을 가까스로 피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이로 인해 키부는 두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게 된다. 여담으로 해당 경기는 당시 아약스 선수였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도 한 페예노르트 선수의 머리를 팔꿈치로 후려버려(....) 5경기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을 정도로 경기 양상이 과열되었던 경기였다. 송종국의 02-03시즌 총 스탯은 27경기 1골.

2003-2004시즌에도 주전자리를 지키며 29경기 1골의 스탯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2001년부터 시작된 휴식 없는 강행군으로 인해 피로가 쌓인 것이다. 피로는 잔부상을 야기했다. 결국 2004-2005시즌에는 많은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외지 생활의 염증과 자신을 데려온 반 마르베이크의 이직9 과 후임인 루드 굴리트와의 불화, 꽤 오래 머물렀음에도 네덜란드어를 잘 못하던 현지 부적응, 그리고 당시 부인이었던 김정아와의 불화건으로 사생활 문제까지 겹쳐 급격한 내리막을 탔다. 결국 페예노르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04-05 시즌에는 1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주전에서 완전히 밀리게 된 그였다. 이 때 그에게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10 가 영입을 제안하였고 개인협상까지 진행되던 수순이었으나, 이미 유럽생활에 지칠대로 지쳐있던 그는 결국 유럽에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K리그 복귀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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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짧은 유럽생활을 마친 뒤 송종국은 K리그 복귀를 추진하였고, 처음에는 당연히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와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부산 구단은 송종국의 연봉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당시 모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그의 연봉을 맞춰줌으로써 2005시즌부터 수원 선수로 뛰게 된 그였다. 당시 이적료는 현재 수원에게는 생각도 못할 금액인 25억원.... 하지만 송종국의 영입에 대해 당시 팬들의 반응은 크게 갈렸는데, 한일 월드컵 영웅의 영입을 반기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이 본격적으로 '김호의 아이들'을 정리하던 상황이라 올드 팬들은 크게 반발하였다.12  송종국 본인의 경기력도 2005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별 활약을 펼치지 못하였고, 때문에 경기장에서 일부 팬들에게 야유를 받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05 시즌 스탯 자체는 22경기 1골이었지만, 이 중 리그 경기는 9경기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컵 대회에 출전했었다.

2006 시즌에도 전반기에는 지난 시즌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후반기부터 본인 특유의 멀티플레이어적인 능력을 살려 본 포지션인 라이트백과 중앙 미드필더를 오가면서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부터 한동안 죽어있던 폼이 돌아오면서 팬들의 신임을 사기 시작하였고, 수원의 후기 리그 우승13 에 큰 공헌을 하였다. 2006 시즌에는 총 31경기에 출전하였고, 뒤이은 2007 시즌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35경기에 출전하였다. 그의 폼이 되살아나자 EPL의 풀럼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 테스트 제의까지 하였으나, 송종국에게 관심을 보였던 당시 풀럼 감독이 경질되면서 흐지부지되기도 하였다.14  관련 기사 2008 시즌에는 커리어 최초로 주장직을 맡아 팀을 이끌었고, K리그와 리그컵을 제패하며 수원의 더블에 공헌하였다. 특히 12월 7일날 열린 북패와의 2008 K리그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는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골까지 넣었는데, 이 골 장면과 그 뒤의 볼링 세러머니는 지금까지도 많은 수원팬들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 송종국의 결승골 덕분에 수원은 이 경기를 2대1로 이겼고, 1대1로 비겼던 1차전 스코어까지 합하여 최종스코어 3대2로 북패를 꺾으면서 4년만에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던 수원이었다. 송종국의 해당 시즌 총 스탯은 30경기 2골.

-2008 K리그 챔결 2차전 하이라이트-

여담으로 송종국이 결승골을 넣고 팀동료들과 한 볼링 세러머니에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08시즌 챔피언결정전이 치뤄지기 전인 10월 29일에 열린 슈퍼매치에서 수원은 경기 종료 직전 기성용이 넣은 결승골로 인해 0대1로 패하고 만다. 문제는 이 때 기성용이 골을 넣고 한 세러머니가 2006 독일월드컵 한국과 토고의 경기에서 토고의 쿠바자가 선제골을 넣고 했던 세러머니와 유사했다는 것.15  그리고 당시 한국의 골키퍼가 이운재라는 점으로 인해 기성용의 세러머니가 이운재에 대한 도발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었다.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에서의 쿠바자의 골과 세러머니-

이에 기성용은 인터뷰에서 평소에 아데바요르의 세러머니의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골을 넣고 그런 세러머니를 했다는 입장을 표하였다. 그리고 혹자는 해당 세러머니가 이운재라는 특정 선수를 저격한게 아닌, 수원을 비하할때 쓰이는 동물인 닭을 형상화한게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진짜 의도는 기성용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만, 당시 이 세러머니로 인해 기성용은 수원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종국은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팀동료들과 이에 대한 화답(?)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송종국이 골을 넣은 뒤 곽희주와 서동현 등이 기성용의 세러머니를 따라하고 송종국이 이를 볼링공으로 쳐버리는 듯한 세러머니를 선보이면서 기성용의 도발을 완벽히 갚아주는데에 성공하였다.

(기성용까지 같이 담아낸 완벽한 앵글)

“선수들이 뽑아준 주장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게 시작을 했고요. 홍순학, 이정수, 조원희같은 후배들이 잘 따라줬어요. 에두도 있었죠. 다른 팀보다 개인적으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조직적인 면에서 되게 좋았어요. 차범근 감독님이 전체적인 팀을 잘 만드셨던 것 같아요.”

“우승을 하면 다른 팀의 표적이 되잖아요. 더 좋은 선수를 데려와서 리모델링을 해야 버틸 수 있는데 2009년에는 빠져나간 선수만 있고 데려온 선수는 없었어요. 그게 안 됐죠."

송종국은 2009 시즌 22경기를 뛰는 등 팀 반등을 위해 애를 썼지만 분위기의 반등은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았다. 당시 수원은 최악의 성적을 내고 있었고, 이에 그는 삭발 투혼까지 감행하면서16  투혼을 발휘했지만 팀은 결국 10위에 그쳤다. 이때부터 송종국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폼이 저하되어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폼 저하에 따라 2010시즌에는 입지가 더욱 줄었고, 시즌 도중 알 샤밥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17경기 출장17 에 그치며 수원에서의 커리어를 마치게 된다.

이후[원본 편집]

2010 시즌 도중, 수원 삼성 측의 만류에도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의 알 샤밥으로 이적하였으나 사우디아라비아 시즌 개막 1주일을 앞두고 연습경기 도중 부상을 당해 2개월 가량 결장하였다. 이후, 필드에 복귀해 측면 미드필더로 뛰면서 7경기 출장 2골을 기록했으나 인내심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우디 아니랄까봐, 2011년 2월 초 느닷없이 송종국 측과 계약해지했다. 출장 기록도 변변찮고, 다른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쿼터를 비워야겠다는 이유였다. 결국 송종국 측은 알 샤밥과의 계약해지 후 국내 복귀를 추진해 울산 현대로 이적하였다. 송종국은 김호곤 감독 밑에서 새로이 싹 바뀐 울산의 수비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울산에서 주전을 먹고 뛰던 중 갑작스럽게 울산으로부터 7월 5일자로 자유계약으로 풀리게 되고 바로 중국의 텐진 터다로 이적하게 된다. 울산 측의 설명으로는 송종국과의 계약 옵션에 따라서 연봉 및 계약기간에 대한 협상을 벌였으나 서로 이견이 있어서 결국 자유계약으로 풀어주게 되었고 중국의 텐진 터다가 영입하게 되었다고. 송종국의 영입에 있어서는 전 수원 삼성 소속이자 당시 텐진 소속이었던 리웨이펑의 추천이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텐진 터다로부터 자유계약으로 풀리게 된다. 잘 하긴 했지만, 나이가 있어서 새로운 한국인 미드필더로 아시아 쿼터를 채우려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밀리게 되었다는 듯.

2012년 3월 27일, 은퇴를 선언하였는데, 그 이유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도저히 선수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고... 사실 송종국의 어머니는 운동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바쳤는데 갑자기 쓰러지고, 송종국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만다. 큰 충격을 받은 송종국18 은 더 이상 축구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되었다. 항간에는 '이제 갈 데가 없어서 은퇴하는거 아니냐'라는 얘기도 나왔는데, 실제 여러 구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은퇴 선언으로 기나긴 선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된다.

국가대표 경력[원본 편집]

프로 데뷔전 대학선수였던 2000년 6월 7일 마케도니아와의 경기에 출전하며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남자 축구 엔트리에도 뽑혀 올림픽 무대에도 출전하게 된다. 이후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그의 눈에 들게 되며, '히딩크의 황태자'라고 불릴 만큼 그의 총애를 받았다. 2001년 2월 11일에 열린 UAE와의 경기에서는 멋진 중거리 골을 넣으며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 경기는 한국이 4대1로 승리하였고, 고종수도 골을 기록하였다.

2001년 11월에 치뤄진 크로아티아,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맹활약하여 AFC 11월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002년 1월에서 2월에 개최되었던 북중미 골드컵에는 한국국대도 참가하였는데,19  송종국은 1월 19일 미국과의 조별예선 경기 중 랜던 도노반의 선제골로 1대0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또다시 중거리골을 넣으며 자신의 두번째 A매치 득점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경기 종료 직전 실점을 허용해 1대2로 패배하였다.

그 뒤 송종국은 자신의 커리어 최전성기인 2002년 한일월드컵에 출전, 대표팀의 부동의 오른쪽 윙백으로 활약하게 된다.20 특히 포르투갈전에서 그 유명한 루이스 피구를, 이탈리아전땐 델 피에로를 완벽히 지워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된다.

-포르투갈전에서의 송종국 활약상-

터키와의 3, 4위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때린 중거리슛이 차두리를 맞고 굴절되어 만회골로 기록, 자신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 득점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송종국은 자신의 A매치 득점을 모두 중거리슛으로 넣은, 보기 드문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송종국은 단일 월드컵 최장시간 출전 한국 선수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무려 687분을 뛰었다.21  이운재와 타이기록이지만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로 국한시켜보면 단연 유일하다. 게다가 송종국은 단일 월드컵에서 출장할 수 있는 최다 경기인 7경기에 모두 나와 풀타임을 뛰었고, 거기에 한국은 2002 월드컵에서 연장전을 두 번이나 했기 때문에 한국 축구사에서 도저히 깨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이처럼 월드컵 내내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02 월드컵 이후 한국선수들의 유럽 이적 돌풍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박지성, 이천수 등도 아닌 송종국이었다. 이후 한국 국대 오른쪽 윙백으로 2006 독일 월드컵에 출전하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때 가장 각광받던 선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그 동안의 폼 저하를 겪었고 그마저도 발목 부상과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까지 하는 등 위상이 많이 변했다. 왼쪽 풀백에서 김동진이 맹활약하자 이영표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경기 자체도 토고전 외에는 출전하지 못하였다.

이어진 2007년 아시안컵에도 선발되었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을 뒤집진 못했다. 당시 수원에서는 폼이 살아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 대회에서 송종국은 꽤나 답답한 경기력을 보였다. 결국 허정무호 출범 이후로는 대표팀 주전 경쟁에서 사실상 낙마하게 된다.

A매치 총 기록은 60경기 3골.

선수 은퇴 이후[원본 편집]

은퇴 직후에는 TV조선의 K리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13년 TV조선이 K리그 중계를 중단한 이후에는 주로 예능에 많이 출연하였고, 특히 MBC 예능 '아빠! 어디가?'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때는 김성주, 안정환과 함께 MBC의 월드컵 해설위원을 맡았다.

2015년부터 송종국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박건하 등과 함께 MBC스포츠플러스의 K리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엠스플이 K리그 중계에서 사실상 발을 빼면서 자연스럽게....

2018년에는 김병지가 운영하는 유튜브채널 '꽁병지TV'에 출연하다가, 2019년부터는 '송타크로스'라는 유튜브채널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유튜브채널 링크

2021시즌부로 FC안양의 어드바이저로 임명되었다. 안양 구단의 행정에 조언을 주는 직책이라는 듯.

플레이 스타일[원본 편집]

전성기 시절에는 단단한 피지컬과 끈적한 대인마크, 수준급의 볼키핑과 빠른 오버래핑, 그리고 날카로운 크로스와 중거리슛 능력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한일월드컵 전 경기 풀타임을 출전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체력도 엄청났으며 양발 모두에 능숙했다는 것도 큰 장점. 다만 페예노르트에서의 첫 시즌 이후부터 폼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전성기가 꽤나 짧았다는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 페예노르트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폼이 떨어질때로 떨어진 상태였고, 이는 수원 이적 후 첫 시즌인 05시즌까지 지속되다가 06시즌에 다시 폼을 회복하여 전성기때만큼은 아니지만 K리그 내에서는 탑급의 기량까지 올라오게 된다.

또한 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역시 멀티플레이어였다는 것. 주 포지션은 오른쪽 풀백 혹은 윙백이었지만 페예노르트 시절에는 오른쪽 윙어로 뛰기도 하였고 수원 시절에는 중앙미드까지 보며 만능맨으로서의 재능을 자랑하였다.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 네이버 웹게임 '풋볼데이' 광고에 출연하여 일인다역의 열연을 펼친 적이 있다....
  • 2014년 브라질월드컵 벨기에와 러시아의 조별예선 경기에 송종국의 딸인 송지아 양이 에스코트 키드로 선정되어 루카쿠와 함께 입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송지아 양은 좀더 성장한 후에 아버지의 피를 물러받은 것인지 굉장한 드리블을 선보이기도....

  • 사생활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결혼과 이혼을 두번씩 반복하였는데, 이 두 이혼에 관해서도 상당히 말이 많았다. 두 번째 아내였던 배우 박연수 22  와의 이혼도 송종국의 바람으로 이혼했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 이와 관련하여 2018년에는 꽁병지TV에서 김병지에게 송종국의 라이벌은 피구도 앙리도 아닌 라이언 긱스라는 디스를 당하기도....

 

특히 박연수와의 이혼은 당시에 여러가지 말이 나왔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정이 무뎌진건지 현재는 그냥 친구와 같은 사이로 지내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이혼 후 둘 사이에 낳은 두 자녀의 양육권은 박연수에게 주어졌는데, 그래도 아버지인 송종국과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잘 지내고 있는듯. 두 자녀는 송종국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송타크로스'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다. 박연수 또한 2019년 자신의 인스타에 아래와 같은 게시물을 올린 것으로 보아 세월이 지나면서 둘 사이에 있던 감정의 골이 많이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 2017년 슛포러브에 출연하여 박건하 등 엠스플 K리그 해설위원들과 팀을 짜 김병지, 최진철, 이천수 등을 상대로 풋살 경기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녹슬지 않은 발재간을 자랑하였지만, 마지막 승부차기 때는 홈런을 날려버려 08시즌 재연에는 실패하였다....
  • 2018년 꽁병지TV에서 박건하, 김병지와 크로스바 챌린지를 벌였는데 여전한 발끝 감각을 보여주었다.
  • 2018년 꽁병지TV에서 자신의 유럽 커리어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썰을 풀었는데, 이 중에서 페예노르트 시절 팀동료였던 디르크 카윗에게 본의 아니게 디스를 당했던 썰이 압권이다.... 이 외에도 여러 썰을 많이 해주니 시간나면 꼭 한번 아래 영상을 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