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

요하(遼河), 또는 랴오허는 만주와 화북 사이의 평야지대를 흐르는 강으로 내몽고에서 발원하여 발해로 들어간다.

지리[편집 | 원본 편집]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고대부터 요하는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거쳐가곤 했던 곳으로 특히 우리 한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강이다.

역사가 발흥하기 전 선사 시대에도 요하 일대는 많은 인구가 밀집하던 지역으로 빙하기가 끝난 뒤 많은 인구가 강변을 따라 정착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모여 살던 이들은 서기전 6천년에서 5천년 전, 홍산 문화라는 큰 규모의 신석기 문화권으로 발전하였고 여기서 발생한 농경문화는 동북아 제민족과 북방 유목 민족들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더욱 발전된 고대 국가들이 요하 유역으로 들어서게 되니, 서기전 20세기에서 7세기 경 요서를 중심으로 일어선 고조선은 요동과 한반도를 향해 세력을 확장하며 서기전 7세기부터 쟁쟁한 중원 강국들과 대적할 만한 강국으로 번영했으나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며 요하일대를 상실한 채 한반도로 세력이 위축되었다.[1]

한민족이 요하에서 밀려나고 요하 일대는 한나라의 영향권 안에 들었으며 후한 말과 삼국시대(중국) 요동 태수 직을 맡고 있던 공손씨 가문(동연)은 189년~238년 동안 요하 유역을 점유했지만 사마의의 위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이 시기 요동은 어느 동방 세력의 지속적인 침공이 이루어지는데, 태조왕 시절부터 시작된 요하 방면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의 숙원 사업이었다.

때문에 중원 세력과 고구려의 공방전이 이뤄졌지만 3세기 경 선비족의 일원인 모용선비가 요동을 점유하고 후연을 세우며 요하는 선비족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동을 포함한 요하 지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5세기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로 요하는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온다.

관련[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이때 도읍지도 요서에서 평양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