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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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健植. 호는 삼강(三岡). 이명은 신환(申桓)·신두흥(申斗興)·신공칠(申公七).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9년 2월 13일 충청도 문의현 동면(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와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로 오랜 세월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의 인재 등용 정책에 따라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후 문중의 유능한 청년들이 신학문을 수학해 중앙 정계에 대한 진출을 꿈꾸며 상경했다. 그 중 신건식의 둘째 형 신규식은 고향에 문동학원, 덕남사숙, 산동학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1908년에는 문중 내 근대교육을 지향하는 영천학계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건식도 YMCA에서 운영하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근대적인 사고를 갖춘 개화인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신건식은 1912년 4월 저장성 항저우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형이 주도하던 동제사와 대동보국단에 참여했다. 동제사는 '동주공제(同丹共濟)' 즉, 한마음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뜻으로 표면적으로는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이 그 진정한 목표였다. 이 단체는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중국내 각 지역과 구미, 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포 청년들의 교육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로부터 망명해 오는 청년들에게 강습소를 마련하여 중국어를 가르쳤으며, 중국이나 구미지역 학교에 유학을 주선하였다.

하지만 언어 문제로 인해 이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게 되자, 신규식은 1913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였다. 신건식은 박달학원에 참여해 청년 교육에 앞장섰다. 또한 1915년 신규식과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동보국단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형 신규식의 뒤를 따라 대종교에 입교했고, 형과 더불어 조완구, 박찬익 등과 함께 대종교 교회를 세우고, 단군이 지상에 내려온 지 216년 만에 하늘로 올라간 일을 기념하는 날인 어천절(御天節)을 기념하는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1921년, 신건식은 국내로 밀파되어 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집을 수행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그 뒤 상하이로 돌아가다가 신의주에서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1] 그러다 신병 치료를 이유로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그는 경성에 머무르며 동지를 은밀히 모아 상하이로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상하이 망명 도중 다시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청주로 압송되었다. 1년 후 석방된 그는 3개월간 치료 후 1922년 상하이로 재차 망명을 시도해 성공했다.

그 후 1923년 4월 중국 항주부 주둔군 군의관에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2], 1925년에는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에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1928년에는 국민혁명군 중교로 복무하며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외과 주임으로 발탁되었고, 난징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와 청년 학생 등 한인 동포들의 숙식 경비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1933년 과로와 교통사고 등으로 심신이 고단해지자 중국군 계급과 직책을 사임하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신건식은 1937년경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는 난징시 교외에 있는 남기가(藍旗街) 1호에서 조소앙, 지청천, 홍진, 이광 등과 함께 생활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당시 그는 엄항섭과 함께 광복진선 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난징이 일제에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11월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난징을 탈출하여 창사로 이동하였다.

신건식은 1939년 10월 개원한 제31회 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해 12월 4일에는 양묵, 손일민과 3인이 상임위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3월 13일 이동녕의 국장 복상위원회가 서무·의식·공사의 3개조로 편성되었을 때 최동오 등과 함께 서무조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41년과 1942년 10월 개최된 33회, 34회 의정원 회의에도 충청도의원으로 참석하였다.

1943년 3월 4일, 국무회의에서 각 부장 추천으로 차장을 선임하였는데, 그는 재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곧이어 3월 30일 개최된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재무부 이재과장 업무까지 겸임하였다. 6월 29에는 겸임하던 이재과 과장을 곧 사위가 될 박영준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이듬해에도 재무부 차장에 선임되었고, 사위 박영준은 이재과 과장을 맡았다. 그해 10월에 개원한 제35회 의정원 회의에서 분과위원을 선임할 때, 그는 최석순, 이시영, 이상만, 왕통 의원과 함께 재정·예산·결산을 담당하는 제3과 위원에 당선되었다. 또한 1945년 5월 8일 수정된 원법에 의거하여 새로 분과위원을 투표할 때 그는 27표를 획득한 최석순에 이어 24표를 얻어 2위로 계속하여 제3과 위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그는 17회에 걸쳐 각종 의안을 공동 발의하는 등 왕성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42년 10월 28일 16명의 동료 의원과 함께 <광복군에 대한 건>을 공동발의해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는 이듬해 10월 14일, 5인 의원과 함께 다시 9개 준승의 취소 교섭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고, 11월 29일에도 6인 의원과 수정 제의했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후원을 받아 9개 준승의 취소를 위한 교섭에 나섰다.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1944년 8월 10일, 중국은 김구 주석에게 공함을 보내 9개 준승을 취소하고 한국광복군을 임시정부에 직속케 한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1945년 5월 1일 새로운 군사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援助韓國光復軍辦法)’이 성립되었다.

또한 신건식은 의원 27인의 공동 명의로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을 발의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0여 년이 넘었으나 국제사회로부터 아직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최단 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국 각 정부에 정식으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한편 1944년 3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신건식은 주중대표(駐中代表)를 맡아 한인 동포의 귀국 문제를 중국과 협의하다가 1948년 4월에 귀국했다. 이후 서울에 소재한 딸 신순호의 집에 지내다 1963년 12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신건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

  1.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1년 12월 26일자 기사는 신건식이 임무를 수행한 뒤 상하이로 돌아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된 뒤 검사국으로 이송 도중 암살되었다는 잘못된 기사를 실었다.
  2.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