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사건 정보
날짜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10분
장소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앞바다
인명피해 사망 : 292명, 생존 : 70명
재산피해 서해훼리호 여객선 1척 침몰
서해훼리호 인양과정 뉴스영상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해양 사고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출항한 서해훼리호가 목적지인 격포항으로 항해도중 높은 파도와 거센 측풍에 휘말리며 위도와 격포항 사이 해상에서 10시 10분경 전복되어 침몰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참사이자 안전불감증 사례이다.

사고 과정[편집 | 원본 편집]

오전 9시 40분, 승객 362명과 화물 16톤 가량을 적재한 서해훼리호는 파장금항을 출항하였다. 당시 기상 상황은 북서풍이 초당 10~14미터 수준으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파고도 2~3 미터에 달해 출항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을 결정한 서해훼리호는 위도를 떠나 격포항으로 운항도중 선체 좌측에 몰아치는 거센 파도가 예상보다 거세자 선장은 파도를 선수로 받아내기 위하여 약 60도 가량 변침하여 12노트의 속력으로 진행하였다. 결국 거친 기상 상황 속에 임수도 부근 해역에서 더 이상 항행이 어려운 것으로 판단한 선장은 출발지인 위도로 회항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리려 남쪽으로 40도 가량 변침했으나 이 과정에서 세찬 돌풍이 선체 측면에 몰아쳤고, 높은 파도에 휘청이던 서해훼리호는 결국 선체가 전복되며 순식간에 침몰했다.

사고 원인[편집 | 원본 편집]

당시 해역의 기상 상황은 여객선 운항이 어려운 수준의 악천후였지만 폭풍주의보와 같은 기상특보는 발령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해훼리호는 예정된 출항 시각인 오전 9시를 넘겨 계속 기상상황을 주시하며 대기하였으나 오전 9시 40분경 출항을 결심하고 위도를 출발하였다. 당시 위도와 격포항을 이어주던 유일한 교통 수단인 서해훼리호는 영세한 업체 사정으로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던 낙도항로 여객선이었다. 서해훼리호 운항 초창기에는 위도와 격포항을 왕래하는 승객들의 숫자가 적어 하루 1왕복의 운행 횟수를 겨우 유지하던 시기였지만 19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위도가 낚시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점이 전국적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주말이면 수많은 낚시꾼들이 몰려들었다. 수요가 폭증하자 운행 횟수 증편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영세업체라는 이유로 증편을 거부하였다. 하다못해 주말만이라도 증편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수는 나날이 증가했으며, 위도와 격포항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라는 점으로 하루 1왕복의 적은 운행 횟수가 감당하기 어려운 승객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말미암아 서해훼리호는 정원 221명을 넘긴 초과승선을 암묵적으로 용인해야 했으며, 이를 감시하고 제제해야 할 관계부서 역시 형식적인 서류절차만 수행했을 뿐이었다. 상습적으로 정원을 초과한 과적운행을 하던 서해훼리호는 다행스럽게도 특별한 사고 없이 운항했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안전규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사고 당일에도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보다 훨씬 많은 362명을 승선시켰으며, 멸치액젓 등 위도 주민들이 육지로 보내는 화물 13톤까지 탑재하였다. 선장은 여객선 운항에 주의하라는 기상 정보를 수신하고도 출항을 요구하는 승객들의 성화[1]에 못 이겨 출항을 결정했으며, 이를 지도감독하는 관계자들 역시 상습적인 정원초과 운행에 무감각했던 상황이었다. 항해사는 마침 휴가중이라 갑판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고, 승객들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게 승선을 관리해야할 선원은 단 2명에 불과했다.

결국 정원을 훨씬 초과한 상태에서 화물까지 가득 적재한 서해훼리호는 악천후의 기상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출항을 감행하였으며, 결국 외해의 거친 파도와 강풍에 못이겨 회항하는 과정에서 급변침으로 인해 선박이 크게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정원을 초과한 승객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배의 중심이 크게 무너졌고, 결국 복원력을 상실한 서해훼리호는 전복되며 탑승객 대다수가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수장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배가 침몰하면서 당연히 작동해야할 9척의 구명정 중 단 2개만이 정상적으로 펼쳐졌으며, 바다로 뛰어든 생존자들 일부는 2척의 구명정에 올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또다른 생존자들은 아이스박스나 물에 뜨는 물체를 부여잡고 구조를 기다릴 뿐이었다. 또한 당시 선박의 안전조치가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승객들은 제대로 된 구명조끼 착용조차 교육받지 못했고, 워낙 정원을 아득히 초과한 상황에서 선원들의 숫자도 부족했으므로 안전관리는 전혀 기대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피해 및 수습[편집 | 원본 편집]


탑승객 362명 중 292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참극이 벌어졌다. 탑승객들 대부분은 구명조끼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승객들로 인해 가득 들어찬 선실 내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침몰한 선박과 함께 물속에 수장되었다. 사고 해역의 악천후로 인해 구조대의 신속한 접근이 어려웠으며, 사고후 30분이 지나서야 구조 헬기가 뜨기 시작하였고, 해경 소속 경비함은 1시간 정도 흐른 뒤에야 사고해역에 도착해 물위로 떠오른 시신을 수습하는데 그쳤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 보트와 아이스박스 등 부유물을 잡고 애타게 구조를 기다렸으며, 주변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사고 소식을 접하고 구조작업을 벌여 40명 가량의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사고 당일인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었고, 51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초기에는 사망/실종자가 140명으로 추정되었으나 구조작업이 진행되면서 사망자가 급격하게 증가했으며, 10월 15일에는 생존한 것으로 추정되었던 선장, 갑판장, 기관장 등 3명의 선원이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발견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1월 3일에 마지막으로 남겨졌던 실종자 1명의 시신이 수습되어 총 292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선박 인양[편집 | 원본 편집]

인양중인 서해훼리호의 모습

사고 이후 선박 내부에 남아있을 다수의 희생자를 수습하기 위하여 침몰한 서해훼리호에 대한 인양작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해군의 구난함인 구미함이 투입되었으며, UDT/SEAL 등 특수부대원 다수가 투입되어 시신 수습 및 수중 탐색을 지원했다. 당시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지점의 수심은 약 18미터, 유속은 평균 3~4노트에서 최대 7노트까지 강력하였으며, 뻘이 많은 서해안 지역의 특성상 시야 확보는 극도로 불량하여 대략 50cm 정도의 시야가 확보되는 수준이었다. 선박인양용 대형 크레인이 사고해역에 도착하였고, 선박이 가라앉은 바닥의 뻘을 뚫어 인양용 체인을 결속했다. 인양작업 착수 7일이 흐른 후, 크레인이 선체를 수면 가까이 들어올리는데 성공하였으나 당시 해역에는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었고, 25~30노트의 거센 바람과 높이 4~5미터의 파도가 몰아치는 바람에 선체에 연결했던 와이어 하나가 끊기면서 다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다시 와이어를 묶는 작업을 진행하여 17일만에 인양에 성공하였으며, 크레인이 들어올린 서해훼리호는 대형 바지선에 실려 사고원인 분석을 위해 옮겨졌다.

대한민국 언론의 부끄러운 모습[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오보에 관한 비판조의 기사

사고가 난 뒤로 유력 언론들은 일제히 사고 후 선장 등 선원 3명이 생존하여 도피하였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물론 제대로 된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추측성 보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담당한 검찰까지 이 기사를 맹신하여 선장 등 선원들이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전제하에 이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으며, 이때문에 선장의 가족들은 죄인의 가족이 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일부 언론은 아예 선장이 생존한 것을 기정사실화해 기사를 작성하였으며 외딴 섬으로 도피했다거나 중국이나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근거 없는 보도를 남발했다.

선장이 시신으로 발견된 후 선장 부인의 인터뷰

그러나 10월 15일 오후 1시 30분, 생존해 어디론가 도망쳤다던 선장의 시신이 선박 내부 통신실에서 발견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간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과 수배령까지 내리면서 가족들을 감시했던 수사기관들은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버렸고,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만들어서 죄인으로 만들어 고통받았던 가족들은 언론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더욱이 선장이 발견된 장소가 통신실임을 감안하면, 언론이 주장했던 무책임하게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주했다는 모습과는 정반대로 끝까지 구조요청을 위해 통신을 시도했다는 정황이 나온 셈이기에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합은 10월 10일을 언치일로 선포하는 등 성급하고 무책임한 보도 행태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보통 해양 사고시 희생자들은 조류에 휘말려 사고지점에서 멀리 떠내려가 시신 수습이 힘든 경우가 많은데, 이 사고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모두 수습되는 흔치 않은 결과가 나왔다. 그 원인은 선박이 침몰하면서 대다수 탑승객들이 선박 내부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것이 주된 이유로 밝혀졌다. 실제로 수중 수색에 나선 구조대원들은 선실 내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수십 구의 시신을 인양하기도 했다.
  • 이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아 여객선 탑승자들에 대한 철저한 신원 확인 및 정원을 초과하지 않도록 관리감독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 사고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한 대형참사가 20여 년이 흐른 2014년 4월 16일에 반복되고야 말았다.
  • 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문민정부의 이런저런 대형 흑역사 중 하나이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사고는 일요일에 발생했다. 당시 추석 연휴 등으로 위도에 머물렀다가 뒤늦게 육지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토요일에 위도에 들어왔던 수많은 관광객들, 위도 주민들까지 몰려들었고, 하루 1회 육지로 돌아가는 유일한 배편이었기에 만약 운항이 취소된다면 육지로 돌아가야 할 대다수 사람들은 꼼짝없이 월요일까지 위도에 묶여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