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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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大順.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3년 10월 8일 황해도 연백군 연안부 대산동에 태어났다. 그는 경성부 수하동 보통학교 소사로 일하던 중, 1919년 4월부터 10월까지 배운성, 김해룡이 자유민보와 혁신공보라는 제목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자, 이 문서의 인쇄를 맡아 보통학교 소사실 앞에서 비밀리에 등사기를 사용하여 자유민보 2천매, 혁시공보 3천매를 인쇄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체포된 그는 1920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이후 출옥한 그는 김상옥, 한훈 등과 함께 암살단을 조직하고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방문하는 틈을 타 일제 고관을 암살하고 주요 기관을 폭파해 의원단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무기를 운반하던 한훈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 모든 것이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미결구류일수중 30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2]

그 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다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8.15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왔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하였고, 1951년 3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3월 11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대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서대순의 장남 서상국 씨는 육군 중령을 지냈고, 2009년부터 광복회충북지부 회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조상이 친일파라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지만 그들의 자손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그저 속죄하면서 사회 혹은 국가에 자신들의 조상이 친일로 모은 재산을 환원하고 조용히 살면 좋을 것이다"라며 "하지만 그들은 되려 본래 그들의 것이라며 시에서 시민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땅을 자신들의 것이라며 배상을 요구하거나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죄를 덮기 위한 행동들을 이어오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밝혔다.[3]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