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익제

저왕(猪王)
생몰년도 1509 ~ 1516
즉위 전 간수공(簡修公)
부모 아버지 덕종, 어머니 휘자태후
재위 1509 ~ 1516
시호 양익황제
묘호 (없음)
국적 대월

양익제(襄翼帝, 1495년 7월 16일~1516년 5월 4일, 재위 기간 1509년~1516년)는 베트남 초여조의 제9대 황제다. 묘호는 없고, 양익제는 시호다. 휘는 레오아인(Lê Oánh, 黎瀠/여형). 성종 여사성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덕종으로 추존된 여빈(黎鑌)이다. 사촌은 위목제이며, 위목제가 폭정을 저지르자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후 집권하였다. 재위 기간 중에 사용했던 연호는 홍투언(홍순, 洪順).

옥을 탈출한 후, 폭정을 일삼던 귀왕(鬼王) 위목에게 승리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문묘를 복원, 《대월사기전서》의 기반이 되는 《대월통감》(大越通鑑)을 작성하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얼마 못가 자신이 폐위시켰던 귀왕처럼 폭정을 일삼게 된다. 결정적으로 1516년 백 여개의 궁전을 지으라는 강제 노역을 시행하는 등 비정(粃政)이 극에 달하여 동년 신하인 정유산에게 살해당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즉위 전[편집 | 원본 편집]

여형은 1495년 여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형에겐 형 명종(明宗)[1], 여영, 여연이 있었다. 여형은 헌종 시기 간수공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성종의 5자였기에 황실과 거리가 멀었고, 공의 작위를 받은 일개 왕족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술할 위목제와의 문제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하였다.

탈옥하고 귀왕을 처형시키다[편집 | 원본 편집]

그를 옥에 가둔 위목은 헌종의 둘째 아들로, 숙종의 형인데 숙종이 병에 걸렸고, 후사가 없자 숙종에게 지명받아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다 위목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신하들을 처형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에 신경쓰지 않는 폭군이였다. 또한 의심병이 있어 왕족들도 가리지 않고 살해했고 그 왕족들 중엔 여형과 그의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형의 형제들은 1509년 위목제의 의심병으로 옥에 갇혔으나 여형은 옥졸에게 뇌물을 주고 감옥을 빠져나와 도주한 후 완문랑에게 우두머리로 추대받아 군을 이끌고 탕롱을 침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준[2]은 천한 차남으로 황실을 더럽혔다. 그의 재위가 5년이니, 거의 5년동안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리사욕만 중시했고 먹는 것만 좋아했으며 백성을 소홀히 하고 국고를 낭비했으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진행해 전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침내 11월 8일 여형은 서쪽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위목제 역시 여형의 반란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절로 도주해 여형 측의 장군 1명과 병사 20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23일 조정에 남아있던 여형의 형제들인 여충(명종), 여영, 여연이 처형당했으나 여형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격했다. 위목은 형세가 기울어지자 죄수마저 풀어서 군을 급조했으나 죄수로 만든 급조 군대로 승리할 리가 없었고 심지어 일부 죄수군은 무단이탈까지 하였다.

결국 패배한 위목제는 28일 여형군에게 잡혔고 1510년 1월 10일 짐독을 먹고 자살했다. 이로써 폭정을 일삼던 귀왕은 사망했고 여형은 귀왕을 제거한 영웅이 되었다. 그 해 1월 22일 황제로 즉위했고 자신의 절일을 천보성절(天保聖節), 스스로를 인해동주(仁海洞主)라 칭했다. 폭군을 스스로 제거한 용기있는 왕족이 황제가 되었기에 신하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즉위 후[편집 | 원본 편집]

선정을 베풀다[편집 | 원본 편집]

양익제는 스스로 폭군을 제거하고 올랐기에 어느 곳에서 나라가 망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 황제의 만행을 그만이 수습할 수 있었기에 신하들의 기대도 컸다.

앞서 말했듯 왕조의 영광을 재현시키기 위해 성종의 업적을 계승, 문묘를 복원시켰으며 대월통감을 작성했고 경제적인 부분에도 귀왕의 폐해를 수습하여 다시 안정시켰고 새로운 화폐인 홍순통보(洪順通寶)를 발행하였다. 1511년 과거 시험을 다시 열었고 많은 유학생들이 양익제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썼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얼마 못가 양익제 역시 자신이 폐위시켰던 귀왕처럼 폭정을 일삼게 된다.

폭정을 일삼다 - 저왕(猪王)[편집 | 원본 편집]

양익제는 어느 순간부터 일을 놓고 매일 밤 과도한 음주를 즐겼고 술에 취하면 궁전의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죽였다. 그의 폭정은 더욱 심해져 1512년엔 나라가 기근에 처했고 전국엔 굶어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결국 보다못한 1511년 산서부 지방에서 진순(陳珣)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들이 그에게 합류했고 군관들은 지레 겁먹고 모두 도주하였다. 양익제는 정유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양익제는 당시 거리를 통제했고 아무도 왕래가 없게 하였다. 하지만 정유산 역시 궤멸하여 남은 군인의 수가 30명밖에 안남는 상황까지 처했다. 하지만 정유산은 포기하지 않고 30명의 군들을 데리고 진순의 초소로 들어가 진순을 암살했다. 지휘관을 잃은 진순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반란은 기적적으로 진압되었다.

황실의 군이 궤멸 위기까지 간 반란이 일어났는데도 양익제는 폭정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명나라의 사신 반희증(潘希曾)은 허천석이 위목제를 귀왕(鬼王)이라 평했던 것처럼 양익제의 폭정을 보고 저왕(猪王)이라 평하였다. 그 별명처럼 자신이 폐위시켰던 귀왕처럼 무리한 토목 공사와 사치를 부렸으며 신하의 불확실한 말만 듣고 왕족 15명을 죽였고 전 왕조의 비빈들을 불러 간통하였다.

저왕은 1516년 수 천개의 널판지를 제조시켜 넓은 강에 다리를 놓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100개의 궁궐을 세우게 하였다. 무리한 강제 노역으로 인해 역병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국고가 낭비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양익제는 사치를 심하게 부렸고 놀기만 하였다.

반란과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이러한 상황을 보다못한 1516년 신하 진고와 그의 아들 진병(陳昺)이 반란을 일으켰고 무려 반군의 규모가 만 여명이 넘었다. 양익제는 친정하여 진고와 대치했고 승리해 진고를 몰아냈으나 양익제가 보낸 신하들이 진고에게 패배, 일부 지휘관은 붙잡혀 살해당했다.

진고의 반군과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는 실력을 보여줬지만 그의 폭정으로 조정은 망가질 채로 망가졌다. 그의 충신이였던 정유산은 군 3천여 명을 보내 궁궐 문으로 들어가게 하여 변을 꾀하였다. 양익제는 정유산의 군대가 반군인 줄 알고,

적들은 어느 편인가?

라고 물었으나 정유산은 무시하고 다른 곳을 보며 폭소하였다. 양익제는 자신이 폐위되었음을 느끼고 말을 채찍질하며 서쪽으로 도주하였다. 하지만 정유산의 서쪽에 배치된 군대가 양익제를 기다리고 있었고 양익제는 정유산의 군대에게 1516년 시해당했다. 폭군을 제거하고 왕조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으나 결국 자신도 귀왕의 행보를 걸었던 영웅이자 폭군의 비참한 최후였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양익제는 귀왕(鬼王)이라 평가되던 폭군을 죽이고 왕조의 폐단 수습에 성공한 명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였다. 또한 위목제를 폐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승리하여 제위를 계승하였단 점과 진고의 반란을 직접 친정하여 제압하였다는 점에서 군사적 자질도 충분했었다.

바로 앞의 폭군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기에 위목제에게 반면교사를 느꼈겠지만 정작 양익제 본인도 재위 중반에는 방심하여 이유없이 신하들을 죽이고 정사를 신경쓰지 않았으며 비정이 극에 달해 전임의 위목제처럼 비참하게 시해당했다. 사후에도 황제의 시호가 아닌 민려왕(愍厲王)이라는 악시(惡諡)가 붙었고 이는 그가 폭군임을 단번에 나타내는 칭호이다. 그의 잔혹함은 위목제 못지 않아 위목제의 별명은 귀왕(鬼王)에 대응하는 저왕(猪王)이란 악평이 붙었을 정도이다.

사후 복권[편집 | 원본 편집]

그 후 조카인 소종이 시호를 올려 1517년 6월 16일 자신이 폐위시켰던 위목제와 같이 황제의 시호를 받아 귀왕은 위목황제(威穆皇帝), 저왕은 양익황제(襄翼皇帝)로 추증되었다.

가계도[편집 | 원본 편집]

  • 부모
    • 부황: 덕종(德宗) - 양익제 추존.
    • 모후: 휘자태후
  • 후비
    • 흠덕황후
  • 황녀
    • 보복공주(여수숙)
    • 여수원
    • 여수경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추존황제. 소종의 부친이다.
  2. 위목제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