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와라 유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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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5년(1872년)에 촬영된 요시와라 유곽

요시와라 유곽 (일본어: 吉原遊廓 (よしわらゆうかく) 요시와라 유우카쿠)는 일본의 에도 시대때 있었던 막부에서 공인한 거대 유곽 지대(사창가)이자 3대 유곽(교토의 시마바라 유곽, 오사카의 토비타 유곽) 중 하나로 제일 유명한 유곽이다. 오늘날 우구이스다니역. 즉 도쿄도 다이토 구 센조쿠 4번지 및 3번지의 일부(우에노 ~ 아사쿠사)에 해당되며 현재도 해당 거리는 소프랜드와 헬스, 캬바쿠라 등 유흥 및 변종 성매매 업소가 즐비하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요시와라 유곽은 제일 유명한 사창가이지만 흔히 생각하는 성관계만 하고 끝내는 단순한 집창촌이 아닌 고급 소바 가게 및 민속화 가게가 즐비한 유흥가를 겸한 번화가였다. 규모도 매우 커서 부지는 2만 여평, 전성기때는 수천 명의 유녀들이 소속되어있었다. 요시와라에는 죠칸지라 불리는 절이 있는데 성병이나 과로로 죽은 유녀, 요타카들이 묻히는 곳으로 각 이름조차 없고 그저 "태어나서는 고통스러운 세상, 죽어서는 죠칸지" 라 적힌 공양탑이 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원래는 은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종언지 준부(오늘날 시즈오카 시 아오이구)에 있던 유곽촌인 나초죠 유곽의 일부가 옮겨진 것이 시작이였다. 에도 니혼바시 근처(오늘날 니혼바시 닌교쵸 (日本橋人形町))에 설립되었고 메이랴쿠의 대화재 이후, 센소시 뒤쪽의 니혼츠제로 이전하여 니혼바시 근처를 구 요시와라(元吉原), 니혼츠제 근처를 신 요시와라(新吉原)라고 불렀다.

에도 막부는 에도성을 수리하면서 서민들의 이주를 강요했고 공사를 위해 고용된 남자 인부들이 늘어났기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유곽집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많아서 이주가 불가능한 유녀집은 아예 유곽을 설치해서 집창촌으로 만들었는데 허가를 받지 않고 운영하거나 이미지 관리 차원하에 이전을 중용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에 골머리를 앓던 찰나 별도의 유곽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해 1612년(게이쵸 5년)에 교토에 유곽을 운영하던 쇼지 진에몬을 대표로

  1. 손님은 하룻밤만 묶을 수 있다.
  2. 합의된 것이 아는 속아서 팔려온 여자아이들은 부모에게 돌려보낸다
  3. 범죄자는 신고한다.

라는 3가지 조건을 제시, 요시와라 유곽의 터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바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터가 정해진 뒤 5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요시와라 유곽이 설치된 것이다. 그 후 "유녀는 지나치게 화려한 치창을 하지 말 것, 요시와라 이외의 장소에는 유녀집을 설치하지 말 것, 유녀를 파견시도하지 말 것" 이라는 규칙을 추가, 1640년(간에이 17년)에는 "유곽의 야간영업은 금지할 것" 이라는 규칙이 추가되어 목욕탕에서 매춘을 하는 매춘부(유나)들이 생겨났다. 1657년 3월 2일 메이레키 대화재가 일어나면서 구 요시와라는 전소, 결국 니혼츠제(현재의 센조쿠 4쵸메)로 장소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신 요시와라였다.

1930년에 촬영된 요시와라 거리

메이지 시대부터 정계와 재계의 사교 장소는 게이샤의 마을인 하나마치(꽃마을)로 옮겨가면서 요시와라 유곽은 축소화, 유녀들의 인기가 떨어지고 게이샤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요시와라 유곽은 간간히 소수만 이용하는 한물간 것으로 취급되었다.

전후, 순결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 계열 여성단체인 부인 교풍회 운동 등으로 쇼와 31년(1956년) 5월 21일 성매매 규제법이 통과되고 1957년 4월 1일에 시행되면서 요시와라 유곽들은 전부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소프랜드 등 변종 성매매업소들이 생겨났다.

구조[편집 | 원본 편집]

1846년에 기록된 요시와라 유곽 지도(신 요시와라)

지도에 나온 것처럼 북쪽 정문(그림에서는 오른쪽에 위치) 을 중심으로 구획은 십(十)자로 나뉘어 있었다. 대문과 이어지는 중앙의 거리가 나카노쵸라 불린 번화가로 오이란을 소개시켜주는 찻집인 하카테차야와 오이란을 불러 연회를 열 수 있는 토로, 오이란이 있는 고급 가게(오오미세)는 나카노쵸에 몰려있었고 오이란도츄(오이란 행렬)도 나카노쵸에서 했었다. 골목길에는 흔히 유곽 매체에서 묘사되는 격자창이 달려있고 그 안에 유녀들이 앉아서 손님을 끌어모으는 가게가 하리미세로 코우시급의 상급 유녀부터해서 중하급 유녀들이 있는 곳이였다. 오이란을 살 수 없는 중하급 손님들은 하리미세로 갔으며 키리미세같은 싸구려 가게는 외곽에 위치해있었다.

어두운 면[편집 | 원본 편집]

참고- 귀멸의 칼날 마이너 갤러리의 요시와라에 대한 글.

당대에는 인권 개념이 없었고 그 조차 근세에서야 대두했기 때문에 요시와라 유곽은 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이기도 했으나 집창촌이라는 특성상 성매매의 부정적인 면모를 대표로 어두운 면도 매우 많았으며 하단에 서술된 요시와라 유곽을 다룬 대중매체에서도 장르와 연령대 안가리고 어두운 면은 빠지지 않고 다룬다.

일본은 성적으로 좀더 개방적이었고 에도 막부에 와서야 유교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조선보다 유교의 영향력이 낮았지만, 풍기문란 수준으로 개방적이거나 아예 유교사상을 배척한 것은 아니였다. 때문에 사회적 매장을 각오하고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겠다는 여성은 없었으며 유녀들의 사회적 인식도 당연히 좋지 못했다.[1] 그래서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 공급은 전부 인신매매로 이루어졌는데 아동인권 개념이 없었던 만큼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였기에 가난해서 입을 줄이거나 빚이 많다는 이유로 10세도 되지 않거나 성인식도 안치룬 어린 딸을 업자에게 팔아넘기고[2] 업자는 각 유곽에 파는 식으로 유녀들을 외부에 충당하거나 피임 실패로 임신한 유녀가 아이를 출산할 시 그 아이들도 유곽의 소유물이 되었기에 남자아이면 유곽 종업원(기둥서방)으로, 여자아이는 유녀로 키우는 식으로 인력을 충당했다. 이렇게 유녀들 전부는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유녀가 되었고 일정한 고용기간 내에 빚을 갚는다는 목적으로 일을 했는데 비용은 유곽에서 지원해주는게 아니라 식비부터해서 치장비용, 방세는 전부 유녀 자신의 수입과 사비에서 지출해야했고 유곽 주인에게 뜯기는 마진세도 매우 많았으며 동생(카무로)은 필수적으로 둬야했는데 카무로의 의식주도 유녀의 수입으로 해결하는 식이라 유녀들은 스스로 빚을 갚아 나간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특히 오이란급의 고급 유녀라면 뜯기는 비용이 일반 유녀보다 많았기에 오이란도 나가기는 불가능했다.

특히 매춘 문제의 0순위라 볼 수 있는 성병 감염은 취약한 것을 넘어서서 창궐했는데 만일 유녀가 성병에 걸린다면? 시름시름 앓다가 갑작스레 죽거나 발각되면 유곽에서 쫓겨났는데 오갈 곳이 없으니 돗자리를 들고 거리에서 매춘하거나 거리에서조차 매춘을 못하면 아예 도시 밖으로 나가 뗏목같은 것을 띄우고 강가에서 매춘을 하는 요타카[3]로 전락해 죽는 게 나은 최악의 삶을 살았다. 이 요타카는 일반 유녀만 아닌 코우시같은 상급이나 오이란도 얄짤없었으며 죽은 유녀는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않고 대충 멍석에 말아 강가에 버리거나 매장하는 식으로 방치했다. 유녀들의 평균 수명은 23세. 보통 15살부터 정식 유녀가 되었는데 아무리 옛날에는 의료 문제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짧았다해도 유녀만큼은 심각하게 짧은 수준이며 성병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화장품의 주 재료였던 수은과 납 중독, 좁은 가게 내의 비위생적인 집단 생활과 낙태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당시에는 의료 기술 수준이 낮았으니 낙태시술도 매우 위험한 것들이 많았다.

만일 운좋게 성병에 안걸리거나 성병에 내성이 생겨 건강을 유지했다해도 20대 후반이 되면 빚을 다 갚았다는 이유로 낙적이 되었으나 실상은 가치가 떨어져서 일방적인 해고, 내쫓는 것에 가까웠고 어릴 때부터 매춘과 가무만 배웠으니 달리 할 일이 없어 반토신조가 되어 후배 유녀들을 양성하거나 오이란의 시중담당, 호객꾼, 뚜쟁이로 유곽에 계속 남게 되었다. 즉 한번 유곽에 팔려오거나 태어났다면 죽을 때까지 유곽에 묶여사는 신세였다.

결국 유녀들의 유일한 구원이자 안전하게 유곽에서 나가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27세가 되기 전에 단골손님이 빚을 갚아주는 대신 첩이나 부인이 되어 유녀에서 낙적되는 것. 전문 용어로 미우케가 되는 것이였다. 문제는 미우케 비용은 화대비용보다 비쌌고 오이란은 배로 더 비쌌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자도 미우케를 하는건 매우 힘들었다.

이 때문에 요시와라 유곽을 현대 자료에서는 현대적인 공창제도가 아닌 막부가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묵인한 인신매매·성노예 소굴로 보고 있다.

관련 창작물[편집 | 원본 편집]

만화/애니메이션
  • 귀멸의 칼날 - 도깨비가 사는 유곽편의 주요 무대.
  • 오오쿠 - 남성들이 불치병에 걸려 단명하게 되어 여자와 남자의 사회 역할이 반전된 판타지 대체역사물로 요시와라 유곽도 유남(남창)이 주로 가게 되었다.
  • 은혼 - 작중 등장하는 사창가 요시와라 도원향은 이 요시와라에서 따온 것이다.
  • 염한 - 주인공의 이름 요시와라 시로의 성은 이 요시와라에서 따왔으며 해당 만화는 쇼와와 메이지, 에도 시대의 특징을 따온 가상의 배경이라 유녀 및 유곽이 심심하면 등장한다.
  • 사쿠란 - 배경부터가 요시와라 유곽이다.
게임
노래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요시와라역은 동명의 철도명으로 도쿄도의 요시와라와 요시와라 유곽과는 관계가 없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 유녀 (오이란)
  • 토비타신치 - 오사카에 있는 유곽으로 공창제 폐지 이후 사라진 요시와라와 다르게 토비타신지는 요리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놓고 운영하고 있다. 변형된 요시와라 거리와 다르게 건물만 바뀌었을 뿐 원형 자체는 유지되고 있다. 오사카에는 이곳 말고도 '○○ 신치' 라고 불리우는 유곽들이 있는데 규모는 토비타에 비하면 떨어진다고 한다.

외부참조[편집 | 원본 편집]

블로그 포스팅
위키

각주

  1. 비단 유교 문화권만 아니라 매춘부의 사회적 인식은 전 세계적으로 좋지 못했는데 종교가 들어서기 전의 고대사회나 성적으로 개방적인 곳도 보수적인 곳보다 그나마 나았다는거지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존중받지는 못했다. 그 예로 그리스의 헤타이라(고급 매춘부)인 프리네(별칭은 네이아네)는 여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법정에 섰는데 이 여신을 모독했다는 것이 어느 한 예술가가 아프로디테 여신을 그리기 위해 프리네를 모델로 세웠기 때문이였다.
  2. 단 이 인신매매도 부모가 합의하에 판 것만 인정되었지 아이의 부모를 속이고 요시와라에 몰래 팔거나 납치해서 파는 건 불법이였기에 불법으로 팔려온 여자아이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여자아이나 아녀자가 실종되면 1순위로 수색하는 것이 요시와라였다. 실제로도 어떤 부모는 딸을 아는 지인에게 양녀로 보냈는데 그 지인이 양녀로 온 아이를 요시와라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부모의 신고로 아이는 부모에게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었다.
  3. 비단 요타카는 이런 성병으로 쫓겨난 전직 유녀만 아닌 나이가 들어서(토메소데신조조차 못될 나이) 매춘에 뛰어든 여성도 많았는데 기록에 따르면 40대 중년은 물론이고 70대 노년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요타카는 집이 없었다보니 야쿠자에게 의탁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나마 안전지책이 있던 유녀보다 더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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