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밤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이라는 말에 아름다운 야경이나 장식따위를 절대 기대하지 마라! 그동안 해외의 눈치를 보던 독일아돌프 히틀러가 마침내 전사회적 경제적 범위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격리 정책을 시작한 것이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으로 이미 시민권을 박탈당한 유대인들은 이제 독일의 사회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수정의 밤이라는 단어는, 친나치 폭도들이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을 하도 많이 깨부셔서 생긴 표현이다.

계기[편집 | 원본 편집]

헤르셀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은 독일 하노버 태생의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그의 가족은 뉘른베르크 인종법 직후 독일을 탈출, 프랑스에 거주했는데 비슷한 시기 폴란드에서 자국 바깥에서 5년 이상 거주할 경우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졸지에 무국적자이자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폴란드에서 이와 같은 법안이 통과되자, 독일도 자국 내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모두 국외추방시켰고, 그린슈판의 친척들도 이 추방 대상에 포함되면서 그린슈판의 나치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분노에 불타오른 그린슈판은 주 프랑스 독일 대사관을 대상으로 보복 행위에 나섰고, 1938년 11월 7일 출근하던 3등 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를 저격했다. 라트는 급히 병원으로 호송되어 치료받았으나 11월 9일 결국 숨을 거두었다.

문제는 그린슈판의 보복이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용되어 유대인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 신호탄이 되었다는 데 있다.

11월 8일~10일 새벽 : 수정의 밤[편집 | 원본 편집]

아직 라트가 숨을 거두기도 전인 8일에 이미 전국적으로 유대인 회당과 상가, 자택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장검의 밤 이후 사실상 지역 정치깡패로 전락해버린 돌격대였고, 나치의 당 조직이 이를 지원하였으며 관영 언론들은 과장보도로 이를 열심히 부추기고 있었다.

11월 9일 오후, 라트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탄압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책성을 띠기 시작했다. 당시 열린 당 지도부 비공개회의에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쓴 일기에 의하면 히틀러는 경찰력이 폭도를 진압하는 일이 없게끔 조치하고 당 조직에게 시위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라고 지시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같은 지시를 받아든 괴벨스는 같은 날 밤 10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라트 서기관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유대인에 대한 보복행동을 부추겼다.

뒤이어 괴벨스는 베를린과 뮌헨의 당 조직에게 구체적으로 유대교 회랑을 전소시킬 것을 지시했고, 게슈타포는 그 즉시 전국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이고 무분별한 체포를 시작했다. 11월 10일 새벽이 되면 이미 체포된 유대인이 수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게슈타포는 유대인 체포 우선순위에 있어 부유층을 최우선적으로 두어 재산 약탈에 방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1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하룻밤 동안 직접적인 유대인 사망자만 수백여 명에 달하는데, 폭행에 의한 사망도 많았지만 폭행과 구타에 절망에 빠지며 자살한 사람도 상당했다. 그 외에도 일부 양심 있는 독일인들이 돌격대와 폭도를 피해 부상당한 유대인을 겨우 병원에 데려가주니 의사란 작자들이 유대인은 치료해줄 수 없다며 거부하는 일까지 속출했다.

11월 10일 오전 : 경제의 아리아화[편집 | 원본 편집]

이와 같은 대규모 반유대인 폭력 행위에 모든 나치와 독일인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경제 담당부서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라며 절규했고, 경제장관 발터 에마뉴엘 풍크(Walther Emanuel Funk)는 괴벨스에게 직접 항의했고, 지방 출장 중이었던 헤르만 괴링 역시 같은 이유로 펄쩍 뛰며 히틀러에게 하소연했다. 괴링은 독일 경제개발 4개년 계획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탄압과는 무관계하게 독일 경제에 해가 되는 대규모 폭력 행위에 반대하고 있었다.대신 괴링은 법과 제도를 마음껏 활용하며 비폭력적으로 유대인 재산을 갈취했다. 거 참 인도적이네

이에 히틀러는 괴링과 풍크를 달래면서, 괴벨스에게 일단 폭력행위를 종식시키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대인의 경제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충공깽한 대책을 내놓았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독일 경제에 해악을 끼쳤으니 그들이 직접 피해를 복구해야 한다뭐라고요?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내세우며 대대적인 보복 정책이 시행되었다.

대표적으로 피해를 본 유대인 상가들이 가입한 보험회사들은 나치로부터 정상적으로 보험금을 계산하되, 그 보험금을 정부에게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사실상 보험금을 강탈했고, 보험금과는 별개로 유대인들이 피해 상가 및 가옥의 복구비를 스스로 마련해서 정부에 납부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법률을 신설했다.

그밖에도 이 날 오전 나치 회의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식별표지인 다윗의 별 착용을 강제하자던가, 유대인들의 거주를 특정 지역에 한정시킨다거나, 공공시설에서 유대인 출입을 금지하자는 등의 여러 제안이 나왔으나 일단은 각하되었다. 대신 이 제안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정책에 반영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독일 내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로서 완전히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유대인들은 자유로운 상거래 활동조차 차단되었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정부에 막대한 벌금까지 어거지로 납부해야 하다보니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 이들의 자산은 독일 기득권층이 헐값에 사들였다.

악몽같은 밤을 보낸 유대인들은 얼마 안 남은 재산을 가지고 필사의 대탈출을 시작한다. 그래도 정든 고향을 못떠난다, 아직 우리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소수 독일인들도 있다며 독일에 남은 유대인들은 이후 수용소로 끌려간다. 망명 유대인들도 상황은 비슷했던게, 영국이나 일부 중립국으로 망명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 다시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때문. 유대인 망명자는 베네룩스 3국프랑스에 많았는데 모두 1940년에 독일군에 점령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