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

성덕왕
인물 정보
본명 융기(隆基), 흥광(興光)
사망 737년
국적 신라
가족 신문왕 (아버지)
효소왕 (형)
신라의 제33대 왕
임기 702년 ~ 737년
전임 효소왕
후임 효성왕

성덕왕(聖德王, 생년 미상~737년, 재위 기간 702년~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이다. 신문왕의 차자[1]이며 효소왕의 동생이다. 효소왕 사후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국사 시간에 통일신라시대의 업적으로 722년 백성들에게 과전을 지급했다는 내용으로 기억에 남는 왕.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신라 왕실을 높이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세에 세상을 떠난 효소왕의 아우였으니 초기 왕권은 미약했을 것이다. 국인에게 추대되었다는 기록들에서 확인되듯 힘있는 귀족들의 힘이 초기 국정에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태종을 위한 봉덕사(奉德寺) 건립이나 705년 자신의 잠저시절 거주하였다고 추정되는 오대산에 진여원이라는 절을 설립하였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2] 또한 중국에서 수입해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사상을 받아들여[3] 효소왕이 세웠던 황복사탑을 다시 수리하여 탑의 2층에 사리함과 소탑, 소불을 안치하였다.[4]

왕권강화와 개명[편집 | 원본 편집]

그의 치세에는 수많은 자연재해가 끉임없었지만 그만큼 재해복구를 위해 대규모 구휼과 죄인 사면을 하였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구휼을 위해 30만 500석을 지원했다고 기록되었다.

성덕왕 10년 10월에 백관들에게 경계를 하라는 조서를 공포하였다. 이로서 왕과 신하들 간의 마찰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그 대안으로 왕이 관심을 보이는 건 유교적 관료 양성과 김유신계의 지원이었다.

성덕왕 11년(서기 712년) 3월 당나라에서 왕의 이름이 황제의 이름이 같다고 하여 개명할 것을 요구하자 받아들인다. 8월,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도록 하여서 그간 대접받지 못하였던 김유신계를 대우하였고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김윤중[5]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덕왕이 김윤중을 총애하자 어떤 자가

지금 종친과 인척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유독 소원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이것이 어찌 이른바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겨야 한다는 도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라면서 왕을 힐난한 기록이 나오자 성덕왕이 그들을 꾸짖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성덕왕 16년(서기 717년)에는 당의 사신으로 왔던 김수충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화를 바치자 대학(大學)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혼과 재혼[편집 | 원본 편집]

성덕왕 15년(서기 716년) 성정왕후를 궁에서 내보내게 되는데 태자 책봉 1년 후 일어난 일이라서 그 사이 석연치 않은 일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심지어 태자는 성정왕후 폐출 1년 후인 성덕왕 16년(서기 717년)에 세상을 떠난다.

성덕왕 19년(서기 720년) 왕이 이찬 순원의 딸을 새로 왕비로 두었고 이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당황제에게 미녀를 헌납하다[편집 | 원본 편집]

성덕왕 22년(서기 723년) 성덕왕은 당현종에게 포정(抱貞), 정완(貞菀)이라는 두 미녀를 헌납한다. 현종이

너희들은 모두 왕의 내종 자매로서 친척과 헤어져 고국을 떠났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도록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이 이들을 친척으로 말하며 보냈으리라 볼 수 있지만 그녀들의 아버지의 관직은 높은 편이 아니었고 일각에서는 거짓으로 친척으로 꾸며서 보냈으리라 보기도 한다.

당나라의 황제가 거부할 정도로 이렇게 조치를 취한 이유는 이 즈음에 신라가 대당외교를 우호적으로 하는 중임을 짐작케 한다.

발해와 마찰을 빚다[편집 | 원본 편집]

성덕왕 32년(서기 733년) 7월 발해등주를 건너가 당을 치면서 당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성덕왕의 관직을 높이고 발해를 치도록 권유한다. 이에 왕은 김윤중을 포함한 인물들을 이끌고 발해를 치게 하였으나 때마침 큰 눈으로 병사들이 얼어죽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전공이 없이 돌아가게 된다.

이 이후로 신라와 발해간의 큰 전쟁이 일어난적은 없으나 기존부터 성덕왕 시기 때 북방 지역에 성을 쌓거나 대당외교를 강화하거나 하는 등 발해를 경계하던 움직임은 있었다. 성덕왕 이전에 지금의 강원도 지역에 국선인 부례랑이 납치된 기록[6]이나 수로부인 설화의 배경이 강원도 쪽인 것을 볼 때 신라 북방강역은 느슨하게 고구려계 세력이 혼재하였거나 영역이 아직 미약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발해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국과 관계는 우호도가 높아져서 성덕왕 34년 대동강 이남 땅을 신라가 다스리는 걸 승인하게 된다.

일본과 외교 마찰, 왕성국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성덕왕 34년(서기 735년) 2월 일본 사신으로 간 김상정 일행이 신라 조정을 왕성국(王城國)으로 칭하며 일본에 통보를 하자 양국간의 사이가 크게 악화되었고, 이 이후부터는 일본국에 대한 고자세 외교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일본은 훗날 발해에게 신라를 침범할 것을 요청하게 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당의 명을 받고 발해를 친 부분[편집 | 원본 편집]

일부 신라를 싫어하는 정서의 일부로 당에게 사대를 한 부분이나 동족인 발해를 공격한 부분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이미 공격했으나 큰 눈으로 인해 돌아간 기록을 통해서 양 국가간에 교전이 없던 점, 당에게는 눈이 내려 병력 손실을 언급하여서 명분을 얻은 점을 볼 때 실제 신라가 발해를 칠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발해와 신라 양 국가는 이후 큰 교전 없이 겉으로는 잘 지냈었기 때문이다.

잦은 재해와 구휼 차원에서[편집 | 원본 편집]

삼국사기》에 나오는 부분만 몇 가지 추려도 이하와 같다.

  • 성덕왕 6년(707년) 대규모 구휼
  • 성덕왕 8년(709년) 흉년
  • 성덕왕 9년(710년) 천구에 떨어짐
  • 성덕왕 10년(711년) 폭우 및 흉년
  • 성덕왕 19년(720년) 2월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왕은 민생을 위해서 각종 방법을 동원해본 모양으로 거사 이효를 초빙해서 두 번이나 비를 내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민생을 위해 노력한 부분은 이후 성덕왕을 기리는 부분에서 잘 나타나지만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재해들이라 초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재해란 재해는 다 겪는다. 《삼국유사》를 따르면 무려 30만 500석을 지원했다고 나올 정도이다.

한국사 공부에서의성덕왕[편집 | 원본 편집]

성덕왕의 업적으로 나오는 건 주로 백성들에게 민전지급, 물시계에 관(關)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인 누각전(漏刻典) 설치, 국학 재정비 정도의 업적을 공부한다. 한국사 공부를 할 때 성덕왕이 나온다면 대개 이런 일을 했다는 위주로 공부할 것이다.

각주

  1. 효소왕 말고 형이 더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조』에 따르면 보질도와 그 아우 효명태자가 나오는데 보질도 태자는 동생인 부군이 죽자 국인들이 왕위를 사양하고 도를 닦으러 떠나 효명태자가 왕이 되었다고 나온다.
  2. 장자가 아닌 상황에서 즉위한 군주들이 정통성 높이려고 하는 일련의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3. 옛 탑을 수리하면 복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상.
  4. 황복사지 3층석탑에 있는 두 불상은 각각 국보 제80호와 국보 제79호가 된다.
  5. 김유신의 적손이다.
  6. 《삼국유사》에는 적적(狄賊)에게 붙잡였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