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사극

끌채


원문사극(轅門射戟)은 중국 후한 말의 고사로, 후한 말의 군웅인 여포가 원문에 (戟)을 세우고 그 곁가지 날을 화살로 쏘아 맞춘 일화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던 어려운 사태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원만하게 처리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정사 삼국지[편집 | 원본 편집]

術遣將紀靈等步騎三萬攻備,備求救於布。布諸將謂布曰:「將軍常欲殺備,今可假手於術。」布曰:「不然。術若破備,則北連太山諸將,吾爲在術圍中,不得不救也。」便嚴步兵千、騎二百,馳往赴備。靈等聞布至,皆斂兵不敢復攻。布於沛西南一里安屯,遣鈴下請靈等,靈等亦請布共飲食。布謂靈等曰:「玄德,布弟也。弟爲諸君所困,故來救之。布性不喜合鬬,但喜解鬬耳。」布令門候於營門中舉一隻戟,布言:「諸君觀布射戟小支,一發中者諸君當解去,不中可留決鬬。」布舉弓射戟,正中小支。諸將皆驚,言「將軍天威也」!明日復歡會,然後各罷。
— 삼국지 위서 여포장홍전

정사 삼국지 『위서 여포장홍전』에 나오는 일화다. 건안 원년(196년)에 원술기령에게 보병과 기병을 합쳐 3만 명의 군대를 주어 당시 소패성에 주둔해 있던 유비를 쳤다. 이때 유비는 여포에게 도움을 청했고, 여포는 이에 보병 1천 명과 기병 2백 명을 이끌고 가서 기령과 유비 사이를 중재했다.

이때 기령을 말리면서 여포는 군영의 입구를 지키는 무관더러 극을 세우게 시킨 뒤 활을 쏘아 극의 옆에 달린 날(小支)를 맞추는 묘기를 선보였다. 일종의 무력 시위였던 셈이다.

삼국지연의[편집 | 원본 편집]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 또한 정사와 거의 다를 바 없지만, 소설적 상상력을 더했다.

훗날 도겸으로부터 서주를 양도받은 유비에게 근거지를 잃고 방랑하던 여포가 의지했고, 유비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포를 대접하면서 소패에 머물도록 한다. 조조는 유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략으로 원술을 정벌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보냈고, 유비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면서 서주를 장비에게 맡겨놓고 원술 토벌을 시작하였다. 여포는 유비가 정벌을 떠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서주를 기습하여 탈취하기에 이르렀다.

졸지에 앞으로는 원술, 뒤로는 여포에 끼여 갈곳을 잃은 유비는 마지못해 여포에게 화친을 청했으며 여포는 마치 큰 은혜를 배풀기라도 하듯 소패에 유비를 머물도록 하였다. 유비와 여포의 입장이 180도 뒤바뀌는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원술은 여포에게 은밀히 접선하여 자신의 상장 기령이 유비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소패를 공격할 것이니 이를 모른척 해달라며 뇌물을 바쳤다. 여포의 부하들도 원술의 힘을 빌어 유비를 제거하면 서주는 손쉽게 여포의 땅이 될 것이라며 동조했으나, 여포는 평소와는 다르게 갑자기 의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소패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병한다.

소패성 근처에 도착한 여포는 유비와 기령을 자신의 군영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개최하면서 양측이 싸움을 거두고 각자 근거지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여포 자신이 직접 150보 떨어진 거리에서 활을 쏘아 군영 입구에 세워놓은 방천화극의 곁가지 장식을 정확히 맞추면 양측은 즉시 싸움을 멈추어야하며, 화살을 빗맞출 경우 싸워도 괜찮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만일 자신이 화살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다면 여포가 그 세력을 직접 공략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세력이 작은 유비는 기꺼이 여포의 제안에 응했고, 기령은 유비를 제거하기에 충분한 군사를 거느렸으나 당장 눈앞의 여포가 두려워 거절하지 못했다.

여포는 양측의 동의를 얻은 후, 150보 밖에서 방천화극의 곁가지 장식을 겨누어 화살을 쏘았는데 놀랍게도 화살은 정확하게 여포가 말한 곁가지 장식을 궤뚫었고 유비와 기령은 대치를 멈추고 각자의 근거지로 회군하게 되었다.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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