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광장 차량 질주 사건

여의도광장 차량 질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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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신문기사
사건 정보
날짜 1991년 10월 19일 오후 4시 35분
장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광장
인명피해 사망 : 2명, 부상 : 21명
재산피해 승용차 1대 파손

1991년 10월 19일 오후 4시 35분, 대한민국 서울의 여의도광장[1]의 인파를 향해 김용제가 몰던 프라이드 차량이 고속으로 돌진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참극이자 증오범죄이다.

사건 경과[편집 | 원본 편집]

현장검증에 나선 김용제[2]

사건을 일으킨 김용제(당시 21세)는 평소 시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니던 여러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사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녔던 양말공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쁜 시력 때문에 잦은 실수가 반복되었고, 곧 해고되리라 예감했던 김용제는 평소 눈여겨보았던 공장 사장의 프라이드 승용차의 열쇠를 미리 복제하였다.

얼마 후 김용제의 예상대로 양말공장에서 해고되었고, 평소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이 가득했던 김용제는 한동안 마땅한 직업과 거처없이 방황하다가 사건 당일, 미리 복제했던 열쇠를 이용하여 훔친 프라이드 차량을 몰아 여의도광장 한켠에 도착하였다. 자신의 불행과 대비되어 여유롭고 즐겁게 주말 오후를 즐기던 시민들을 향해 증오심을 느낀 김용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차량을 몰아 시속 70km 이상의 속도로 여의도광장의 인파 속으로 돌진하였다. 그렇게 200m 가량을 지그재그로 휘젓던 김용제의 차량은 결국 여의도광장의 철제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고 멈춰섰다.

크게 파손된 차량에서 나온 김용제는 미리 숨겨두고 있던 흉기를 들고 주변에 있던 여자 중학생 1명을 인질로 잡고 시민들과 대치하였다. 분노에 찬 시민들은 저마다 돌이나 나무막대기 등을 집어들고 김용제를 포위하였고 김용제는 이들 시민들과 격투 끝에 제압되어 경찰에 넘겨졌다.

피해[편집 | 원본 편집]

사망자 2명은 모두 어린 아이들이었으며, 당시 여의도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던 윤신재(당시 5세)군과 지현일(당시 12세)군이 차량에 치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한 10대 또래의 많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당시 여의도광장은 드넓은 아스팔트 광장으로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많은 어린이들이 몰리던 장소였다.

처벌[편집 | 원본 편집]

조사 과정에서 김용제는 "시력이 나쁘다는 이유로 일하는 직장마다 번번히 쫓겨나 자신을 무시하고 냉대하는 것 같아서 사회에 복수하고 싶었다.", "자신은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너무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호의호식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좌절을 느끼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에대한 좌절감이 사회에 대한 증오심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김용제는 재판을 거친 끝에 1992년 6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997년 12월 30일에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김용제[편집 | 원본 편집]

김용제는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집안환경과 청각장애인이었던 아버지,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용제 역시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았으며 이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행한 가정환경속에 어머니는 가출을 반복하다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현실을 비관하다가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린나이에 홀로 남겨진 김용제는 중국집 배달원, 선원, 공장 직공 등 닥치는데로 일을 하였으나 나쁜 시력으로 인해 배달지 주소를 제대로 읽을 수 없고, 공장에서 잦은 실수를 일으키는 바람에 번번히 해고당하는 신세였다. 손님들에게 인사만 잘하면 되는 나이트클럽 웨이터 일을 하기도 했지만 사장을 못알아보고 손님에게 하는 인사를 하는 바람에 사장에게 미움받고 해고되었다. 김용제는 짧은 인생동안 다양한 범죄에도 연루되었으나 죄질이 약해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그때마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직장을 구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번번히 나쁜 시력이 발목을 잡아 여러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고, 이를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으로 돌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김용제는 사형이 집행된 마지막 사형수라는 기록을 남겼다. 김용제 이후로는 더이상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아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실질적인 사형폐지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 김용제에 의해 살해당안 윤신재군의 할머니는 손자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김용제를 만났다. 김용제를 만난 할머니는 연신 죄송하다며 벌벌 떨던 그의 모습에 "공포에 떨고있는 김용제를 보니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게한 책임이 우리 사회에도 있다"라며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선처를 호소했다. 시력이 나쁜 김용제를 위해 안경을 맞춰주기도 했다.
  • 인권신장이 많이 이루어진 현재의 관점에서는 김용제의 범죄행위 자체는 유죄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김용제에 대한 심신미약 등 판사의 재량권으로 참작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고려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심신미약 고려하더라도 고의로 질주하여 무고한 어린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행위 자체는 사회적인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흉악범죄이자 중형을 피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각주

  1. 지금의 여의도공원이다. 당시에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거대한 광장이었으며 주말이면 나들이객들로 인해 북적이던 장소였다.
  2. 차량 조수석에 탑승한 인물이 김용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