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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랜드 FC 3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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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金炳秀 | Kim Byung-Su)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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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월일 | 1970년 11월 24일 |
| 국적 | 대한민국 |
| 학력 |
미동초 2 - 경신중 - 경신고 - 고려대 |
| 출생지 | 강원도 홍천군 |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 국가대표 | U-23 1경기(1992) |
| 소속팀 |
제일은행 축구단(1992/ 선수) 코스모 석유 FC(1993~1997 / 선수 ) 오이타 트리니타(1997 / 선수) 고려대학교(1998 / 코치)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1998~2002 / 코치) 포항 스틸러스 2군(2003 / 코치) 영남대학교(2008~2016) 서울 이랜드 FC(2017) 강원 FC(2018 / 전력강화부장) 강원 FC(2018~ ) |
소개[원본 편집]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어 나갈 천재"로 불렸으나, 경신고 시절의 부상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영남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서 인상적인 지도력을 보여준 뒤, 2017년에 서울 이랜드 FC 감독을 맡으면서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했다.
선수 경력[원본 편집]
강원 홍천초등학교 재학 시절 축구화를 처음 신은 김병수는 축구를 잘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울 미동초등학교로 스카우트되었다. 경신중학교를 거쳐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알고 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3
그래서 김병수는 '자신의 리듬에 게임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선수'라는 이야기처럼 게임을 조율하는 능력에 관해서 당대 최고였고, 그보다 좋은 선수가 없었다. 이 무렵 포항제철 감독이었던 한홍기가 그의 축구 실력을 눈여겨 보면서 포항제철 선수들과 함께 연습시키기도 하였다.
관련된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한홍기는 어린 천재를 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브라질 유학이 이미 그 시절에 추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교부(현 교육부)의 방침이 걸림돌이었다. 브라질의 축구학교에서 축구 공부를 한 기간은 국내 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축구 명문인 경신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1987년에는 제6회 KBS배 추계 중고축구대회에서 16강전 결승골, 준결승전 동점골 및 결승골, 결승에서는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고, 본인은 대회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포항 스틸러스 선수들과 훈련했으며, 그들을 상대로 개인기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4
다만, 그의 불운이 시작된다. 경신고 2학년 때 처음 부상을 당했다. 체계적인 선수 관리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을 리 없었다. 찜질 몇 번에 주사 한 두대 맞고 중요(?)한 경기랍시고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발 다쳤으면 왼발로만 차라.'는 소리가 그라운드로 떠밀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뛰는 날보다는 서 있는 날이, 서 있는 날보다는 앉아 있는 날이 더 많아졌다.
1987년에는 FIFA U-16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청소년 대표로 차출되었다. 이 당시 함께한 선수들이 신태용, 서정원, 노정윤 등이다.
1988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카타르에서 열린 제26회 U-19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고질적인 발목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겪었던 발목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아픔을 무릅쓰고 운동에 매진했던 결과, 양쪽 발목 인대가 1인치 가량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4경기. 그 가운데 3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5 어찌 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김병수의 아버지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겠지만,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수술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해 본 적이 없었고,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습하고 그라운드를 뛰었다. 19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6
1988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을 때. 당시 한국일보 전상돈 기자7 는 '대한민국 축구에 김병수 시대가 오고 있다'며 '대한민국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미드필더의 발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 대회를 앞둔 19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8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탈리아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 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 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차후 이 때를 회상하며 인터뷰하기를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라고.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19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 적 포철 축구단 숙소에서 만났던 최순호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 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일어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2로 고대가 승리한다.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부상이 다시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19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3번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19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아시아 예선에 선발되었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삼락 감독이 당시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을 맡고 있던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9 훈련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사사건건 부딪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소속이던 김병수를 대표팀에 선발했다. 당연히 크라머는 노발대발했고, 이후 김병수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빼어난 활약을 보고 '축구 인생 50년 만에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를 1분 남기고, 극적인 발리 슛 결승골을 성공시켜 대한민국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발목 부상이 재발하면서, 끝내 올림픽 본선 엔트리에는 합류하지 못하였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비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고 한다. 대학 졸업 이후 부상으로 축구를 떠나 방황하던 무렵인데, 예비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난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김호 당시 대표팀 감독을 찾아가 자신의 발목 상태를 설명한 뒤 스스로 대표팀에서 나왔다고 한다.
당시 김호 감독은 사라진 김병수의 근황을 찾지 못했지만 과거에 확인한 그의 천재성을 믿고 아무 연락없이 대표팀 명단에 그를 올렸지만, 김병수의 발목 상태는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환경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성인이 되었을 때, 양 쪽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본격적인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의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소속 구단들은 대한민국의 유망 선수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쓰다도 그런 구단 가운데 하나였다. 물밑 작업이 한창이던 1991년 그들은 김병수를 점찍고 가계약을 맺었다. 올림픽 최종 예선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마쓰다는 김병수에게 1992년 2월 스카우트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통보한다. 재기 가능성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1993년 산프레체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J리그에 참가했고, 고려대 1년 후배인 노정윤이 그를 대신해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잊혀져 갔다. 비디오 대여점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가게를 봐주며 아무런 낙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JFL의 코스모 석유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적지 않은 연봉에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과 재활 훈련까지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1992년 초여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1992년 7월, 김병수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엔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었다. 수술 이후 약해진 발목 탓에, 양쪽 무릎까지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리고 1993년부터 코스모 석유에서 뛰기 시작했다.
J리그도 아니고 일본 실업리그 소속 팀, 그것도 만년 하위권으로 처지는 팀이었지만 그는 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국내 선수 연봉 최고액에 못지않은 금액이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기록도 찾기 힘들지만, 김병수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4년 간 그가 출장한 경기는 대략 100여 게임.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70골 이상 넣은 것 같다고 했다. 당시에도 부상 때문에 팀 훈련은 거의 못하고, 하루 2시간 정도의 훈련 후 집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합에 출장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 J리그에 데뷔한 후배 노정윤이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대표팀을 오가며 주목받았던 것과는 다르게 그의 일본 생활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그나마 있다면 일본 축구 주간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2회에 걸쳐 연재한 '김병수 특집'이 국내 모잡지사에 게재된 정도. 그 기사의 표제는 '새벽을 기다리며 인내한다'였다.
코스모 석유 당시 김병수의 포지션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프리롤인 듯?10 나고야 그램퍼스와의 천황배 경기에 출전한 적이 있는데, 김병수는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렸다. 한 골 넣고 전원 수비를 했다고 한다. 코스모에서 뛰면서 구단주를 가장 기쁘게한 날이었다.
여담으로 이 1993년 여름 그가 국내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뉴스를 탄 적이 있다. 물론 불발로 그쳤지만. 이미 발목에 이어서 양쪽 무릎에 칼을 댄 상태였다. 다행히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김병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 싫었을 것이다.
1997년 초 코스모가 해체되고 김병수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돌았으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지인의 주선으로 오이타 트리니타에 입단했고,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에 이른다. '비운의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을 만큼 안타까운 은퇴였다.
당시 오이타 트리니타에 대한민국 선수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한다.
지도자 경력[원본 편집]
코치 시절[원본 편집]
갈등 끝에 현역 은퇴를 결심하고 짐을 꾸린 것은 1998년 봄. 조용히 귀국한 그는 모교인 경신고에 잠시 머무르다 고려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게 됐다. 당시 고려대학교는 1994년 이후 계속된 스카우트 실패로 라이벌 연대는 물론 아주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 밀려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남대식 감독이 퇴진하고 김성남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당시 고려대에 속해있던 선수들은 박진섭, 최철우, 조세권, 박동혁, 이성재, 박민서 등이었다.11 그 해 연고전은 연세대의 2:0 승리였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고대의 압도적 우세였다. 페널티킥 두 개를 실축하는 바람에 패전의 멍에를 썼지만,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는 선이 굵은 전통적인 팀 컬러 대신 개인 전술과 아기자기한 조직 플레이를 중요시하는 섬세하고 효과적인 축구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욕 무대는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대학 선수권 대회였다. 1회전에서 연대와 맞붙어 접전 끝에 3:3 무승부를 기록한 다음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아주대학교와 대구대학교를 연파하며 결승에 오른 고려대학교는 양현정이 이끌던 단국대학교를 4:3으로 꺾고 우승컵을 안았다.
고려대에서 코치 발령을 기다리다 포항으로 내려간 것은 1998년 11월이었다. 김병수는 포철공고의 코치를 맡게 된다. 이후 첫 출전한 문광부 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지도자로서의 첫걸음을 상큼하게 내디딘 셈.12
포철공고의 포메이션은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팀과 유사한 형태의 3-5-2. 중앙 수비수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세우고 다시 그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는 다이아몬드형 시스템이다. 그런데, 한가지 독특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에서 보기 힘든 컴팩트 사커를 구사한다는 것. 전후방은 물론 좌우 측면의 간격도 극단적으로 좁히는 압박 전술이다. 스리백 앞에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더블 블란치로 세우고 때때로 4-4-2 나 3-4-3으로 급격한 전술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지 않아 어설픈 면도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것이었다.13
오히려 선수들의 공부를 강조했다. 이론을 중요시해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면 금방 선수들이 이해한다고.
영남대학교[원본 편집]
2008년 영남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14 1968년 창단된 영남대학교 축구부는 신태용 現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감독 이후 침체되어 있다가 2008년 부임한 김병수 감독의 헌신적인 지도와 확실한 팀 스타일하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의 부임 이후 영남대는 포항 스틸러스의 2군에 가까운 팀으로 거듭났으며, 그 패스 축구를 그대로 영남대에 이식시켰다.
2009년 춘계대학연맹전과 전국대학축구대회 8강에 오르면서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어 2010년에는 춘계대학연맹전 우승을 차지하며 대학 최강 자리에 올랐고, 추계대학연맹전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2년 춘계대학연맹전과 U리그 왕중왕전 4강, 추계대학연맹전에서 다시 한 번 우승컵을 손에 들었으며, 2013년도에는 비수도권 대학 최초로 U리그 권역예선과 왕중왕전을 동시에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14년에는 U리그 사상 최초로 권역별 전승과 더불어 대학팀 중 유일하게 FA컵 8강, 2015년 FA컵 16강에 올랐으며, 2015년 춘계대학연맹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6년에는 춘계대학연맹전, 추계대학연맹전, 전국체전, U리그 권역 우승까지 싹쓸이하며 대학축구계에서 전무후무한 ‘한 시즌 4관왕’ 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U리그 역사상 가장 긴 ‘74경기 무패’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이렇듯 2010년 이후 대학 최강 팀으로 입지를 다지고 잇으며, 명실상부한 대학 최고의 팀으로 굳게 자리잡고 잇다.
뿐만 아니라 신태용,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 신진호, 임채민, 류재문 등 뛰어난 동문선수들을 프로로 배출하며 ‘믿고 쓰는 영대산’ 이라는 별칭까지 붙으며 한국축구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손준호의 말에 따르면, 패스의 숫자로만 따지면 포항보다 영남대 시절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선수들의 패스 플레이를 훈련시킨다. 영남대 감독으로서 배출한 선수들이 자리잡아가기 시작한 시기라 유명한 선수가 많지 않지만, 2012~2015년 K리그로나 국가대표팀으로나 가장 핫한 선수 중 하나인 이명주와 김승대가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특히 이명주는 원래 센터백이었으나 수비수에 비해 공을 잘 다뤄 미드필더로 전향시켰고, 이것은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외에도 손준호, 임채민, 신진호, 류재문, 정원진 등이 대표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이 있는데, 그 외에도 엄청나게 많다.
이후 결과물은 다들 아시다시피 영남대학교로 대학 축구에서 우승할 수 있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아예 제패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냐 하면, 김병수 감독 부임 전에 영남대학교 축구부는 사실상 폐지 수순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런 축구부를 몇년 후에 모든 대학 축구 대회에서 우승을 시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좋은 선수들을 키워낸 것.
대학 축구부 감독으로서 윤성효, 조민국 등 다른 감독들도 좋은 성과를 낸 적은 많지만, 김병수 감독처럼 아예 폐지 수준의 축구부를 키워 내서 모든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없었다고 보면 된다.15
그런 가운데 영남대학교는 특유의 패스 플레이, 변태 전술, 수많은 빌드업 패턴 등 전술적으로도 대학축구답지 않은 수준이였기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는 변태 전술, 그리고 매년마다 영남대학교의 전술은 바뀌고 계속 변화했다.16 이러한 모습을 본 한준희 해설위원은 김병수 감독을 "한국의 펩 과르디올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학축구에서 보여준 뛰어난 전술 능력, 선수 육성 능력, 선수들에게서 극찬 받는 평가,17 그리고 유럽에서 수많은 감독들을 가르치고, 키워낸 베테랑 지도자 리처드 베이트가 P급 연수를 위해 한국에 왔을때 김병수 감독이 제출한 전술, 방법론 등을 보고 감탄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평가 등으로 '천재 감독' 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훈련을 많이 시키지는 않는 타입이다. 훈련은 거의 1시간 20분정도만 하는 편이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길 원하는 성향이다. [8]
2015년 FA컵 16강에 오를 때 성남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드레싱 룸을 취재한 기사가 올라왔다.
서울 이랜드 FC[원본 편집]
2017 시즌부터 서울 이랜드 FC 감독으로 임명되어 김병수 본인 지도자 인생 처음으로 프로 감독이 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
김병수는 개인 기술과 패스를 활용해서 삼각 패스를 이어가며 공을 점유한 상태에서 경기를 지배하고자 하는 소위 만들어 가는 플레이를 펼쳤지만 매 경기 요동치는 선발 라인업으로 실제로 선수단이 손발을 제대로 맞추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러다 보니 간혹 번뜩이는 패스 플레이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하프라인 인근에서 무의미하게 볼을 돌리기만 하다가 시간을 흘려보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선수단의 체력이 전체적으로 약해서 전반전과 후반전의 경기력이 정반대일 때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기대와 달리 2017 시즌 초반 성적은 너무 좋지 않아서 성남 FC 바로 위인 리그 9위에 랭크되어 있다. 항간에는 서울 이랜드가 투자도 안 하고 김병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평도 있지만, 엄연히 서울 이랜드도 챌린지 중위권의 전력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학 무대와 프로 무대의 차이에서 오는 경험 부족을 아직까지는 해결을 못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7~8월에 들면서, 경기력이 많이 올라갔고 5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며 중하위 권으로 팀을 끌어올렸으나 끝내 팀은 8위에 그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올 한해 많이 힘드셨죠? 죄송합니다. 저는 반드시 우리 서울이랜드를 일으켜 세울 겁니다. 내년에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팀의 뿌리를 먼저 잡고 그 다음에 이기는 경기를 하겠습니다. 아마도 올해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경기를 할 겁니다. 지금은 미흡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용기는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합니다.” - 2017 시즌이 끝난 후 김병수 감독이 눈물을 흘리며 한 말.
“
위 사진처럼 본인이 서울 이랜드를 일으켜 세울 것이라 했고 실제로 2018 시즌에도 팀에 잔류할 것으로 전망되어 팀에 남을 것이라고 기사까지 보도되었지만, 예상을 깨고 2017년 11월 17일 한만진 대표 이사와 함께 동반 퇴진하였다. 다만 퇴진 과정에 대해 구단 측의 개입이 있는 등의 논란이 있었고 감독만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내는데 최소 3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조기 퇴진이 너무 급했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구단 운영의 실태를 감안했을 때 자진 사임을 빙자한 사실상의 경질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김병수 감독의 축구를 제대로 펼치기에는 시간이 짧았다.18
김병수 감독 본인도 이를 알고 시즌이 끝나고 팬들에게 "내년에는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틀려질 것입니다"라고 팬들에게 자신감 있게 말하면서 내년의 시즌을 한번만 더 믿고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결국에는 이 발언을 하고 며칠 안 가 대표이사와 함께 사임했다.
그러나 스포츠니어스의 취재 기사에 따르면 그 이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
김병수 감독은 시즌 내내 한만진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 사실 김병수 감독을 노리는 구단은 해외를 포함해 꽤 많았다. 그런데 김병수 감독이 서울이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서울 이랜드 측은 “대학생과 젊은 선수 위주로 팀을 꾸려서 미래를 그려보자”고 했다. 영남대 시절 어린 선수들을 활용해 축구의 매력을 제대로 선보였던 김병수 감독은 이 제안을 듣고 곧바로 서울 이랜드 손을 잡았다. 당시 한만진 대표는 김병수 감독에게 전적인 권한을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팀에 합류하니 이야기가 달랐다. 1월에 팀에 부임하니 선수 선발의 대부분이 마무리 돼 있었다. 감독 뜻과는 상관없이 이미 구단 수뇌부가 입맛에 맞는 선수를 뽑은 것이다.
늘 만날 때마다 “우리는 있는 자원 가지고 열심히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김병수 감독의 말에는 큰 뜻이 숨어 있었다.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김병수 감독은 어떻게든 팀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시즌 막판부터 아마추어 경기장을 찾아 영입할 선수를 관찰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지인의 말은 이렇다. “어떻게든 3천만 원에서 4천만 원짜리 선수 한 명 찾아보겠다고 대학 경기하고 내셔널리그까지 다 보러 다녔다. 그런 애들 선수 좀 만들어 보겠다고 계속 발품을 팔더라.” 김병수 감독은 투자도 없고 선수 선발 권한도 없는 이 팀에서 진흙 속 진주를 찾아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약하면 김병수 감독은 서울 이랜드에서 제대로 된 감독 권한을 보장받지 못했으며, 선수 선발 권한은 간섭당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강원 FC[원본 편집]
2018년 강원 FC의 전력강화부장으로 부임하였으나 8월 12일 송경섭 감독의 뒤를 이어 강원 FC의 8대 감독이 되었다.기사
부임 당시 강원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으로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져 있었지만, 이후 8위를 지키며 잔류를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그 덕분인지 2018년 11월 22일 재계약 기사가 나왔다. 계약 기간은 3년.기사
하지만 서울 이랜드 FC에서의 실패 등으로 인해 프로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고, 실제로 2019년 K리그 1 개막전에서 상주 상무를 상대로 눈이 썩는 경기력을 보여 주면서 패배해 팬들의 불안함을 초래했다. 하지만 춘천 홈 개막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인 울산 현대를 상대로 0:0으로 비긴 것은 물론 후반전에는 대등한 경기력까지 보여 주었고, 3라운드 전북 현대 모터스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했다.19 이 승리는 3,111일 만의 전북전 승리라고 한다.
이후 점차 빌드업 기반 패싱력을 극대화하면서 개개인이 볼을 많이 만지면서 선수도, 관중도 모두 재미를 느끼는 축구이자 지나치게 패스에 집착하기보다는 효율을 살리는 방법을 강구하는 김병수 특유의 뚜렷한 색깔인 병수볼20 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8라운드 제주 원정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 8분 만에 1명이 퇴장당하고 전반전에 교체 카드 2장을 소진한 상태에서 4골을 넣어 4-2 승리를 만드는 명장면을 만들기도 했다.21
그리고 6월 23일 포항전 0:4로 지고 있던 경기를 5:4로 역전시키는 기적을 선보였다.
7월 3일 FA컵 8강전에서 대전 코레일에 2:0으로 패했다. 주전으로 뛰는 선수 단 1명도 내지 않고 풀로테이션을 돌렸으며 교체 카드는 쓰지도 않았다. 사실상 버린 경기. 이번 FA컵은 강팀들이 대거 탈락하면서 우승 가능성이 비교적 높았기에 사상 첫 아챔 진출, FA컵 우승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버린 것에 대해 비판받고 있다.22 그리고 서울 원정에서 서울을 역전으로 잡을 뻔했다가 무승부로 끝났다.
여타 K리그 감독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다수의 감독은 용병을 중심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을 펼치지만 김병수 감독은 팀원 전체를 활용하는 전술을 사용한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자기 색깔을 입히는 2019 시즌에서 제리치는 주전에서 밀려나 교체 자원에 가깝게 되었고 신광훈, 한국영이 김병수 감독 아래에서 핵심 선수로서 활약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시즌이 점점 진행되면서 강원 FC의 색깔은 계속해서 짙어지며 시즌 초반 하위권을 달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좋은 페이스로 승점을 쌓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김병수가 이끄는 강원은 K리그 역사에 드문 유기적인 전술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팀이며, 앞선 프로팀에서의 실패들로 인해 "거품이다", "프로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라며 받았던 부정적인 평가를 본인이 직접 긍정적으로 뒤엎고 있다. 한준희 KBS 해설 위원은 오히려 강원이 다른 해외 팀들에 비해 더 실험적이고 과감한 전술을 펼치고 있다.며 극찬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우승할꺼 아니면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 가는건 아무 의미도 없다"라는 말을 한적이 있어23 막판에 고의패배로 순위를 망쳐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서 멀어지거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챔피언스 리그권에 들었지만 그냥 기권하고 다른 구단에 넘기거나, 챔피언스 리그에 갔지만 그 경기서 태업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미 FA컵을 고의적으로 내던진 전적도 있다.
33라운드 종료 후 6위로 상위 스플릿에 들어갔다. 다만 김지현, 디데이 시즌아웃 이후 마땅히 스트라이커로 세울 자원이 없어 계속 부진 중이다. 미드필더인 최치원을 스트라이커 자리에 세우고 있지만 맞지 않는 옷이라 1인분도 못 해내고 있고 그렇다고 정조국을 세우면 쉬운 찬스도 빈번하게 놓치고 있으니 사실상 주전으로 세울만한 스트라이커가 없는 상태에서 스플릿 라운드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 탓에 팬들은 김지현, 디데이, 정석화의 복귀와 겨울 이적시장에서의 영입이 있을 내년을 더 기대하고 있다.
2019 시즌 베스트일레븐 K리거의 선택 투표 결과 전략, 전술이 가장 좋은 감독 1위, 가장 가르침 받고 싶은 감독 1위 등 그 외 감독 부문에서 TOP 5 안에 모두 들었으며, 종합 430표로 2위 최용수 감독을 압도적으로 따올리며 사실상 김병수 감독을 제외한 투표 결과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1위를 기록했다. 베스트일레븐에 따르면 K리그 선수들이 그만큼 김병수 감독을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 기사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임대 영입한 김승대 선수를 바탕으로 첫 경기부터 병수볼의 진가를 발휘했다. 5월 10일 1R에서 FC 서울에게 먼저 실점을 먼저 하고도 3골을 내리 득점하여 역전하였다. 특히 3번째 골은 김병수 감독이 19시즌부터 하고 싶었던 플레이라고 언급했다.기사
2019 시즌의 경우 김병수 감독은 수비진이 불안하다고 판단, 자신들이 최대한 공을 많이 소유함으로써 상대 공격에 노출되는 시간과 빈도를 줄이고자 볼 소유에 가장 큰 전술적 목적을 뒀다.
볼 소유를 위한 방법은 공간에서의 수적 우위 유지였으며, 그것을 위해 강원은 전형을 스스로 파괴, 출발은 포백으로 해도 경기 중에는 스리백으로 변화하는가 하면, 전문 센터백은 김오규 1명만 세우고 신광훈, 오범석, 윤석영 등을 변형 센터백으로 쓰기도 했으며, 센터백을 줄이면 수비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일반적 관념을 멀티 플레이어의 활용을 통한 전 영역에서의 숫자 싸움 우위로 전환시켰었다.
하지만 2020 시즌의 경우 수비에 임채민과 김영빈, 골키퍼 이범수가 가세하며 기본 수비 전력이 상승하면서 포지션 싸움에서의 우위가 가능하다고 판단, 19시즌과 같은 전형 파괴를 굳이 감행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공격 역시 젊은 선수들의 재능을 깨우며 힘을 얻었지만 리그 최상위권에는 미치지 못했던 19시즌과는 달리 김승대, 고무열이 가세하며 질적, 양적으로 수준이 올라가면서 볼을 공유하며 경기를 주도하고, 패스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기본 스타일은 유지하지만 수비에서 공격까지 1대1 승부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2020 시즌 김병수 감독의 전술적 목적은 공격 횟수의 최대화에 있다. 상대에게 공을 내주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빼앗아 와서 다시 공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 출발은 강한 수비다. 서울, 수원처럼 라인을 내려 공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라인 사이의 간격을 좁게 유지하며 포지션 싸움에서의 우위를 통해 강하게 상대를 몰아 다시 공의 소유권을 가져온다.24
그 다음은 빠른 속도로 전환한다. 공을 소유하면 전방과 측면의 기민한 공격수들이 뛰어나간다. 세 선수가 삼각형 형태를 유지하며 빠르게 빌드업을 해 나가던 지난 시즌과 달리 좌우 측면의 김영빈과 신광훈, 중앙의 한국영, 이영재, 측면에서 중앙으로 이동하는 정석화 등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직선적인 공격 전개를 한다.
심플하고 직선적인 전개를 추가해 공격 전환의 속도를 한층 높인 병수볼 시즌은 겨울이적시장 보강이 어떤 의도로 이뤄진 것인지를 개막전부터 증명했다. 물론 숙제도 남겼는데,상대가 공간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때의 공략법에 있어서는 부족함을 보여주었으며, 이 부분은 지난 시즌 완성한 하프스페이스 공략 중심의 기존 전략을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상주와의 2라운드에서는 2골을 헌납하며 아쉽게 2:0으로 패했는데, 이날 경기 볼 점유율에서 61:39로 상주를 월등히 앞섰으며, 또 상주(10회)보다 11회 슈팅을 시도하면서 기회도 많이 만들었지만 승부를 결정지을 `한 방'의 부재로 무너졌다.
유효슛은 2회에 불과해 상주(4회)에 2배 적게 차이 났고 상대 역습에 무리한 지연 행위로 인해 2장의 옐로카드를 받았다. 그러던 사이 상주는 라인을 올려 공격을 펼친 강원의 뻥 뚫린 뒷공간을 파고들어 한 차례의 경고도 없이 알토란같은 득점을 챙겼다.
결과적으로 병수볼의 핵심인 공격적인 축구 스타일이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후반 막판 추격을 위해 하프라인까지 라인을 올린 것이 완패의 화근이 됐던 것이다.
상주전 패배 이후, 이어진 경기들에서는 2승 2무를 기록하며, 비교적 순항했다. 특히 전북전 1:0 승리 등으로 잠깐이나마 리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울산전부터 팀은 가파른 하향세를 겪기 시작하는데, 울산전 0:3, 포항전 0:2, 대구전 1:2, 그리고 승격팀 부산에게마저 2:4로 대패하면서 4연패 수렁에 빠진 흐름이 현재진행형이다.
4연패가 이어지자 강원 팬이나 여타 팀 팬들에게서 조금씩 혹평이 나오고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필드 중앙의 점유율 확대를 위해 전진 배치되는 측면 수비 자원의 뒷공간을 노리는 상대팀의 측면 위주 공격에 여러 차례 실점한다는 지적과 고무열이 예상 외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기대를 모았던 김승대가 서울 전 이후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전반적으로 결정력이 아쉬운 점,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외인 용병을 배제하다시피 한 국내선수 위주 운용의 한계 등이 거론되고 있다.
특히 선수 영입과 기용 관련해서는 포탈 사이트 등에서 점차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기존에 준수한 자원이었던 제리치, 발렌티노스 등을 떠나보내고, 김오규 같은 기존 강원 선수들을 밀어내면서 새로 영입한 임채민, 김승대 등 영남대 출신 선수들이 생각보다 부진함에 따라 편애 논란, 파벌 논란 등도 조금씩 제기되고 있다.25
전술 스타일[원본 편집]
한준희 해설위원은 한국의 펩 과르디올라라고 평가했으며, 김병수가 애용하는 전술을 축구팬들은 마우리치오 사리의 '사리볼'을 빗댄 병수볼이라고 부른다.
통칭 병수볼로 정의되는 1센터백+4풀백로 대표되는 독특한 포어리베로 전술과 제로톱이라는 K리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전술을 사용한다.
현대 축구의 트렌드는 김병수 감독의 전술에 모아져 있다, 김병수 감독이 본인이 끊임없는 연구와 공부를 통해 본인이 직접 습득하고, 만들어낸 것이다.
패싱축구를 기반으로 공을 점유하며 플레이 하는데, 영남대학교에서 보여준 모습은 매년 미묘하게 변화하고, 템포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다. 완벽함을 그 과정을 간소화시키는 느낌도 있다. 특히 강팀과 약팀을 상대할때 플랜이 다르다. 선수들이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행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습으로 간결한 플레이 수비라인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강팀과의 경기에서 승부를 보는 반면에는, 본인들보다 기술적으로 부족한 팀을 만나면 짧은 패스와 점유율과 넓은 라인으로 상대방을 공략하는데, 정말 다채로운 전술을 가지고 있고, 플랜이 일정하지 않다.
약팀과의 경기에서는 전방에서부터 눌러버리며 상대의 공격 진행 자체를 막아버리고, 반대로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중앙으로 좁혀서 길목을 틀어막고 실점 가능성을 최소화 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창의적인 것이 아닌, 마치 정해진듯 약속된 플레이로 점유율 축구를 진행하는데, 공격 루트를 진행할때 선수들의 움직임이 많은 훈련과 연습으로 이루어진듯한 느낌을 준다. 경기장 안에서 변화하는 흐름을 잘 파악하기에, 용병술이 적중하는 편이 높다.
매번 플랜 B가 갖춰져 있으며, 라인 간격을 굉장히게 중요하게 여긴다. 공격과 수비를 빠른 템포로 전환하면서, 스피드한 패싱 플레이로, 점유율을 유지하되 찬스의 다양성을 위해 공격 패턴을 다양하게 가져간다.
앞으로 K리그를 이끌어갈 감독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김병수 감독이 선수를 보는 관점[원본 편집]
김병수 감독은 대학교 시절에 투박하더라도 체력적인 강점이 뚜렷하고 부지런한 선수를 좋아하는 편이다. 추측으로는 감독 본인이 기술적인 능력을 키울 자신감이 있기에, 베이스가 충실한 선수를 선호한다는 평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영남대학교 시절부터 적중해왔기에 고평가 요인이다. 즉, 단순히 엘리트 코스가 예정되어있는 선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발전 가능성이 높은 선수를 선호하고 그 선수를 확실히 키워내는 편이다.
김병수 감독의 안목은 한국 축구계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힌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영남대학교가 축구 명문이 아니라 아직까지 전설적인 선수를 키워낸 것은 아니지만, 김병수의 제자들은 여기저기서 프로 생활을 하며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선수 지도능력은 검증됐다고 볼 수 있다.
이명주가 대표적인 예다. 포철공고 재학 당시에도 왕성한 활동량을 가지고 있었고 투쟁적인 선수였지만 기술적인 메리트는 없었었기에 대학교 진학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있던 이명주를 김병수 감독이 영남대학교로 데려왔고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김병수 감독은 선수 본인의 베이스가 탄탄하다면 기술적인 부분을 발전시키게 만들어, 정상급 선수로 만들어 낼수있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김승대는 이보다는 좋은 기술적 능력을 보유했었지만, 오프더볼의 움직임이 아쉬웠었던 부분이 문제였던 선수였다. 김병수 감독은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포착했고, 영남대학교의 훈련 방식 자체가 패스와 움직임을 모토로 삼았기 때문에, 2% 부족했던 이미지의 김승대를 라인을 꺠트려버리는 스트라이커로 만들어버리며 선수를 완성시켜 나갔다, 이후 김승대는 K리그 영플레이어를 수상하게 된다.
특히 요즘 사람들이 표현하는 육각형 미드필더를 만들기에 김병수 감독만큼 최적화되어 있는 감독은 없다, 기본적인 체력과 활동량을 가진 선수를 데려와 본인의 기술적인 훈련과 전술로 발전시키는데, 김병수의 제자들을 살펴보면 전부 평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원래 그럴 예정이었던 선수,엘리트 선수들 아니였냐고 반문을 할 수 있지만 고교시절에는 죄다 기술적인 면이 부족하거나 움직임이 미흡했던 선수들이라는 점을 감안할때 확실히 선수 육성면에서 확실한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선수들로 하여금 김병수 감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해주는 원동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포철공고 선수들에게 경기가 끝나면 트랙 한켠에 모여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게 했다. 하지만 러닝은 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선수들이 시합 후 또 뛰는 것을 싫어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는데 고려대 코치를 할 당시 결승전에 올랐다고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경기장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우승을 했으니 높은 사람들 앞에 도열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김병수가 누구냐고 난리가 났었다.
이명주가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면서 이에 관한 인터뷰가 많다. 그중에 2013년 인터뷰가 어마어마하다. “아직까지 중원에서의 위치 선정 부분에서 조금 취약점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활동량이 좋고' 기술이 좋은 선수이기에 상대 선수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플레이를 선보인다. 템포 또한 빠른 선수다.”라며 여전히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릴적 포항 한홍기 감독이 1군에 합류시켜 훈련시킨 인연과 이후 포항에서 코치를 하고 영남대에서 포항 선수를 많이 길러낸 것으로 포항팬들 중 김병수를 반레전드 취급하는 사람이 꽤 있다. 거기에는 포항에서 지원해주려고 했던 브라질 유학을 다녀올수 있었다면 몸이 성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포함된 듯하다.
선수로서 유럽 진출을 해보는 게 꿈이긴 했으나, 그 꿈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45세가 되기 전에 세계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아 세계로 나가보는 게 꿈이라고 한다.
2019년 48세로 결국 그 꿈은 좌절됐다...
P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 26 했다. 이 자격증 강습회에서 세계적인 명장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던 영국 출신의 리처드 베이트 FIFA강사가 김병수 감독의 전술적 아이디어에 대해 엄청나게 극찬을 했다고 한다.
서울 이랜드 FC 감독으로 부임 할 때 신진호가 SNS로 김병수의 취임 기사를 올리며 앞으로 새롭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물론 팀의 결과는 알다시피...- 김병수가 다니던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헬스클럽 관장이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관장님의 딸.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은 고등학생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없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김병수 감독은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 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고. 27 부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2년을 못 채우고 김병수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남편이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당시 훈련 부담이 적다보니 가족과 함께 지낼 시간이 많이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 필름으로 보관된 그의 경기 장면이 많지 않다. 다행히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김병수가 직접 몇 장면 녹화한 것이 있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불행하냐는 질문에 선수로서의 김병수는 불행했으나 인생에서는 불행하지 않다고 답했다. 축구가 여전히 꿈이기 때문이라고. 마음에 흔들릴 때면 '나는 한국 축구를 위해 큰 일을 해야 한다.'라는 사명감을 자신에게 부여해서 자신을 다잡는다고 한다.
서울 이랜드 FC 감독을 맡기 전까지 모종의 사유, 때문에 K리그 팀 감독을 맡지 못한다는 설이 돈 적이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당시 포항 스틸러스 코치직에서도 물러났고 이후 포항 스틸러스 코치, 감독의 하마평이 오를 때 마다 발목이 잡히다가 황선홍이 물러나고 나서 포항 감독을 맡을 기회가 왔으나 성사되진 않았다.
정작 본인은 '천재'라는 본인의 별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게 김병수의 선수 시절에 대한 기록을 명백하게 찾기 힘들다는 점을 이용해 28 , 김병수의 선수 커리어를 과장시킨 글이 떠돌아다니고 결국 본인도 원하지 않게 천재라는 타이틀로 박제돼버린 것. 김병수 본인이 천재라는 별명을 꺼릴만 하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김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