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투더

司徒德. 자는 신원(慎元). 중화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외국인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10월 15일 중국 광둥성 언핑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국민정부 관료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 1942년 4월 15일 중한문화협회 주비회가 조직되어 중한문화협회 결성을 준비하였는데, 그는 주비회 주석을 맡아 임무를 총괄했다. 주비회는 1942년 10월 8일 충칭에서 활동하는 각 문화단체 책임자를 초청하여 중한문화혁회 결성 관련 최종 보고회를 가졌다. 이때 쓰투더는 임시정부 측의 신익희와 함께 협회 설립 준비 경과를 발표했다. 3일 후 열린 중한문화협회 성립식에도 참석해 협회 설립경과를 상세히 보고했다.

1942년 10월 17일 개최된 제1차 이사 및 감사회의에서 중한문화협회 비서장에 임명되어 중한문화협회 활동의 실무를 관장했다. 그는 국민정부 핵심 인사인 쑨커와 조소앙의 면담 장소 및 시간을 정하고, 중한문화협회에서 행한 강연의 연사를 섭외하거나 강연 원고의 교정을 요청했으며, 강연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미국인 학자와 임시정부 인사의 면담을 알선하는 등 여러 여갈을 수행했다. 각종 강연회, 좌담회, 토론회, 기념식 대부분을 주관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홍보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조소앙과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조소앙이 쓰투더의 부친상에 직접 조문하자, 쓰투더가 "부친상에 조문의 뜻을 전하여 주심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

1943년 5월 9일 한중문화협회 좌담회에서 “일본침략자의 동아시아대륙에 대한 침략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번의 대전이 끝난 후에 한국이 독립을 얻지 못하면 이번 전쟁의 목적을 제대로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독립문제는 전후 평화의 관건입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문제가 언급되자, 쓰투더는 직접 담화문을 발표하여 동맹국들이 임시정부를 조속히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2] 그는 이 담화에서 "중, 미, 영 3국 영수가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증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중략) 장 위원장(장제스)께서 누차 공개적으로 선언한 한국 독립 보증 약속, 중한문화협회 손 이사장(쑨커)의 평소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동맹국들은 속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여 영도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임시정부가 동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은 평소 우리가 가장 바라는 바”라며 임시정부 승인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쓰투더는 8.15 광복 후에도 임시정부에 우호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추진하는 중국 내 한국 관련 업무에 가능한 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주화대표단이 추진한 업무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의 보호와 귀국을 알선하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 7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

사진과 선물에 감사하며 작별을 고하는 편지


白凡 주석 보십시오. 11월 2일 보내주신 편지와 동봉하신 사진 한 장, 파커만년필 1자루 잘 받았습니다. 선생의 깊은 뜻을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중한 두 나라의 우의증진을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탤 것을 약속합니다. 이후 주중대표단 민석린(閔石麟) 동지와 긴밀히 연계를 취하며 중국 내 한국 관련 사무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런 귀국을 축하드립니다. 선생이 추구하시는 한국의 완전한 독립이 조속히 실현되고 중한 두 나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司徒德(印) 올림 11월 7일

1947년 4월, 이승만장제스와 정부 수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상하이를 방문했다. 4월 10일 중한문화협회는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을 초대하여 환영식을 가졌다. 다음날 이승만이 난징으로 이동하자, 난징역에서는 중한외교협회가 동원한 100여 명의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이승만을 환영하였다. 이승만의 난징 방문에 동행한 이는 다름 아닌 쓰투더였다. 또한 이듬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소속으로 한국에 방문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고, 5.10 총선거 이후에도 한국에 머물며 중한문화협회에 소속되었던 한국 측 인사들과 두루 교류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자 경교장을 찾아가 조문하였다.

1945년 2월 3일엔 국민정부 입법원 입법위원으로 활동했고, 1948년 입법부 제1회 입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정부가 국공내전에서 패전한 뒤 대만으로 천도할 때 따라갔으며, 1951년에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주한위원회 정기위원을 역임했다. 1970년 4월 12일 대만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쓰투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문미라, <중국인 독립유공자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사례 분석 — 황줴(黃覺), 두쥔훼이(杜君慧), 쓰투더(司徒德)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0.[1]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위키피디아 중국어문서[2]
  • 독립유공자공훈록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