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슈틸리케에서 넘어옴)
울리 슈틸리케
Ulrich Stielike
Uli Stielike 2012 1.jpg
인물 정보
출생 1954년 11월 15일 (69세)
서독 케취
국적 독일
신체 176cm, 69kg
프로선수 경력
종목 축구
포지션 수비수/미드필더
소속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3–1977)
레알 마드리드 (1977–1985)
뇌샤텔 크사막스 (1985–1988)
지도 스위스 (1989–1991)
뇌샤텔 크사막스 (1992–1994)
SV 발도프 만하임 (1994–1995)
UD 알메리아 (1996)
독일 (수석코치) (1998–2000)
독일 U-20 (2001)
독일 U-21 (2003–2004)
독일 U-19 (2004–2005)
독일 U-20 (2005–2006)
코트디부아르 (2006–2008)
FC 시온 (2008)
알 아라비 (2009–2010)
알 사일리야 SC (2010–2012)
대한민국 (2014–2017)
톈진 터다 (2017~)

울리히 "울리" 슈틸리케(Ulrich "Uli" Stielike)는 독일의 전 축구 선수이자 2014년부터 2017년 6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미드필더로 뛰었다. 2013-14 시즌 카타르 스타스 리그 '알아라비'에서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2014년 9월 5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계약기간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였으나[1][2] 2017년 이후 경기력 논란이 일었고 2017년 6월 13일 카타르전 패배가 계기가 되어 6월 15일 경질되었다.

클럽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묀헨글라트바흐(1973-1977)[편집 | 원본 편집]

어릴 적부터 고향 케취의 작은 클럽에서 뛰었으나 17세에 청소년대표로 뽑히면서 분데스리가 클럽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래는 케취에 남으려던 것을 묀헨글라트바흐의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설득하여 1973년 2월에 이적했고, 4월에 DFB-포칼 8강전으로 선발출장하여 데뷔했다. 이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출장했고 포칼 결승 연장전에 교체투입되어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이 제일 쉬웠어요 1973/74시즌부터 본격적으로 1군으로 출장하는데 측면수비수부터 중앙수비수, 미드필더까지 폭넓게 기용됐다.[3] 점차 미드필더로 출장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라이너 본호프, 헤어베르트 비머, 디트마르 다너, 크리스티안 쿨리크 등과 함께 팀의 허리를 책임졌다.[4] 유리몸 기질이 있어 출장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팀의 주축멤버로 활약했으며 팀을 잘 골라서 많은 트로피를 차지했다. 분데스리가 3연패를 달성했으며 UEFA컵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스몰마켓이었던 구단의 한계상 스타플레이어들을 지키기 어려웠고, 슈틸리케도 팀을 떠나게 된다.[5]

레알 마드리드(1977-1985)[편집 | 원본 편집]

BMG에서 보낸 경력도 화려하지만 커리어를 대표하는 전성기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레알에서 뛸 때다. 전설적인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마지막 성공작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영입대상은 헤어베르트 비머였지만 막상 경기를 지켜보니 슈틸리케가 너무 마음에 들어 비머를 포기하고 슈틸리케를 영입했다. 슈틸리케는 기대에 부응하여 8년간 스페인에서 뛰면서 독일 출신으로는 최다 출장과 최다 득점을 기록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레알의 외국인 출장 3위 기록이었다.[6][7] 슈틸리케는 이적하자마자 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6년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고, 1979년부터 1982년까지 돈 발론 최우수 외국인선수 4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8][9]

라리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였으며 말년에는 리베로로 전향하여 원숙한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1979/80시즌 이후로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1984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유럽대회 또는 컵대회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은데 당시의 라리가가 지금처럼 최상위 빅리그로 군림하던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10][11] 슈틸리케는 라리가의 중흥을 이끌었던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이지만 그보다 먼저 뛰기 시작한데다 훨씬 위상이 높은 요한 크라위프의 존재로 이런 선구자적 이미지도 희미하고,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의 한계로 인해 그 활약과 리그 내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레전드가 된 것.[12]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오래된 선수라서 그렇다. 역대 최고로 꼽히는 극히 일부의 선수를 제외하면 축구팬들이라도 예전 선수는 잘 모르기 때문. 꼬우면 슈스터처럼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었어야지

뇌샤텔 크사막스(1985-1988)[편집 | 원본 편집]

말년은 스위스에서 보냈는데 첫시즌에 클럽 역사상 2번째로 UEFA컵 8강에 진출했으며, 2번째시즌에는 최초의 리그 우승, 마지막시즌에는 최초의 2연패를 안겨주었으며 뇌샤텔 크사막스는 이후 지금까지 리그 우승이 없다.[13] 스위스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 코스를 밟았다.

국가대표 경력[편집 | 원본 편집]

1975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데뷔하여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나 당시 서독 멤버가 너무 좋았고 나이도 어려서 기회를 많이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22세의 나이로 스페인으로 훌쩍 떠나버린 뒤로는 나치오날엘프로부터 외면받게 된다. 흔히 헬무트 쇤 감독이 슈틸리케에게 해외로 떠나면 다시는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당시 DFB 회장인 헤어만 노이베르거의 의사였다는 얘기도 있다.[14] 그러나 1978 FIFA 월드컵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여파로 그래도 8강이라는 게 함정 유프 데어발이 신임감독으로 부임하고 리빌딩을 하면서 슈틸리케를 불러들여 리베로로 썼다.[15] 이후 슈틸리케는 클럽에서는 미드필더, 국가대표팀에서는 리베로로 뛰게 된다.[16]

유로 1980에서 서독의 리베로로 출전하여 우승, 1982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했다.[17]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도 서독 최고의 선수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파울 브라이트너의 몫이었으며 슈틸리케가 당대 서독을 대표하는 리베로이긴 했으나 베켄바우어의 아성은 넘볼 수 없었다. 유로 1984까지 주전으로 뛰었으나 서독이 실망스러운 경기력으로 탈락했으며 이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한 친선경기가 마지막 국가대표경기였다.[18]

감독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으로 오기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언론으로부터 한국 축구를 개혁할 적임자처럼 여겨졌지만 냉정하게 말해 검증된 바 없는 '왕년의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1'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스테판 사퓌자를 발굴했다지만 후임자인 로이 호지슨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것을 생각하면 빛이 바랜다. 독일 수석코치로 부임하기 전까지의 커리어는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되며, 독일에서 일하던 시기는 '독일축구의 암흑기'였다. 국내 언론들은 청소년 대표팀을 지휘하며 많은 선수들을 길러냈다고 칭찬했지만 사실 지금 독일 대표팀의 중추를 이루는 스타플레이어들은 슈틸리케가 떠난 이후에 등장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19]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을 이끌 때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아들의 병간호 때문에 사임하여 국제대회를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이후에는 이런저런 군소 클럽들을 떠돌아다녔으니 분명히 리스크가 큰 선택인 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다[편집 | 원본 편집]

2014년 9월 5일 홍명보 감독의 후임으로 선임됐다. 훗날 인터뷰에서 한국 축구팀 감독직을 수락한 이유에 대해서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상대편 경기분석을 위해 한국으로 파견돼 3주간 머무르며 한국의 뜨거웠던 축구열기를 직접 느꼈다. 그 열기를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커서 감독직 제안을 수락하는데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20]

2015 AFC 아시안컵[편집 | 원본 편집]

부임한지 4개월 만에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특히 결승까지 무실점을 기록하였으며 비록 늪축구라는 오명과 함께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EAFF 동아시안컵 2015[편집 | 원본 편집]

2015년 8월초에 열린 EAFF 동아시안컵 2015에서 1승 2무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중국전을 제외하고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동아시아 라이벌들이 참가하는 것 외에는 국제적인 위상이 없는 대회이고 이 대회보다 월드컵 예선에 더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언론들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설레발을 쳤던 한일전을 쿨하게 넘겼다. 참고로 이때 들어올린 우승컵은 슈틸리케가 감독이 된 이후 처음으로 들어올린 우승컵이다.

전반적인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슈틸리케 부임 초기 및 2015년도 여론[편집 | 원본 편집]

기대 이상의 대박이라는 평이 중론. 뚜렷한 전술적 혁신 없이 무난하게 운영하고 있지만 그만큼 기본에 충실하다. 편견없이 다양한 선수들을 관찰하고 발탁하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K리그 선수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평. 2015년 9월 기준으로 딱 20경기를 치뤄서 70%라는 고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상대들이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전력이 약한 아시아 팀들이라고는 하나 기존의 대표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탄탄한 수비와 기복없는 경기력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기본에 충실한 운영이 얼마나 강력한지 입증했다(?)

국대 감독 말기 때의 평[편집 | 원본 편집]

무전술 논란, 리더십 논란[21]으로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추가 바람

우승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선수[편집 | 원본 편집]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레알 마드리드

뇌샤텔 크사막스

  • 스위스 수퍼리그 : 1986-87, 1987-88

서독

감독[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수상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선수[편집 | 원본 편집]

  • 돈 발론 최우수 외국인 : 1979, 1980, 1981, 1982

통산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시즌 클럽 리그 대륙 총계 비고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2-73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 0 2 0 0 0 3 0 분데스
1973-7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26 3 0 0 5 0 31 3 분데스
1974-75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25 1 2 0 9 1 36 2 분데스
1975-76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33 4 4 0 6 2 43 6 분데스
1976-77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24 4 0 0 8 1 32 5 분데스
1977-78 레알 마드리드 27 13 ? ? - - ? ? 라리가
1978-79 레알 마드리드 24 2 ? ? 2 1 ? ? 라리가
1979-80 레알 마드리드 31 5 7 0 8 1 46 6 라리가
1980-81 레알 마드리드 29 5 3 1 9 0 41 6 라리가
1981-82 레알 마드리드 28 9 7 1 6 0 41 10 라리가
1982-83 레알 마드리드 28 4 5 1 6 0 39 5 라리가
1983-84 레알 마드리드 23 3 5 1 1 0 29 4 라리가
1984-85 레알 마드리드 25 0 0 0 10 0 35 0 라리가
1985-86 뇌샤텔 크사막스 ? ? ? ? 8 4 ? ? 스위스
1986-87 뇌샤텔 크사막스 ? ? ? ? 4 1 ? ? 스위스
1987-88 뇌샤텔 크사막스 ? ? ? ? 0 0 ? ? 스위스
종합 독일 109 12 8 0 30 3 147 15
종합 스페인 215 41 51 7 42 2 308 50
종합 스위스 67 10 ? ? 12 5 ? ?

각주

  1. 슈틸리케 "위대한 열정이 한국축구의 자산", 연합뉴스, 2014.09.06. 자, 2015.10.11. 확인.
  2. %91축구%93축구협회는 왜 독일 출신 슈틸리케를 택했나?, 뉴시스, 2014.09.05. 자, 2015.10.11. 확인.
  3. 그렇다고 백업은 아니었고 주전으로 뛰었다. (생일이 지나기 전이었으니)18세부터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팀이었던 글라트바흐의 주전을 차지했다는 소리다.
  4. 당시 글라트바흐는 4-3-3 포메이션을 즐겨 썼는데 멀티플레이어가 많아 중원을 다채롭게 구성했다.
  5. 귄터 네처, 헤닝 옌센이 이미 팀을 떠났었고 이후 본호프, 알란 시몬센 등 팀의 주축들이 거의 매년 팀을 떠났다.
  6. 현재는 5위로 밀려났다.
  7. 레알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었는데 비머도 좋은 선수이긴 했지만 이미 서른을 넘긴 나이라 리스크가 상당했고 실제로 1년 뒤 고향의 아마추어팀으로 갔다가 부상으로 은퇴했다. 그에 반해 슈틸리케는 아직 22세에 불과한 '베켄바우어의 후계자'였다.
  8. 유일무이한 기록이며 누적 수상으로도 유일한 4회 수상자다. 2010년을 끝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깨지지 않을 기록.
  9. 사실 대외적으로는 FC 바르셀로나베른트 슈스터 쪽이 인지도와 평가가 더 좋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돈 발론의 본사는 바르셀로나에 있었다는 것.
  10. 1960년대부터 1972/73시즌까지 라리가에 외국인 제한이 생겨 오직 이중국적자만 뛸 수 있었고, 침체에 빠져 있던 리그가 부흥한 건 외국인 금지를 해제한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한 뒤에도 지금과 같은 위상은 아니었다.
  11. 브라질의 플라카르는 1999년에 명문클럽 랭킹을 만들면서 스페인 리그를 잉글랜드, 독일, 이탈리아보다 낮은 등급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12. 이건 비단 슈틸리케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뛰었던 라리가의 유명 선수들 대다수에게 해당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13. 원래는 1910년대에 우승이 하나 있긴 하지만 정확히는 크사막스의 전신 시절이다.
  14. 당시 축구협회는 대외적으로 해외에서 뛰는 선수를 감독이 관찰하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15. 리빌딩을 하는 동안 서독의 최우선과제는 베켄바우어의 후계자를 찾는 것이었는데 사실 슈틸리케도 완벽한 해답은 아니었다. 국제대회에선 슈틸리케가 리베로로 뛰기는 했지만 베켄바우어 은퇴 이후 유로 1984까지 무려 15명의 리베로를 실험했을 정도.
  16. 이는 베켄바우어와 반대다. 베켄바우어는 클럽에서 리베로 위주로 뛰면서도 대표팀에서는 미드필더로 계속 뛰었다.
  17. 4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실축했는데 지금까지 월드컵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유일한 독일 선수다.
  18. 공교롭게도 이 경기가 베켄바우어가 감독으로 지휘한 첫번째 경기였다.
  19. 애초에 청소년대표팀에서 훈련하고 쑥쑥 성장하는 건 만화 속 주인공 얘기지 단지 몇 차례의 소집만으로 선수들이 급성장할리가 없다. 호성적을 낸 감독을 꼽으려 해도 호어스트 흐루베쉬부터 나와야 한다.
  20. 슈틸리케 "K리그 팀 AFC 탈락위기…혁신 필요", 연합뉴스, 2015.05.22.
  21. 이란전 패배 후 "우리에게는 카타르 세바스티안 소리아와 같은 공격수가 없어 이런 결과가 나왔다", "나는 나가라고 하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만.", 중국전 패배 후 "어떤 전술로 나갔어야 할지 내가 묻고 싶다." 와 같은 책임 회피성 발언이 여론에 불길을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