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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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鉉國. 본관은 평산 신씨, 자는 사현(士賢), 호는 직당(直堂).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9년 12월 18일 경기도 여주군 소곡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가정(稼亭) 신만균(申萬均)이며, 모친은 함평 이씨로 이설서(李卨緖)의 딸이다. <신현국 연보>에 따르면, 이씨 부인은 태몽에서 푸른 빛깔의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을 보았으며, 그가 출생했을 때 좋은 기운이 방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신성미(申誠美)가 기묘사화를 피해 가족을 대리고 여주에 은거한 이래, 신현국의 조상들은 대대로 여주에 세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신혁국은 8세 때 외종조부인 이직서(李稷緖)에게 한학을 배웠고, 10세 때 압운(押韻: 한시부(漢詩賦)의 일정한 곳에 운(韻)을 달고 시를 지음)에 능숙하여 뛰어난 한시를 자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3세 때 소곡리에 잠서 거주하던 국산(麴山) 곽정현(郭鼎鉉)에게 3년간 교육받으며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5세 때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어느 날 큰일을 겪었다. <신현국 행장>에 따르면, 늦은 시간까지 집에서 <상서(尙書)>를 읽고 있을 떼 강도 여러 명이 동네에 난입하여 노략질을 했다. 마을 주민들은 허겁지겁 달아났지만, 신현국은 홀로 단정히 앉아 책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강도들은 그를 건드리지 않고 돌아갔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돌아와서 신현국이 화를 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들이 만약 저의 방에 들어왔다면 인의로 깨우쳐주어 반드시 양민이 되었을 텐데, 저들이 끝내 제 방에 들어오지 않아 저에게 행운이 아니고 저들에게도 불행한 일이 되었습니다.

19세 때인 1887년 여름, 여러 사우와 함께 여주 대로사 강당에서 모임을 가졌고, 겨울에 종숙(族叔)인 신율정(申栗亭)을 따라 충주 봉항리에서 독서를 하였으며, 이듬해 해주오씨 오한영(吳漢泳)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22세(1890년) 때 시세가 나날이 잘못되는 걸 보고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었다. 1895년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에 들어가려고 충주까지 갔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여 상황이 여의치 않자 돌아갔다. 이듬해(1896년) 청풍 장선에 거주하는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를 찾아가 수개월간 머물며 <소학>을 배우고, 성리학의 요점을 익혔다. 그는 이때부터 박세화를 평생의 스승으로 여겼고, 박세화가 서재 이름으로 써준 ‘직(直)’을 자신을 당호로 삼아 '직당(直堂)'이라 하였다.

국난이 계속되어 나라가 혼란해지자, 박세화는 세상을 피하기 위해 불억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신현국도 함께 하였고, 상당기간동안 용하구곡의 승경지에서 박세화와 깊은 학문적 사유를 공유했다. 그는 1900년에 스승이 있던 불억산 용하동 계곡을 찾아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에 기반을 둔 시를 지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봐 天眷左海邦


기자가 기강을 폈다네. 箕聖布綱紀

예악이 차차 갖추었으니 禮樂寢然備

오랑캐를 변화시켜 중국의 제도를 쓰게 시작하였구나. 變夷用夏始

성인이 예악을 제작하시고 累熙群聖作

서로 이어 모든 현인이 일어 나셨구나. 相繼諸賢起

협소한 동방의 한 모퉁이 褊小東一隅

당당하게 중화와 비교할 만하네. 堂堂中華擬

갑신년에 천지가 뒤집혀 涒灘天地翻

중화의 도는 막혔다네. 華夏道極否

우암 큰 어르신께서 방대한 역량으로 尤老大力量

치욕을 씻고자 맹서하였다네. 欲雪要盟耻

(중략)

후세로 내려오며 우리의 도는 땅에 떨어지고 世降成純坤

오랑캐의 발자취가 저잣거리에 가득하다네. 蹄跡滿城市

예와 이제가 너무나 크게 변하여 今古一大變

의복도 변하였고 모발도 잘랐다네. 服毁尋髮薙

청결한 땅, 어느 곳인지 알 수 있는가? 乾凈知何土

용하동! 좋은 산수로구나. 用夏好山水

어느 곳을 무이와 같다 하겠는가? 孰謂武夷同

내 생각으로는 화양이 바로 이곳이구나. 吾見華陽是

기자를 봉한 땅 천년 동안 箕封一千年

비밀스럽게 간직하여 때를 기다렸다네. 藏秘如有俟

하루 만에 작은 오두막 만들어 一日茅棟成

춘추의 대의를 강복하셨구나. 講服春秋義

그는 출사에 관심을 끊었다. 37세 때인 1905년 군수가 향교 강장, 향약장에 추대된 걸 제외하면 어떠한 공직을 맡지 않고 학문 수양에만 힘을 쏟았다. 1905년 박세화와 윤응선이 을사조약으로 인해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것에 분개하여 의병을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문경으로 잡혀갔다. 신현국은 박세화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문인 성헌(省軒) 이수영(李守榮)과 함께 구금되어 있던 문경으로 가서 일본 경찰에게 거칠게 항의하다가 자신도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이때 일경들이 쓰고 있던 관을 벗기자, 그는 "비록 죽더라도 관을 버릴 수 없다"라며 두꺼운 종이로 관을 만들어 썼다.


1907년 7월 일본군이 여주의 강한사(江漢祠) 강당을 점거한 뒤 21일 후에 물러나며 마을 십여 곳에 방화했다. 이때 창고지기였던 이동년이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곳까지 불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송시열의 영정을 대로사 서쪽에 위치한 효종의 영릉재실(寧陵齋室)에 봉안했다. 신현국은 일본군이 송시열의 사당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대로선생의 사당이 大老先生祠


우뚝히 여주 강가에 있구나. 巍然海東嶼

도의는 동방의 춘추요 道義秉春秋

큰 계책은 이윤, 여상과 같이 비교할 수 있네. 訏謨見伊呂

(중략)

온 나라는 왜적에 침노 당하여 通國犯豹狼

조정에는 소인배들이 가득하구나. 滿朝貪狐鼠

병화는 사해에 가득하고 燹熾震宇內

혹독하게도 여주 강가에도 왔다네. 偏酷黃驪渚

(중략)

살아 계실 때도 독대하여 이야기하셨고 當時獨對話

오늘날에 다시 만 가지 정서를 떨어놓으셨으리. 今日復萬緖

대명을 회복하려는 원한을 마치지 못하고 北沆寃未了

남쪽으로 우리나라도 맹세를 어겼다네. 南瀾載渝胥

우리 인류는 금수가 되었고 禽獸我人類

우리 인륜은 썩었다네. 糞壤我天敍

슬피 부르짖는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 嗷嗷輿民情

황폐하여 정착할 곳이 없구나. 糜爛無定處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박세화는 도가 망한 현실에서 구차하게 살 수 없다고 하여 목숨을 끊었다. 신현국은 스승의 곁을 시종일관 함께하며 스승이 순국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이에 대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른쪽 ‘예의조선(禮義朝鮮)’ 큰 네 글자는 나의 의당 선생님께서 자진을 할 때에(음식을 끊은 지 6일 후) 손수 쓰신 글씨이다. 아! 중화 4천 년의 예의가 융성했던 곳은 오직 우리 조선으로 세상 모든 나라가 본받을 곳은 바로 조선뿐이다. 여기에 선생님께서 도와 함께 망해 그 지극한 정성과 불쌍히 여겨 슬퍼하고 원망하는 의미가 심화처럼 드러내 스스로 그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진실로 세상 사람들이 기억을 하여 이 글씨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송자(宋子: 송시열)께서 말씀하신 ‘사람 마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 <직당집>, '경제예의조선족자후(敬題禮義朝鮮簇子後)'

스승의 장례식을 치른 뒤 여주로 귀환한 그는 1912년 봄 고향에 소곡정사(昭谷精舍)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고, 1923년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의 경포정사(敬浦精舍)로 옮겨 후학양성과 강학에 전력하였다. 그는 여주를 중심으로 의당학파의 구심점을 구축하였고, 1924년 자신과 함께 의당학파를 이끌던 윤응선이 사망한 뒤 의당학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929년 6월 8일 송시열 작고 240주년을 기념하여 의당학파 문인들을 강한사에 규합하였고, 그해 10월 박세화와 윤응선의 학은(學恩)을 기념하기 위해 융보설(隆報稧)을 조직하였다. 64세 때인 1932년 <수의설(守義說)>을 시작으로, <3년통상설(三年通喪說)>(1935년), <화동문답(華東問答)>(1936년), <중서역변(中西曆辨)>(1937년), <제자정록후(題自靖錄後)> 등 여러 편의 글을 집필했다. 8.15 광복 후에도 <칠실사담(漆室私談)>(1946년), <양씨설약변(梁氏說略辨)>(1947년) 등 여러 저술을 집필했다. 그는 '칠실사담'에서 광복 이후 좌우간의 극렬 대립을 통렬히 비판했다.

나라를 세운다며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산, 민주, 공화, 평등을 주장하면서 각각 당파를 형성하며 서로 원수처럼 공격한다. 임금과 신하의 대의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헐뜯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오랑캐의 도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중국은 이미 동화와 같이 되었고 삼강구법과 같은 것은 다시는 드러나지 못할 것이다.

1949년 11월 25일 고향 여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1세.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신현국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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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