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민휴식

여민휴식(與民休息)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진행되어 온 조선 정부의 전후 복구책을 이르는 말이다.

내용[편집 | 원본 편집]

17세기 조선은 두 차례의 외침을 겪고 당대의 소빙기로 인하여 각종 대기근이 몰아치는 등 사회,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있던 시기였다. 조선 정부는 피폐해진 민간을 되살리기 위해 여민휴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된다.

1600년 9월, 비변사는 12개조를 선조에게 제출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후복구를 시작하였다. 조정은 더이상 민간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의하며 왕조 재건의 추제는 어디까지나 민간사회와 백성이며, 이들의 경제적 성장과 안정을 통해서 조선 또한 부흥할 수 있다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는 여민휴식(與民休息)정책이 실시되었다. 중국 전한 초기 문경지치를 따온 이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춘 것으로 초한전쟁 이후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으며 선조는 대부분의 개혁안을 수용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여민휴식 정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적극적인 권농 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고, 중앙과 지방 관총들의 재정 자립도를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조정은 임진년부터 적극적인 둔전과 개간을 추천한 만큼, 권농정책에 적극적이었고 이는 지방관들의 태도로부터 나타났다. 개간 사업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받으려 했던 지방관들은 종자나 농우를 민초들에게 지급하였을뿐만 아니라 개간된 농지에는 파격적인 세금 감면을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지방의 적극적인 개간은 종전 10년 만에 과열을 우려한 나머지 조정에서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꽤 성공적인 복구 사업이 진행됨을 알리는 길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사회 안정과 경제 회복의 우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부가 부세제도의 개혁을 포함해서 각종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12개조 중 특히 제2조는 전란 전 농민들이 진 부채를 모조리 탕감해주는 조처였으며 태어날 때 부터 막대한 부채를 안고 태어난 16세기의 농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환영할만한 소식이었다. 또한 조정은 불필요한 지출은 모조리 줄이는 등, 과격할 정도로의 감축을 실시했으며 안정적인 세수를 거두기 위해 세수 제도를 정비하고 공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세금을 줄이거나 감면하는 등, 민간을 최대한 배려하려 했다. 이러한 조정의 노력으로 임진왜란 이후 10여 년 만에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불안이 회복되었다.

이런 여민휴식 정책은 광해군 즉위 이후 잠시 퇴조한다. 광해군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궁궐 개축에 집착하고 사르후 전투에 파병한 병력을 대부분 손실하여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는 등 등 민간을 크게 쥐어짜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로인해 백성들이 선정을 베푸는 목민관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돈을 모으는 등 내정에 있어서 실정을 거듭하였다. 또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시행하려고 했던 대동법 시행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전후 복구에 제대로 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실정으로 인한 인조 반정 이후 즉위한 국왕 인조는 비록 군사문제와 외치면에서 실정을 거듭하였으나 광해군대에 실종되었던 여민휴식 정책을 다시 이어가도록 하게 하였으며 치세 말기엔 후대 군주들에게 어느 정도 회복된 조선 경제를 남겨 줄 수 있었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17세기 중반 쯤에 가면 급격한 인구 증가와 경제적 번영을 통해 새로운 농업기술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농민들의 영양 상태 또한 개선되기 시작한다. 또한 일본산 은의 유입으로 인해 조선은 한중일 삼각무역의 주요 지역으로써 많은 부를 축적한 동시에 사치와 향락풍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효종 3년, 전 판서 조경은 '중국의 능화지로 벽을 바르고 능단과 금수로 만든 옷을 해 입고,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 까지 만연했다고 한탄한다. 이러한 태도는 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족들까지 편승하는 등, 사치 낭비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켜 왔으나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한 사회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소빙기는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렇기에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은 민간 영역에 대한 정부의 최소 개입보다는 강력한 정부 개입을 필요로 했고 숙종, 영조, 정조와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