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전쟁

18세기에 벌어진 영국청나라의 전쟁.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이 있으며 보통 아편전쟁이라고하면 제1차 아편전쟁을 뜻한다.

전쟁이란 게 깨끗한 전쟁 더러운 전쟁을 논하는게 애매모호하지만 아편전쟁은 발발배경부터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막장성이 풀풀 풍겨서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자주 언급된다. 한국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일본이 대한민국에 마약을 밀수하다가 통상단절하니까 군대를 몰고 가서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부산과 인천을 자국 영토로 뜯어간 것과 같다.

그 당시 미국과 같은 위상을 가진 초강대국이 약소국이 자신의 영토 내에서 정당한 절차를 거처서 내린 조치에 앙심을 품고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청나라가 일반적인 의미의 약소국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군사 기술과 편제, 국가시스템이 전근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었을 뿐이지 경제력과 같은 다른 측면으로 보면 청나라 혼자서만으로도 유럽 전체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제1차 아편전쟁[편집 | 원본 편집]

발단[편집 | 원본 편집]

영국과 청나라간의 무역에서 영국은 손해를 보고 있었다. 당시 해외무역 독점권을 손에 쥐고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미국 독립혁명 전후로 면직물 산업에서 신대륙에 치이고, 강제로 벵골 지역의 농토를 뒤엎으려다 막대한 기근을 초래했다.[1] 재정 상황도 악화되면서 영국 본토 정부는 1810년대를 전후로 동인도 회사가 가진 무역 독점권을 하나 둘 회수하기 시작했고, 본토에서 관리가 파견되어 이사회에 영향력을 끼쳤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동인도 회사는 아직 독점권을 유지하던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 사활을 걸었지만, 이미 인도산 면직물은 청나라산 면직물에 비해 큰 메리트를 찾기 어려워졌고, 게다가 영국의 중국의 차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는 반면 영국이 청나라에 파는 물건들은 청나라에서 그리 끌리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은 차 구입을 위해 막대한 은화가 유출됐다. 그래서 무역적자를 메꾸려고 했는데 그 방법이란게 다름 아닌 마약인 아편을 청나라에다 팔아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편밀수로 재미를 보았지만 아편의 해악이 극심해지자 청나라 정부도 개입을 시작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사태수습을 명령했다.

부임한 임칙서는 아편의 밀수를 금지하고, 이와 관련된 현지 상인과 영국인들로부터 2만 상자 이상의 아편을 매수하여 모두 폐기해버렸다. 그렇다고 임칙서가 꽉 막힌 관리는 아니였고, 동시에 <국제법>을 번역해 배포하고, 영국 여왕에게 아편 처분에 관한 서신을 띄웠으며 주강 삼각주에 쇠사슬을 깔고 대포를 정비하여 급작스런 침입에 대비했다. 물론 처분 이후 영국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결국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영국이 청나라에 난징조약을 강제하였고 청나라는 홍콩을 영국에게 100년 임대를 하고, 전쟁 배상금과, 아편 몰수에 대한 배상금과 5개 항구를 개항을 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편집 | 원본 편집]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아편 전쟁 이후로 사회가 혼란해졌다. 유민이 대거 발생하였고 폭동이 빈번해졌다. 홍수전이 태평천국 건국을 선포하고 태평천국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기독교의 한 단체가 근원이었고 사유재산 부정, 빈부 차이를 부정하는 사상을 내세웠다. 또한 이 봉기는 또한 봉건제를 비판하고 외세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격을 가졌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결국 진압된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워낙 막장스럽게 벌인 전쟁이다보니 현대 기준으로는 상대국이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다른걸 전쟁명분으로 썼으면 썼지 아편전쟁과 비슷한 일은 일어날 일이 희박하다.

각주

  1. 20세기 초 벵골 대기근과는 다른 기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