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누웡

아누왕 공원.JPG

짜오아누웡(ເຈົ້າອານຸວົງສ໌, 1767년 ~ 1828년 11월 12일)은 위앙짠(비엔티안) 왕국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일평생 동안 시암 왕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위앙짠 왕국의 독립 전쟁에 평생을 헌신한 비운의 영웅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777년인 그가 10세 되던 해에는 시암 왕국 톤부리 왕조의 딱신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위앙짠 왕국을 침공해서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았다. 도시는 파괴되고, 많은 백성들이 딱신 대왕의 원정군에 학살당했으며, 진귀한 불상들은 거의 약탈당했다. 게다가 씨리분야싼 왕의 아들딸들도 시암 왕국에 볼모로 잡혀갔다. 이들 중 에서는 아누웡 본인도 포함되었다. 그가 시암에 있는 동안 형제인 나따쎈이 차기 왕으로 즉위해서 독립 전쟁을 벌였지만, 진압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아누웡은 억지로 시암 왕국에 충성 맹세를 하고 위앙짠으로 귀국했다. 1795년에 부왕으로 즉위하고, 1798년에 2만여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치앙마이로 가서 버마 원정군과 싸워 승리를 거듭했다. 그리고 위앙짠으로 돌아와서 차기 국왕으로 즉위했다.

내치적으로는 신하들에게 황금과 에메랄드 같은 진귀한 보석들로 여러 개의 불상을 제작할 것을 지시했으며, 씨분흐앙 사원이나 호빠깨우 사원 같은 여러 불교 사원의 건축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메콩강에다 나콘파놈으로 가는 다리를 놓기도 했다. 위앙짠 왕궁도 그의 치세에 이르러서 재건됐다. 왕국 내의 도적들도 소탕해서 치안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아들인 요 왕자에게는 각종 건축 기술을 가르친 뒤 짬빠싹으로 보내서 그곳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외교적으로는 일단 시암 왕국의 제후국으로 남으면서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버마군 토벌로 당시 시암 국왕인 라마 2세의 신임을 얻어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의 붕어 이후 라마 3세가 즉위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라마 3세는 시암의 강대함만 믿고 힘없는 위앙짠을 압박했으며, 아누웡을 무시하고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게다가 위앙짠의 백성들이 대규모로 시암에 노역으로 끌려갔다.

아누웡은 수모를 참아가며 라마 3세의 비위를 맞춰갔으나, 속으로는 군대를 일으켜 시암에게 보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이웃나라 월남의 황제인 가륭으로부터 빡쎄 땅을 할양해주겠다는 조약을 맺은 뒤에 파병군을 지원받았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영국과도 조약을 맺어 서양식 총기류와 탄약들을 구입했다. 11명의 대신들과 논의한 끝에 시암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1826년 12월에 그는 출병을 강행하여 기습공격으로 깔라신, 나콘랏차시마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영국이 시암을 공격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입수한 뒤 무리하게 대규모 공격을 강행하다가 시암의 반격으로 크게 패하고 역으로 위앙짠 왕국까지 시암에게 점령당한다. 아누웡은 월남의 진녕부로 망명해서 차기 월남 황제인 명명에게 새로운 파병군을 요청했고, 명명은 이를 수락했다.

아누웡은 월남군들과 전략을 짜서 두 군대가 합류하는 식으로 시암을 치기로 했지만, 전쟁 당시에 그는 같이 짜놓은 전략을 어기고 단독으로 메콩강 너머로 가서 시암을 공격했다. 결국 명명은 그에게 실망하여 파병을 중단했고, 위앙짠은 더욱 더 시암에게 황폐화됐으며, 아누웡 본인은 부하의 배신으로 시암군에게 사로잡혀 감옥에서 평생을 보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