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희

서병희(徐炳熙 또는 徐丙熙, 1866년~1909년 10월 11일)는 대한민국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6년경 경상도 양산군(현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래 한의업을 경영하고 있다가 1907년 11월에 의병장 허위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는 선봉장으로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했으나 실패한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들고 1907년 12월 28일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서두성, 윤정의(尹政儀)와 제휴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3월 21일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에서 일본 수비대와 맞붙었지만 의병 7명이 전사하고 총기 40여 정이 망가지는 등 타격을 입고 퇴각했으며, 4월 3일 경주 산내면 저동에서 경주 수비대와 교전해 부하 2명을 잃었다. 이후 그해 5월에 윤정의와 결별한 그는 양산군 하서면 배내골에서 밀양수비대와 6월 9일에 교전했으며, 6월 13일 양산군 하북면 성천마을의 여인숙에 숙박하던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들을 습격해 2명을 죽이고 조선인 통역 3명을 처단했다. 그는 여인숙을 나와 이웃집의 전영준에게 시신을 동장(洞長)에게 보이고 아침 일찍 처리하라고 지시하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

이후 함안군 군북면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에 격문을 발송했으며, 1908년 6월 20일에 칠원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군자금 800냥을 거둬들였다. 이어 그해 8월에는 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창원군 양전면 호라리에 사는 부호 박진사(朴進士)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두었으며, 9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재무주사(財務主事) 1명을 처단했고, 11월에는 의령, 고성 등지에서 군자금 200명을 모집하고 일본인 상인을 사살했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 여율리에서 밀고를 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본 2명에게 체포되었다. 서병희는 의령수비대에게 넘겨졌고, 그곳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서병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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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