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리웨이펑

대륙의 사나이

프로필[원본 편집]

  • 이름: 리웨이펑 (李玮峰 / Lǐ Wěifēng)
  • 출생일: 1978년 12월 1일
  • 국적: 중국
  • 출신지: 지린성 창춘
  • 신체: 184cm, 75kg
  • 포지션: 센터백, 오른쪽 풀백
  • 유소년: 톈진 로코모티브 (1990~1995) → 선전 페이야다/선전 핑안 1   (1996~1998) → 톈진 로코모티브 (1998)
  • 소속팀: 선전 핑안/선전 젠리바오 (1998~2005) → 에버턴 FC (2002~2003, 임대) → 상하이 뤼디 선화 (2006~2008) → 우한 광구 (2008~2009) →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9~2010) →톈진 터다 (2011~2015)
  • A매치: 112경기 14골
  • 지도자: 톈진 취안젠 수석코치 (2015~2016)
  • 프런트: 톈진 취안젠/톈진 톈하이 부단장 (2017~)

선수 경력[원본 편집]

선전 핑안/선전 젠리바오[원본 편집]

1998년 선전 핑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리웨이펑은 당시 감독으로 부임한 차범근 감독에게 중용받으며 주전으로 도약했다. 2002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리웨이펑은 중국의 이동전화단말기 제조업체인 科建(커즈안)이 에버튼과 2년간 스폰서 계약에 리웨이펑의 1년 임대 옵션이 포함되면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으나 1경기만 뛰고 친정팀으로 복귀하였다. 2005년 선전 젠리바오의 AFC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행을 이끌었는데 당시 조별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한 은사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최종전에서 신펑의 결승골을 도우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제치고 8강에 진출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2 

상하이 선화[원본 편집]

선전 젠리바오의 재정문제로 2006년 600만위안의 이적료로 상하이 선화로 떠난 리웨이펑은 매북과의 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뼈아픈 실수를 범한다. 1차전 홈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던 상하이 선화는 2차전 원정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지만 리웨이펑이 제칼로의 복부를 가격하는 행위로 퇴장당하면서 4:2로 패배하였고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경기 후 감독 우진쿠이는 팀의 패배 원인으로 리웨이펑의 퇴장을 꼽으며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하였다.

우한 궈얼[원본 편집]

리그 준우승 팀 상하이 선화에서 기회를 잡지못한 그는 350만위안에 예전 선전 핑안과 중국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주광후가 지휘봉을 잡고 있는 우한 광구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2008년 9월 28일 베이징 궈안과의 리그 경기에서 난투극에 휘말렸고, 중국 축구협회로부터 6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8천 위안의 벌금을 부과받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 징계로 1부리그 잔류에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된 소속팀 우한 광구는 격렬히 항의하였지만 소용이 없자, 징계에 불복하여 심판을 폭행하고 잔여 경기를 거부하여 2008 시즌 전경기가 몰수패 처리되고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3 

수원 삼성 블루윙즈[원본 편집]

우한의 2부리그 강등이 결정되자, 우한 광구에 소속된 비연고 출신 고연봉 선수들은 일제히 이적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리웨이펑도 이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높은 연봉과 많은 이적료, 6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 때문에, 중국 슈퍼리그 내의 다른 수비수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적할 팀을 구하기 힘들게되었다. 이러한 찰나, 아시아축구연맹에서 아시아 쿼터 제도를 도입하면서 은사인 차범근 감독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이에 따라 2009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며 K리그 최초의 중국인 선수가 되었다.

처음 리웨이펑이 왔을때 수원팬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중국인 선수들의 실력에 대한 불신도 있었겠지만 리웨이펑의 경우 특유의 거친 플레이로 한국 팬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토의 빈 자리에다가 중국에서 사고만 치던 싸움꾼 수비수 데리고 와서 뭐하자는 겅미?' 라는 볼멘소리가 나왔고, 이러한 우려는 시즌전 홍콩 구정컵 스파르타 프라하와의 경기에서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면서 현실로 이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J리그 챔피언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1차전에서 리웨이펑은 팀의 선제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4:1 대승을 이끌었다. 당시 리웨이펑은 엠블럼에 키스하는 세리머니로 수원팬들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 경기 후 수원팬들은 리웨이펑 짜요 라는 구호로 그를 응원하였다. 그리고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아서, 리웨이펑 이적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경기장에 중국인 관중이 늘어나기도 했다. 또한 리웨이펑은 친정팀 상하이 선화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3차전 원정경기에서 동점골을 성공시킨뒤 격렬한 세리머니 대신 관중석에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세리머니로 자신을 응원해준 옛 팬들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매북에서 더 좋은 연봉을 제시받았지만 차범근 감독과 팬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이를 거절, 수원 팬들에 대한 의리를 보이기도 했다. 이 시기 황재원, 강민수 등 수비 자원들이 새로 들어와서 자리를 잃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으나 윤성효 감독 밑에서 오른쪽 풀백이라는 새로운 자리를 맡아서 그동안 중앙 수비수로 서면서 숨겨왔던 공격 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슈퍼매치에서 보여주었던 한중일대통합슛4 은 백미.

수원에서는 주로 중앙 수비수와 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였으며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간간히 선보이기도 하였다. 2010 시즌 종료 후 팀이 전면 재개편을 단행, 마토를 복귀시키면서 수원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에 가 있는 동안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방출을 통보했고5 리웨이펑 본인은 이를 전혀 몰랐다고 밝혔으며 수원을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덕분에 수원팬들뿐만 아니라 모든 K리그 팬들에게 동정을 받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수원은 엄청난 욕을 먹고 있다.

이후[원본 편집]

2011년 슈퍼 리그 준우승 팀인 톈진 터다로 이적한 리웨이펑은 소속팀의 16강행을 이끌었으나 매북과의 16강 원정경기에서 0:3으로 완패하면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텐진 터다는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에도 출전하는데 성남 일화와 같은 조에 속해있다. 중국으로 복귀한 이후에는 국가대표로도 선발되며 선수 생활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보내는 중. 2014년에는 텐진 테다의 부주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2015년, 리웨이펑은 톈진 터다의 아리에 한 감독의 리빌딩 계획으로 주전 자리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이에 리웨이펑은 7월 21일 톈진 터다 구단과 합의하에 팀을 떠나기로 결정하였고, 리웨이펑은 톈진 터다의 리빌딩 계획6 에 대하여 동감하는 반응으로 구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4년간의 톈진 터다의 커리어를 마감하기로 하였다.7 7월 22일, 팀을 떠나는 리웨이펑을 배웅하기 위하여 수 많은 팬들이 톈진의 홈 경기장으로 찾아왔었고 리웨이펑은 차후 행선지에 대해서는, 현역 은퇴를 하거나 친정팀이었던 선전 FC로 컴백하여 남은 시즌을 소화하고 은퇴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을 아꼈다. 그리고 결국 리웨이펑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국가대표 경력[원본 편집]

국가대표팀에서 100경기 넘게 출전한 센추리 클럽 멤버. A매치 데뷔전은 1998년 11월 22일에 열린 대한민국과의 친선 경기였다. 데뷔 후 중국 국가대표팀의 간판 수비수로 각 대회와 친선경기에서 활약하였다. 2008년 3월 15일에 태국 국가태표팀과의 친선경기에서는 국가대표 데뷔 후 약 10년만에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리웨이펑은 2008년 6월부터 국가대표팀에 호출되지 않았었다. 이후 한동안 국가대표팀과 인연이 닿지 않았었으나,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의 기여를 인정받아, 당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스페인의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의 부름으로 2011년 3월 25일에 있었던 뉴질랜드 대표팀과의 친선경기에서 2년 9개월만에 중국 국가대표팀으로 복귀와 더불어 주장으로도 재선임되는 화려한 복귀를 하였다. 이후 카마초 감독의 중국 국가대표팀에는 2011년 11월 15일,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014 브라질 월드컵 1차 조별예선 경기를 끝으로 선발되지 않았다.

은퇴 이후[원본 편집]

2015년 은퇴후 퉁지 대학 축구부에서 잠시 축구를 지도하다가 톈진 취안젠 수석코치로 부임하여 여러 감독을 보좌했고, 칸나바로가 취임해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6년 4월 30일, 북패와의 슈퍼매치에서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등장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파비오 칸나바로가 광저우 헝다로 떠나고 파울루 소자가 후임감독으로 오자 수석코치에서 부단장으로 승진(?)했다. 

2018년 10월 박충균 임시 감독이 톈진 취안젠에 부임하자 박감독을 보좌하여 수석 코치 역할을 했다.

2019년 취안젠 그룹 공중분해 사태로 팀이 소유권이 넘어갔지만, 전 경영진 중 유일하게 팀에 잔류할 수 있었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새 경영진이 매강희 감독의 고용 승계에 난색을 표해 어쩔 수 없이 계약 해지했지만, 본인은 한국 쪽의 자기 인맥을 동원해 후임 한국인 감독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성사는 안되었는지 중국 감독으로 가게 되었다. 

플레이 스타일[원본 편집]

데뷔 시절부터 '수비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 '마치 중국의 홍명보 같다'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위치선정을 통해 상대 공격수를 묶는 플레이를 잘 하며 뛰어난 피지컬과 공중볼 장악 능력을 이용해서 상대 선수와의 헤딩경합에서 잘 밀리지 않는 편. 또한 수비라인을 지휘하는 능력과 리더십도 뛰어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빠른 공격수들에게는 잘 털리는 편이고 잔실수가 좀 있는 편이다. 현역 시절에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고 구설수에도 많이 올랐었다.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 그 유명한 을용타 사건 때는 이을용이 리이의 뒷통수를 때려 눕히자, 리웨이펑이 분노하면서 이을용을 밀치는 모습이 나온다. 이 경기에서 리웨이펑은 경기 내내 안정환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이래저래 한국 축구 팬들에게 비호감 이미지만 쌓아올리던 선수였는데, K리그에 온 이후에는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으니 사람 앞날은 모를 일.
  • 한국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99년 던힐컵 결승전인데, 리웨이펑의 거친 플레이를 참다 못한 매동국이 리웨이펑의 얼굴에 팔꿈치를 휘둘렀고 리웨이펑도 맞받아치면서 결국 두 선수는 동반 퇴장당했다. 그리고 동아시안컵 대회에서의 유경렬과의 충돌 역시 회자되는데, 당시 유경렬의 도발에 넘어가서 얼굴을 밀쳐서 넘어뜨려버렸다. 하지만, 심판은 리웨이펑이 아닌 가오린 8  에게 레드카드를 줬으며, 리웨이펑은 후반에 심판에게 계속 항의하다가 레드카드를 먹었다.
  • 2011년 여름 휴가때 빅버드를 찾기도 하는 등 수원팬들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2014년 겨울 휴가에도 3년만에 찾아왔다.
  • 의외로 드라마 대장금의 팬이라고 한다.

  • 고향은 한반도의 바로 위인 창춘이지만, 데뷔후 선수 생활을 오래한 선전에 전 일가가 이주해 산다고 한다.

  • 청소년 국가 대표시절 대학생이던 형이 강도를 당해 심장을 칼에 찔렸는데, 부모님은 리웨이펑이 염려할까봐 안알렸다고 한다.

  • 차범근과의 관계가 정말 돈독하다. 프로 데뷔를 한 선전의 감독이 차범근이었고 이후 수원으로 오게 된 것도 차범근 감독과의 연으로 오게 되었고, 매북에서 거액을 제의했음에도 차범근과의 의리로 잔류.
  • 아버지가 리웨이펑의 교육을 위해 열악한 직장도 감수하며 오지이던 창춘에서 베이징까지 이사왔을 정도로 열성부모님이었는데, 아쉽게도 2000년 출근중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 자녀는 2009년생인 1녀를 두고 있다고 한다.

  • 상하이 선화 팬들은 리웨이펑을 '잘생긴 선수'로 밖에 기억을 못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