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드 샤 마수드

아흐마드 샤 마수드(타지크어: Аҳмадшоҳи Масъуд, 다리어/페르시아어: احمد شاه مسعود [ʔæhmæd ʃɒːh mæsʔuːd], 1953년 9월 2일~2001년 9월 9일)는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지도자·정치인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별명은 '판지시르의 사자'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타지크인으로 아버지가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군인 대령이었다. 그는 프랑스어 학교에 다니면서 파슈토어, 우르드어, 프랑스어, 아랍어, 영어를 배웠다. 단, 영어는 서툴렀다.

당시의 아프가니스탄은 굉장히 세속적인 나라였지만 무함마드 다우드 칸 총리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정권유지를 위해 이슬람교도들을 탄압했다. 그런데 무함마드 다우드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바브락 카르말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르말은 집권하면서 친소 정권을 세우고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분노하여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선 게릴라 조직인 무자헤딘이 봉기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1]

아흐마드 마수드도 자신의 고향(판지시르)에서 무자헤딘을 이끌었는데, 친소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전략적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군대를 양성하고, 둘째는 비정규전의 수행과 그 동안 거점인 판지시르의 적극적 사수, 셋째는 "전략적 공세"로 마수드의 군대가 북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제압, 넷째는 마수드의 원리를 나라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로써 마수드의 영향력이 커지자 기겁한 카르말 정권은 소련군에게 요청해 Tu-16 폭격기를 동원하여 판지시르 계곡에 전략 폭격을 감행하지만, 마수드는 이미 카르말 정권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았고 소련군의 폭탄은 5만 명의 거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계곡에 떨어졌다.

1984년, 소련-공산 아프간군은 2만 1천여 명이 동원된 7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무자헤딘 5천여 명의 반격에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한 데 이어 공산 아프간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면서 결국 소련측은 1986년 판지시르에 대한 공세를 중단, 1988년대에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2]
 또 이 과정에서 무자헤딘 지도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압둘 라시드 도스툼을 비롯한 정적들과 대립하는 등 무자헤딘들 간의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사이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탈레반이 미국 CIA의 지원을 받고 나타나 여학교 폐쇄, 민간인 학살, 종교와 언론 탄압을 하자 문제가 되었다. 
이때 그는 반탈레반 성향의 파슈툰인들과 타지크인 및 우즈베크인 등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반탈레반 무자헤딘 연합세력인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통칭 북부동맹)을 결성해 탈레반과 대항하였다.[3] 

하지만 탈레반과 동맹이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알 카에다 자폭대원에게 사망했다.[4]

성향[편집 | 원본 편집]

마수드는 이슬람주의자였지만 남녀 모두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마수드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부르카 착용을 강제받지 않으며, 직장과 학교에 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각주

  1. https://m.blog.naver.com/hokingjr/220966895839
  2. 세계 최강이었던 소련과 싸워 이긴 전설의 남자
  3. 참고로 이 시기 아흐마드는 정적인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나지불라에게 카불에서 떠나자고 했으나, 나지불라는 가족만 망명시키고 탈레반이 날 살려줄 거라고 해서 카불에 남았는데 그 바람에 탈레반들에게 잡혀 끔살당했다.
  4.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암살되기 몇 달 전에 9.11 테러 발발을 예언하여 유럽의회에서 국제테러리즘을 주의하라는 연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