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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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光鮮. 본명은 오성묵(吳性默), 호는 취송(聚松)·광선(光鮮).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5월 13일 경기도 죽산군 원삼면 어현(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어현마을)에서 부친 오인수(吳寅秀)와 모친 안성 이씨 이재덕(李在德)의 딸인 이남천(李南天)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오인수는 용인 일대에서 총 쏘는 데 있어 일인자로 정평나 있던 포수 출신으로, 인근 포수들의 친목모임인 화포계(火砲契)에서 매년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마을 출신으로 일찍이 서울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꾀하고 있던 여준이 고향 죽능리에 세운 삼악학교에 아들 오광선을 다니도록 했다. 오광선 본인이 기술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907년 4월경 삼악학교 소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대한제국군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후 1907년엔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시켜 대한제국군을 해산시켰다. 이에 반발한 오인수는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 토벌대에게 체포된 뒤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13년 12월 병보석 출감되었다. 부친이 이렇듯 의병 활동을 펼치다가 옥살이를 하던 동안, 오광선은 1911년 삼악학교의 고등과에 들어가 1913년 3월 졸업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이상 공부할 수 없게 되자, 그는 1913년 12월 백부의 권유에 따라 용인 이동면 화산리 출신인 정현숙과 결혼했다. 정현숙은 후에 당시의 신혼살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남의 땅에다 농사를 지어먹고 살았으니 언제나 쪼들릴 수 밖에 없었어요. 시아버님께서 포수 일을 하시면서 간간이 살림을 보태주셨지요. 나는 그때부터 일복을 타고 났다고나 할까? 농한기에도 다른 집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 갔었지요. 워낙 힘이 꿋꿋해서 여자지만 남자 이상의 일을 했거든요.

- '광복군 따라 대륙유량 30년' <주간여성>(1974년)

그 후 오광선은 서울로 상경해 종로에 있는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조카뻘인 오일선(吳一善)·오의선 등과 함께 학업을 수행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상동청년학원은 1915년 일제의 압력과 재정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폐교되었고, 오광선은 학원의 은사인 장지영의 소개로 잠시 한약국 급사로 일했다. 하지만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싶었던 그는 곧 장지영에게 노자를 받고 1915년 가을 서울역에서 오일선·오의선 형제, 그리고 조선대학에 다니던 김중훈(金重勳)·이동민(李東民) 등 5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신의주까지 간 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베이징에 도착한 오광선 일행은 신규식의 소개를 받아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오광선은 위안스카이 총통 앞에서 중국에 대해 신의를 지키겠다는 선서식을 하였다. 그는 위안스카이의 주선으로 하북성에 위치한 보정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6개월간 폭탄제조법은 물론, 군관이 되기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가 중국내전으로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방황하던 그는 신흥무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하고 700리를 걸어간 끝에 유하현 삼원포 합니하에 도착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오광선은 학생들에게 일제의 밀정으로 오인받고 감금당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었던 탓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거동이 수상쩍으면 일제 밀정으로 오해받아 학생들이 자체 조사하는 사례가 빈번했던 것이다. 다행히 삼악학교 은사였던 여준이 면담을 해준 덕분에 오해를 풀고 입교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신흥무관학교에서 학업과 훈련을 병행했고, 1918년 12월 수석으로 졸업했다. 여준은 그에게 부친과 부인 등 가족을 무관학교로 불러들어 같이 살게 하자고 권유했다. 오광선은 이를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소식을 보냈다. 아내 정현숙은 급히 시아버지 오인수 등을 모시고 한달 간 여행을 떠난 끝에 합니하에서 오광선과 상봉했다.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해룡현 성수하자에 위치한 동흥학교 군사교관과 체육교사를 병행했다. 이후 지청천이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했을 때, 그는 신흥무관학교로 복귀하여 교관으로 일했다. 1919년 5월, 신흥무관학교는 고산자진 대두자 마을에 분교를 세웠다. 오광선은 이 고산자진 신흥무관학교에 교관으로 부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후 그는 여준이 부독판을 맡고 있는 서로군정서의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발탁되었고, 1920년 10월엔 3중대장으로 부임했다.

1920년 12월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연해주로 후퇴한 뒤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을 때, 오광선은 이 군단의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이만에 이르렀고, 5월에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해 6월 자유시 참변이 벌어졌고, 오광선은 상관 지청천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지청천 등 간부급 84명과 함께 중범죄자로 지정되어 극동공화국 제5군단 관할 하의 이르쿠츠크 군 형무소로 이송되어 특별수용 되었다. 그는 형무소에서 힘겹게 지내야 했고, 수시로 전향하라는 회유를 받았다. 오광선은 훗날 이때에 겪은 고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물도 없이 검은 빵 두 쪽으로 연명해야 했던 옥살이 아래 옆에 놓인 생나무 책상을 씹어 먹을 만큼 허기가 졌던 사형수였다.

- 조선일보 '반세기의 증언'

지청천은 오광선을 몰래 탈출시켜 수형 생활의 참상을 동지들에게 전달하게 했다. 오광선은 야음을 틈타 형무소를 탈출한 뒤 만주 국경에 도달했다. 이어 흥안령 북쪽을 돌아 시베리아 흑룡강변 우루강을 거쳐 밀산에 이르러 김좌진과 재회했다. 김좌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에게 이를 보고했고,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 후 소련은 1922년 8월 지청천 등 독립군 간부들을 석방시켰다.

1922년 초, 오광선은 여준이 설립한 검성학장(儉成學莊)의 체육교사로 부임했다. 여준과 오광선은 이곳을 서로군정서의 새로운 기지로 삼기 위해 둔전제를 실시했으며, 1923년 8월엔 별동대장, 1925년 10월엔 경비대장을 맡아 서로군정서의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김혁이 주관하여 설립된 대한독립군단에서 여단부관을 맡았다. 그러나 검성학장은 공산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대거 입학하면서 좌경화되었고, 1927년 청년강습소로 개칭되었다. 이에 여준과 오광선은 반발하여 학교를 떠났다.

1930년, 오광선은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총사령장 지청천, 부사령장 남대관(南大觀), 참모관 신숙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을 지속했다. 그는 1931년 12월 11일 지청천을 수행하여 중국 호로군 사령관 정초(丁超)를 방문하여 한·중 연합군을 구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군과 대적할 것을 약속하고 대일전을 계속하였다. 이후 만주사변을 단행한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으며, 1933년 7월 초에는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10월 중국군의 오의성 부대가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기습 포위하고 총사령 지청천 휘하 330여 명의 한국독립군을 체포, 구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 이 사건은 그동안 노획한 무기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대립으로 발생했는데, 나중에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된 오의성이 10월 하순 한국독립군 간부들을 모두 석방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독립군 대부분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한국독립당은 더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한국독립군은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오광선은 중국 관내로 이동한 뒤 1934년 2월 28일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교관으로 부임하여 지청천과 함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그러나 낙양분교 한인반은 지청천 계열과 김구 계열, 김원봉 계열로 나눠져 세력간 경쟁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쌓임에 따라 2기생을 배출한 직후인 1935년 4월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비밀공작대를 조직했다. 김구는 만주에서의 독립기지를 재건할 목적으로 오광선으로 하여금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규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오광선은 1936년 북경에서 금은방을 차리며 잠행했다.

그러던 중 일본 관동군 참모장 도이하라(土肥源) 중장이 베이징에 들린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국내에 침투한 다른 공작원이 체포되면서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만주군 보안대와 일본 경찰의 기습으로 체포된 뒤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문에 시달렸다. 1938년 10월 출옥한 그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의 대석하와 흥안령 일대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합세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8.15 광복 소식을 접한 오광선은 상하이로 가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났다. 지청천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죽었다고 생각했던 옛 부하와 재회한 것에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광복군 소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미군정 당국과 협의해 광복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받고 국군자격으로 입국케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충칭에 있는 부인 정현숙과 두 딸,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여 미군정과 담판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했고, 그는 직접 전용항공기로 중국에 가 김구 주석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 오광선은 대한국군준비위원회의 총사령을 맡았지만 미군정에 의해 위원회가 해산되자 다시 1946년 4월 광복청년회를 조직했다. 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자 즉시 가담하여 대동청년단 준비위원회 재정위원, 대동청년단 부단장을 역임했다. 이후 미군정의 국방경비대 창설에 대해 "외세에 의한 군대 창설을 반대한다."며 국군 창설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해 1948년 12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 1차로 입교하여 이듬해 1월 1일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합류하여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8년 동안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1967년 5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병사했다. 향년 73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오광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6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