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습득론

언어 습득(言語習得, 영어: Language acquisition)은 당연하게도 인간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언어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언어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분야이다. 이 문서에서는 언어 습득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사례를 소개하도록 한다.

들어가기 전에: 인간과 언어[편집 | 원본 편집]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언어를 습득하고, 이 언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시각장애인이라도 점자를 통한 언어 생활이 가능하고, 청각장애인도 수화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발음기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말을 할 수 없을 뿐이지,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수 있다. 따라서 언어 능력이 전무한 사람은 아직 말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나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일부 사람들, 그리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고립아 정도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1]

그런데, '아' 다르고 '어' 다른 언어를 거의 모든 사람이 문제 없이 습득하고, (최소한 하나 이상의 언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아무리 돌고래, 침팬지가 동물 중에서는 똑똑하다고 해도, 인간과 같은 언어 능력을 보유한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물론 '언어'의 정의에 따라 각각의 언어 수준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인간만이 이정도 수준의 언어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인가? 인간의 높은 기억력과 학습력, 그리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조음기관 덕분인가? 인간에게만 있는 특별한 언어 기관이 높은 수준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자전거 타는 법을, 타자 치는 법을 배우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모국어 습득 (FLA) 단계[편집 | 원본 편집]

연구 결과에 따르면 0~2세 아이들이 모국어로서 영어를 습득하는 순서는 거의 같다고 한다. 그것도 호주미국이고 가릴 것 없이 전세계적으로.

언어 습득 이론[편집 | 원본 편집]

언어 습득에 대한 이론은 크게 세 가지가 존재한다. 행동주의(Behaviourism), 내재주의(Innatism, 생득주의라고도 한다), 발달론적 관점[2]/상호작용주의(Developmental Perspective/Interactionism)가 그것이다.

행동주의[편집 | 원본 편집]

이들에 따르면 언어 습득에서 중요한 것은 '강화'(reinforcement) 작용이다. 강화란 말하자면 '칭찬'과 같은 것으로, '좋은' 행위를 계속 할 유인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소통의 성공이나,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 사탕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이다. 자연히 환경적 요인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한 모방(imitation)과 연습(practice)이 언어 습득의 핵심이 된다. 모방은 말 그대로 언어 교육자엄마가 하는 말을 따라하는 것이고, 연습은 비슷한 유형의 말을 반복하면서 해당 유형을 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의 한계는 언어의 창조성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우리는 우리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말도 얼마든지 꾸며서 말할 수 있는데, 이는 행동주의자를 멘붕에 빠트리는 현상이다. 행동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남이 하던 말', 혹은 '남이 좋다고 한 말', 한마디로 '경험'에 기반해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적되는 문제를 '자극의 빈곤'(Poverty of the Stimulus)라고 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왓슨(J. Watson), 스키너(B. F. Skinner) 등이 있다.

내재주의[편집 | 원본 편집]

언어학의 끝판왕 놈 촘스키가 군림하고 있는 이론이다. 이름대로 인간 안에 특별한 뭔가가 '내재'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즉, 언어습득장치(Language Acquisition Device; LAD)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 언어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 언어습득장치는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UG)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모든 언어의 정수'라는 것을 담고 있고, 언어 습득 과정은 이 언어습득장치를 작동시켜 보편문법을 개별 언어, 모국어로 구체화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론은 특히 어린아이가 복잡한 문법도 쉬이 습득하는 걸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동주의에 비해 강점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물리학 박사다"라는 문장과 "나는 빨래 박사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두 문장은 모두 "나는 ~ 박사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문법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첫 문장의 '박사'와 둘째 문장의 '박사'가 같은 의미일까? 아니다. 첫 번째 '박사'는 실제로 대학원을 물리학을 전공해 학위를 취득한 박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의 '박사'는 대학원에서 빨래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빨래를 잘 알거나 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걸 언제 행동주의자 말마따나 '강화' 받아서 배웠다는 말인가? 내재주의에 따르면 이건 사람의 뇌 속에 언어습득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결정적 시기 가설[편집 | 원본 편집]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은 언어습득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시기는 한정적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가설이다. 다시말해, 특정한 나이가 되도록 모국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영영 모국어를 배울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이니?

물론 확증된 적이 없기에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는 주장이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아베롱의 빅토르(Victor of Aveyron, 1788-1828)의 사례가 있다. 빅토르는 12살 때 프랑스의 한 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연히 말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어린이 혼자서 숲에서 몇 년을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사람들은 빅토르를 마을로 데려와 5년간 말을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빅토르는 단 두 단어[3]만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또한 지니(Genie)라는 사회적 고립아가 1970년, 13살의 나이로 구출된 경우가 있다. 부모와 같이 살았으나 정작 그 부모라고 부르기도 아깝다는 지니가 어떤 소리를 내기만 해도 야단을 쳤고, 결국 지니는 13살이 되도록 말을 배우지 못했다. 당연히 그 부모는 쇠고랑을 찼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편적인 사례에 그칠 뿐이라 이걸로 이 가설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언어학에서 가설을 검증하려면 엄밀히 설계된 '실험'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걸 실험을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저 위의 어떤 나라처럼 전제군주정 국가에서는 국가 주도로 직접 미친 실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비윤리적 실험이다. 따라서 정상적으로 이 가설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발달론적 관점[편집 | 원본 편집]

이 관점은 언어 습득이 인간에게 내재된 능력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내재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는데, 바로 '언어 습득'도 그냥 보통의 '학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이나, 말을 배우는 것, 타자를 배우는 것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과정이라는 주장이다. 또 행동주의처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한편 내재주의에서는 아무래도 문법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발달론적 관점은 언어의 실제적인 사용, 즉 화용론(pragmatics)적 측면을 보다 중시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는 "안녕"이라고 하라는 명령형이 아니고[4], 그냥 인삿말이다. 또, "벤제마, '리버풀 빅클럽 아니야'"라는 문구가 있다면 이건 십중팔구 스포츠 뉴스의 제목으로 쓰였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이걸 문법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 물론 가능은 하겠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복잡해질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언어를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이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 본다. 즉, 문법적 지식을 아는 것과, 실제로 문법에 맞는 문장을 만들어내고 이해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위키러는 젓가락질을 할 줄 알 것이다. 이건 젓가락질에 대한 절차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젓가락질의 원리와 각 손가락의 역할을 설명하라고 하면 쉽게 대답하긴 어려울 것이다. 분명히 젓가락질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알고 실제로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선언적 지식은 일부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호작용 가설(interaction hypothesis)에서는 언어란 상호작용 과정 속에서 비로소 습득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외국어든 모국어든 상관 없이, 우리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심지어는 모국어를 습득한 이후에도 언어적 실수를 반복한다. 되/돼를 틀리는 것은 양반이고, 에/의, 안/않 등, 한국인에게조차 한국어에는 헷갈릴 만한 요소가 넘쳐난다. 물론 이제는 리브레 위키에서 쉬운 맞춤법을 읽어보면 되지만, 이제까지는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고 얼굴을 붉힌 뒤에야 틀린 걸 깨달은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고 난 뒤에는 똑같은 걸 또 틀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의 '조정' 혹은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언어 실력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 이에 따르면 언어는 '일단 닥치고 들이대는' 편이 더 쉽게 배울 수 있다. 주변의 외국어 잘하는 친구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론.

각주

  1. 참고로 부모가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엄연히 아동학대라고 볼 수 있다.
  2. 더 적절한 번역이나 용어가 있으면 수정바람
  3. '우유'와 '신이시여'(Oh Dieu)
  4. 사실 "안녕하세요?"가 기본으로, 의문문이 맞다. 하지만 현실에서 진짜로 질문하듯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위키러는 아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