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에서 넘어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Albert Einstein Head.jpg
오렌 J. 터너가 찍은 사진 (1947년)
인물 정보
출생 1879년 3월 14일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울름
사망 1955년 4월 18일 (76세)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국적 독일 제국 (1879-96, 1914-18)
바이마르 공화국 (1918-33)
스위스 (1901-55)
미국 (1940-55)
직업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독일물리학자이다. 1879년 3월 14일 독일 제국의 울름에서 출생하여, 1955년 4월 18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사망했다. 우리에게는 고전물리학의 정의를 뿌리채 뒤흔든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하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특수 상대성 이론과 중력장의 개념을 완전히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 일반 상대성 이론사고 실험(!)을 통해 정립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효과실제로 관측하는 것은, 그 이론이 발표된 지 10년은 넘게 지나서야 이뤄졌다! 괜히 천재의 대명사로 줄기차게 거론되는 게 아니다. 재수없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업적[편집 | 원본 편집]

인류 최고의 물리학자
현대물리학의 시작
  • (상대성 이론의 제창으로써의) 광속도 불변의 법칙 설명 : 상대성 이론을 빼면 현대 천문학 그 자체가 박살나버린다.
  • 광전 효과 현상의 (광자설을 통한) 이론적 규명 : 아인슈타인은 이를 광양자 가설이라고 이름붙였는데, 가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양자역학의 씨앗이 된다. 이 이론은 영의 이중슬릿 실험과 전혀 무관하게 설립되었기 때문에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고전물리학계의 상식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결론을 낳게 된다.
  • 브라운 운동의 이론적 규명(을 통한 분자의 존재 입증) : 이 논문 이전까지는 물리학계에서 원자분자는 그저 화학에서의 이론 정립을 위한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이 많았다고. 그리고 이 논문은 통계역학의 씨앗이 된다.

하나만 했어도 과학사에 이름을 남겼을 업적을 혼자서 3개를 남겼다. 그것도, 저 하나하나가 같은 해에 단지 논문 하나씩으로 제출한 거였다고...

여담[편집 | 원본 편집]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가져다 준 업적은 상대성 이론이 아닌 광전 효과에 관한 연구였다.[1] 노벨상은 실험적으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수상되기 때문에, 1921년 당시까지 그 어떤 실험적 증거도 얻어내지 못했던 상대성 이론에 노벨상을 수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노벨상 위원회 측에서는 "상대성 이론 그거 쩌는 이론이긴 한데 우리가 상 주는 원칙에 들어맞는 이론이 아니라서 상을 못 줌" 이라는 입장이었으나, "그게 노벨상을 받을 발견이 아니면 뭐가 노벨상을 받을 발견이냐" 라며 물리학자들이 노벨상을 무시할 움직임이 보이자 궁여지책으로 실험적 데이터를 얻기가 아주 쉬운 이론인 광전 효과에 노벨상을 수여한 것. 물론 두 이론 모두 노벨상을 받기에 손색이 없을만큼 훌륭한 물리학 이론임에는 틀림없고, 광전 효과의 이론적 설명을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다른 물리학자가 써냈다면 그 사람은 광전 효과 업적 하나만으로 물리학사에 자기 이름을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못 알아듣거든

원래 독일 태생이었던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핵분열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본인 역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편지를 써 프로젝트의 시작에 한 부분을 차지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은 애초에 핵무기를 만들 능력과 의지가 없었음이 밝혀지자, "이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내가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라며 강하게 후회하기도 했다. (오히려 핵무기를 만드는 데는 일본이 독일보다 이론이 앞서 있었으나, 독일에서 우라늄을 수입해 오던 중에 독일이 항복을 해버려서 실물을 만들지 못했다고.)

평생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며 확률에 의존하는 양자역학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 한 예.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도 모르게 불확정성 원리에 기여하였으며, "양자"라는 개념을 맨 처음 도입한 것이 아인슈타인 본인이 쓴 광전 효과 이론 때문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는 강한 결정론자였으며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독특하게도 그의 뇌는 세계 여러 연구기관에 의해 조사되고 있다. 그 결과 신경세포의 밀도가 일반인에 비해 높았다든가, 두정엽의 넓이가 일반인보다 15%가량 넓다는 등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논문들이 꽤 많이 발표되었다.

어록[편집 | 원본 편집]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진 않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