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난

왕자의 난은 조선이 건국한 이후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정치적 계산에 따라 그의 아들들이 세력을 결집하여 왕위 계승을 위해 혈투를 벌인 2차례의 사건을 일컫는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태조 이성계는 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조선 건국 이전 고향에서 맞이한 한씨(신의왕후)였고 두 번째 부인은 조선 건국 과정 도중 개경에서 맞이한 강씨(신덕왕후)이다. 태조는 한씨와의 사이에서 이방우·이방과·이방의·이방간·이방원·이방연을 포함하여 6남 2녀를 얻었고, 강씨와의 사이에서는 이방번·이방석을 포함하여 2남 1녀를 얻었다.

다만 강씨는 태조와 혼인할 당시 20년 가량 연하라는 나이차이가 존재했고, 태조의 가능성을 보고 이뤄진 정략결혼으로 볼 수 있었다. 강씨와 태조가 혼인할 당시 한씨 소생 자식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들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는 강씨를 정비로 삼고, 건국 이전 지병으로 사망한 한씨에게는 묘호를 내리긴 했지만 사실상 강씨보다 서열이 뒤쳐진 후궁 취급을 하게 되었다. 정치적 야심이 남달랐던 강씨는 자신의 자식을 왕세자로 만들기 위하여 정도전과 결탁하는 등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결국 자신의 소생인 이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연히 한씨 소생 자식들은 이러한 처사에 극렬히 반발하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태조가 군권분장정책을 펼치면서 왕실 종친들의 사병 소유를 금지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 한씨 소생의 자식들과 태조 사이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진행[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왕자의 난[편집 | 원본 편집]

자신들을 낳은 친모인 한씨가 후궁 취급을 당하고, 이복형제 중 막내가 왕세자에 책봉되는 것에 반발한 한씨 소생의 자식들은 종친 및 지지세력을 결집하여 태조 7년(1398년) 가을 조정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는 이방원이었으며, 쿠데타를 통해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의안대군 이방석은 물론이고 무안군 이방번까지 강씨 소생의 자식들이 모두 살해당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이방원은 자신이 직접 왕세자에 오르는 대신 둘째 형인 이방과[1]를 내세웠다.

이방원이 이방과에서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장자계승의 원칙을 내세워 쿠데타의 명분을 갖추기 위함이었고, 비록 이복형제이긴 했지만 동생들을 살해했다는 오명을 희석시키기 위한 계산도 깔려있었다. 쿠데타 성공 후 왕세자에 오른 이방과는 1개월 후 조선의 2대 국왕인 정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편집 | 원본 편집]

정종 즉위 후 사실상 정종을 만들어준 역할을 한 이방원은 막후 실세로서 왕보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정종은 즉위 직후 도읍을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고, 정종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태조의 4남 이방간과 5남 이방원의 암투가 시작되었다. 이방간은 이방원 못지않게 야심이 큰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세력이 이방원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함부러 나서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지충주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밀고하여 쿠데타가 성공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에게 내려진 직위가 높지 않은 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간과 결탁하여 이방원에 대해 반기를 들게 되었다.

정종 2년(1400년) 음력 1월, 이방간과 이방원의 무리가 개경 선죽교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정종의 형제들이 벌인 내전임에도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정종의 왕세자 자리를 놓고 다퉜기 때문이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이방간이 패주하면서 이방원이 승기를 잡았고, 이후 정종은 태조에게 허락을 구해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되었다. 이후 이방원은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조선의 3대 국왕인 태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의미[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왕자의 난은 장자계승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자식들과 종친이 연대하여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자식들을 제거한 사건이고, 제2차 왕자의 난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자식들간 왕권을 놓고 다툰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 개국 초기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여 왕실 및 종친들은 각자 사병을 거느린 상태로 언제든 왕실에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피바람을 거치면서 3대 국왕에 오른 태종은 왕실 종친들의 사병을 혁파하는 등 왕권 강화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또한 왕위 계승을 놓고 장자계승의 원칙이 무너질 경우 커다란 혼란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건이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절대 권력을 놓고 형제들간의 목숨을 건 혈투가 벌어진 사건으로 파급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커다란 이권이나 권력을 놓고 형제들이 크게 다투는 상황을 빗대어 왕자의 난이라 칭하기도 한다. 특히 대한민국 제계순위 1위였던 현대그룹정주영의 후계구도를 놓고 정몽구와 정몽헌 등 형제들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암투를 벌인 사건을 당시 언론들이 왕자의 난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내보내면서 대중들에게 깊숙히 각인되는 단어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특히 정몽구와 정몽헌의 대립이 극에 달하였고 정주영이 정몽헌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건을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이에 불복한 정몽구는 현대자동차와 계열사를 아예 현대그룹에서 분리시켜 현대자동차그룹으로 자신만의 노선을 걸으면서 현대그룹과 결별하였다. 정몽구와 정몽헌 외에도 일가 친지들이 각자 이권을 행사하여 계열분리가 이뤄졌고, 이 사건으로 인해 현대그룹은 재계서열 부동의 1위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다.
  •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자 이에 격분한 태조는 도성을 떠나 멀리 함흥에서 칩거하게 되었고, 왕위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정종과 태종은 끈질기게 태조의 환궁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어려움들이 모여 함흥차사라는 고사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각주

  1. 한씨 소생 첫째인 진안대군 이방우는 고려 조정에 대한 충심을 간직하여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고, 조선 건국 후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는 등 스스로 왕권과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였고, 조선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태조 2년(1393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제1차 왕자의 난 발발 당시에는 이미 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